앞에서 여러 차례, BSC가 전략실행을 위한 강력한 관리수단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종의 management tool입니다. 강력한 관리수단을 필요로 하는 경영자들에게 어필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BSC를 채용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캐플란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 박사는 인사문제의 전문가들이 아니고 회계학과 기업전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기업의 전사적 성과나 역량에 관한 관리수단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변의 인사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협력하여 BSC개념들을 확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기업의 성과와 전략을, 그리고 조직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양사상의 뿌리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세계에 대한 관리주체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맺음(connectedness)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사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관리의 개념은 유대기독교 사상, 즉 구약성경 창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도록 최초의 인간에게 위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질서한 세계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서로 조화롭게(다른 말로 하면 질서 있게) 잘 자라고 유지되도록 돌봐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서구인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은 동양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불교와 유교에 영향을 받은 동양인에게 세계란 서로 관계를 맺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주체(subject)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서구인들에게 세계란 다스려야 할 대상(object)이었습니다. 모르는 세계가 있다면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대상과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아 다스렸지만, 일상적인 관리의 대상과 방법은 계명과 율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상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정했습니다. 심지어 피해액을 정확히 계산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는 것까지 정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정신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런 계명과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힘의 외교를 하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으로 타인과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계명과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존의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복음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선악을 문제 삼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포도원 일꾼의 비유>, <달란트 비유> 등과 같은 주옥 같은 비유를 통해 사랑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겉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면서, 속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에 대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관리의 대상과 방법을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사회의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바람에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관리의 대상은 타인이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했고, 관리의 방법은 법규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가르침이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간단했지만,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법은 위선을 조장할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겉으로는 법을 지키면서 내면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BSC는 성과관리 또는 전략실행의 수단으로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규정합니다. 하지만, 법이 위선을 조장하는 것처럼, 이런 규정은 주인의식의 결핍을 면책시켜 줄 뿐입니다. 조직원들은 평가에 유리한 것들을 성과지표로 설정하거나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목표수준으로 정합니다. 주인의식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표와 목표를 정하고, BSC의 매뉴얼에 맞춥니다. 여기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영자나 혁신담당자들은 경영목표(숫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줍니다. 이것을 톱다운 캐스케이딩(top down cascad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직원들은 위에서 내려준 숫자에 맞춰서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창의성과 주인의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조직 내에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됩니다. 경영자들은 로봇 같은 조직원들을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보상과 처벌에 의한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을 강구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과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에 대한 보상의 차이와 처벌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류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영향은 아직까지 경영학의 여러 분과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보상에 의한 인간의 행동수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논의는 <돈은 인간의 정신을 왜곡한다>에서 간단히 포스팅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의 충격적인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을 BSC와 같은 규정화된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고 관리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도록 창조(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오직 서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과부, 고아,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인간을 품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사상이 지난 2000년 동안 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기독교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유일신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유일신 개념은 다른 세계관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이런 배타성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정복하는 과정은 유대기독교 근본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지만, 유대기독교 사상은 이런 착취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 확립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가 줄어들었지만, 음성적으로는 여전히 착취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기득권자의 약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여 <테일러리즘>에서 <MbO>를 거쳐 <BSC>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기득권층의 질서유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사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경제적 부가 곧 신의 축복으로 인식되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개신교 윤리의 세속화>라는 제목으로 이미 포스팅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기득권층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노동통제의 내용과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린이 노동금지, 근로시간의 제한, 노동조합의 결성 등과 같은 근로조건이 현격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관리의 수단이 점차 정교해졌고 모든 것을 측정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BSC가 개발되었고 많은 경영자들에게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직에 적용했을 때, 조직원들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됩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지 매우 의아해합니다. 기업이익을 위해 인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관리이데올로기(management ideology)와 인간정신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녀를 길러보신 부모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부모들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아이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의 뜻대로 관리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장성한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녀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관리의 대상으로 자란 자녀들은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이 억압되어 후일 장성해서도 자신의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기대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육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조직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BSC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이제 결론 삼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물론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관리대상자에게 노예의식을 심어줍니다. 타인을 관리하려는 관리자는 타인을 자신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예속된 인간에게는 자발성과 창조성 같은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원을 강력하게 관리하는 수단인 BSC는 오히려 조직을 점차 병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l 맥도날드는 맛을 계량화해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l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경영진의 입장에서 계량적 지표가 필요한 게 현실 아닌가?
l 사물을 측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l 그렇다면 경영자의 입장에서 관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의 계량화와 측정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약한 매운 맛을 가미한 비빔밥을 참 좋아합니다. 비빔밥에도 약한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을 넣어 비비면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청양고추장 같은 강도가 높은 고추장을 넣는 경우에는 비빔밥을 실패합니다. 딸꾹질이 날 정도로 강한 매운 맛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운맛을 정확히 측정하고 등급화하여 번호를 매겨서 어느 식당에 가도 동일한 맛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매운맛도 철저히 측정하고 관리했으면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측정과 관리의 합리화를 거쳐야 합니다. 경영진은 이런 계량화된 지표를 활용하여 경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갑순은 75점짜리 인생이고, 홍길동은 80점짜리 인간이라고 점수를 매기거나 등급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정신이 삽시간에 상품화되겠지요. 이런 짓은 인간의 영혼에 심대한 상처를 입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내가 영국 리더풀을 여행하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노예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었다는 역사를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노동시장이라고 이름 붙인 노예시장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진척되면,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꿈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상품화하려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사물에 대한 측정과 계량화 노력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에 있어서 사물과 인간 사이에 뚫을 수 없는 방어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을 관리하려는 의도와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상사는 부하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하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상사는 이미 리더십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리더십의 결여는 관리를 부릅니다. BSC같이 부하를 강력하게 쫄 수 있는 관리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리더십이 아닌 관리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리더십에 대해서는 이미 몇 꼭지를 쓰긴 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리더십과 관련된 주요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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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직장인 2009/07/13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것이 계량화할수 있는것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것 같습니다.
관리하지 않고 리더십으로 자발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것은 좋은 방법이긴 한데
구체화될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리더십은 훈련될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리더십 향상을 또 관리해야 하는건 아닐까요?
경영진들은 불안해 합니다. 잔소리를 해도 제대로 안되는데 내버려두면 제대로 할것인가.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리더로써의 자신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쉽지 않네요. 제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건지 너무 얕게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많아 교수님 수업한번 알아봤는데 생각보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네요.
물론 교수님이 책정하신거 아니지만요. ㅎㅎ
자꾸 공짜로 배워가는것 같아 죄송하네요.
계량화와 비계량화의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겠군요. 대개의 경우 계량화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치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비교하게 되면, 서열과 등급이 생깁니다. 우열이 갈리게 되죠. 우위에 선 사람과 열위에 선 사람이 나뉩니다. 이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면 경쟁하겠죠.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생깁니다. 이긴 사람은 권력(돈)을 갖게 되고, 진 사람은 빼앗깁니다. 진 사람은 앞으로 이기도록 분발시키는 동기부여의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쁠 것 없습니다. 하지만 경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진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때로는 이긴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속이는 전략을 쓸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을 끝없이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긴 사람이라도 항상 이길 수 없으며, 자신보다 더 유능한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사회의 갈등과 불안의 원인이 됩니다. 말하자면, 동물의 왕국처럼 변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에 대한 계량화와 그 결과의 비교행위는 우리가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계량화와 비교평가는 어떤 경우에도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성과급 몇 푼 또는 승진이라는 한줌의 권력을 당근으로 내거는 조직운영행태는 인간을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짐승처럼 치사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자유, 선택, 의미, 책임과 같은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이지요. 리더십은 이것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의 능력을 무시하고 단순히 자극-반응시스템으로 관리하려는 온갖 시도는 결국 사회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월 스트리트의 붕괴에서 보았듯이 말입니다.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 질문 때문에 포스트 하나를 더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수업을 들으시려고 했군요. 나는 학교당국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학습시스템이 상업화되어 돈으로 해결하려는 행태입니다. 돈이 없으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 있거든요. 이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MBA과정은 캐시카우라서 등록금이 매우 비쌉니다. 그만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짧은이야기 2009/07/17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으로 엮인 부부관계에서도 사랑 외의 다른 요소, 즉 다른 남편/아내와 비교하여 평가하고, 나를 향한 상대방의 마음이 혹 나보다 덜하지 않은지 확인하고 테스트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매기고.. 이렇게 되는 것은 '나'가 결코 아파선 안 된다,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상대가 내게 해를 입힐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 이런 계산이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불신, 비교, 평가가 부부 사이의 원만함을 해치고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고요.
회사는 달라야 할까요? 신뢰와 격려, 동기 부여가 아닌 당근과 채찍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 관계를 두고 어찌 '가족 같은 직원'이 될 수 있겠으며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 회사와 이 일을 위해 평생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부부끼리도 서로 계산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아주 피곤할 때는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뢰가 없으면 오로지 계산만 남습니다. 그 계산의 결과와 득실에 따라서 서로 다른 행동패턴을 보일 것입니다.
나는 가정을 효율성이 가장 높은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가정처럼 만들 수 있다면, 엄청난 효율성과 효과성을 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