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영상은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MBA과정 2009학년도 가을학기 리더십개발론강의 중 중요개념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내용의 보완이나 다른 견해가 있으면 댓글로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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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였던 모한다스 간디를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로 변화시킨 이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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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예술평론가, 시인, 화가였던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악마의 경제학을 걷어치우고 인간의 경제학을 외쳤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스킨에 대해 가슴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느린걸음 2007


러스킨이 쓴 네 편의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007) 입니다. 이 책은 두 가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부의 정의와 정직성의 회복입니다.

 

러스킨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집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는데 어머니와 아이들이 모두 굶주려 있다면, 그들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어머니가 그 빵을 먹으면 아이들은 빵을 먹을 수 없고, 아이들이 빵을 먹으면 어머니는 배를 곯은 채 일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 사이에 적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빵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힘이 제일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해서 먹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적개심을 품고 서로 바라보며, 이익을 얻기 위해 폭력이나 교활한 책략을 쓴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54~55)

 

이러한 인간간계의 미묘함은 손익의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행동 법칙을 도출하려는 합리적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은 이런 인간관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은 기껏해야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절대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나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91)

 

영혼이 없는 경제학과 경영학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러스킨은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애초부터 손익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어 왔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인간에게는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영혼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도록 말이죠. ()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창출되며 정직성이 회복되었을 때 그 부의 풍요로움을 함께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합니다.

 

활발한 국민과 좋은 정부를 가진 나라에서는 각 개인이 다양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그 역량을 검증 받고, 그 능력을 특별히 필요로 하는 곳에 사용함으로써 그 등급과 공로에 따라 보상이나 권위를 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불평등하지만 조화로운 결과를 낳게 된다(92)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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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골고다 언덕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자신을 죽인 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예수가 죄수 두 명과 함께 처형되는 현장에 있던 로마 병사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가 없었던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죽은 자를 살렸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은 위선을 조장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세계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 병사들은 예수가 죄 없다는 그 명백한 사실을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요? 병사들이야 무식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를 심문했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맡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역사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식인 계급에 속했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예수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유대사회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의 비범성을 알아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을 깨지 못했습니다. 유대땅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롯왕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거침없는 가르침과 진실폭로에 겁을 먹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의 역사의식의 결여. 이것이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역사의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성찰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역사적 존재로서 자각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의 결핍은 사회적으로 많은 위험과 위기를 초래합니다. 최근에 겪은 대표적인 사례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시는 세계사적 역사의식의 결여로, 박정희는 민족사적 역사의식의 궁핍 때문에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부시나 유신시대의 박정희와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비전/목적/방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비전/목적/방향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 또는 사회가 그것을 원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을 힘으로 밀어 부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다른 부분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내 분야에서만 본다면 경영학은, 20세기 초반, 숫자로 쥐어짜던 제1세대 경영학(Taylorism)에서, 20세기 후반,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던 제2세대 경영학(Druckerism)을 지나왔습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제3세대 경영학(Wholism)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직과 조직구성원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구성원 개개인은 구분되는 독립체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조직에 소속되면 그 조직의 전체가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개체가 전체요 전체가 곧 개체인 상태입니다. 개개인이 조직의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낱개로 찢어진 존재가 아니라 낱개의 특성을 보존한 채 따뜻하게 연결된/뭉쳐진 공동체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때, 비로소 높은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국식 경영학의 폐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현정부의 경영방식은 제1세대 경영학에 속하는 계량화에 의한 명령과 통제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실용적 기술을 활용해야 하는지도 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하지만, 현정부에서는 이런 고민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속도전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온갖 과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역사의식의 결여를 힘의 실용적 활용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요? 힘의 활용과정에서 겪는 무수한 고통과 희생을 우리는 그저 감수하고 있어야 할까요?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힘으로 밀어 부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가 가르쳤던 것처럼, 힘을 쓰는 사람은 결국 힘으로 망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이런 의문들은 흥분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촛불을 든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촛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효과가 있긴 하지요.) 온 국민의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합니다. 사색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간의 훈련을 해야만 사색이 가능합니다. 역사의식은 사색을 통해 싹틉니다. 사색의 훈련이 없이 오로지 손익만 계산해 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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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나는 조직에 관한 기본적인 사상이 대전환의 기운을 서서히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3세대 경영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제3세대 경영학에서는 조직과 경영관리를 홀로그램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을 하나의 홀로그래픽 시스템(holographic system)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념은 조직의 한 요소인 조직구성원 개개인에게 조직전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2세대 경영학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조직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구성원 개개인이 곧 조직의 전체라는 말입니다. 조직은 구성원의 집합이기도 하지만, 조직의 요소인 구성원이 곧 조직이기도 합니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홀로그램(hologram)의 원리와 양자물리학의 기초적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홀로그램이란 고대그리스어 전체라는 뜻의 홀로스(holos)와 메시지라는 뜻의 그라마(gramma)가 합쳐진 말입니다. 1940년대 발견된 입체사진술을 홀로그래피(holography)라고 부른 데서 유래된 것인데, 홀로그램은 전체가 각각의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라는 의미입니다.(홀로그램과 홀로그래피의 원리에 대한 쉬운 설명은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 이균형 옮김,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 정신세계사 1999을 참조하세요.)

 

물론 나눌 수는 있겠지만, 나누어진 부분 속에 또다시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전체론(wholism)이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견해는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1992) 교수에 의해 제시되었고, 신경생리학에서는 칼 프리브람(Karl Pribram, 1919~) 교수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이 얘기는 다음 강의에서 조금 더 할 예정입니다.

 

홀로그램 이론이 가지는 조직이론적 의미는 조직을 하나의 전체로 보았을 때, 조직구성원 개개인도 동시에 조직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사과 하나가 있다고 칩시다. 나는 이 사과의 한 부분을 칼로 도려냅니다. 사과는 전체이고, 도려낸 조각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홀로그램 이론에 의하면, 떨어져 나온 조각이 곧 사과 전체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전체는 부분으로 나누어지지만, 부분은 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전체도 전체이고 부분도 전체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조직구성원 개개인이 곧 자신이 속한 조직이라는 의미입니다.

 

상상이 잘 안 되는 사람을 위해,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한 가닥의 머리카락만 있어도 경찰은 범죄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지요. 머리카락에 범인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직구성원 한 사람 속에, 그 사람의 직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조직 전체의 정보와 에너지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조직구성원 개개인이 조직전체의 정보와 에너지를 담고 있다고 했을 때, 조직은 어떤 원리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양자물리학적 개념을 이해하면 쉽게 풀립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입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입자 중 하나를 떼어내어 무중력 상태의 우주 속으로 보내놓고, 하나를 변화시키면 다른 입자도 동시에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입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 뭔가에 의해 연결되어 있지 않고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없지요. 그래서 이것을 동시성(synchronicity)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우주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발전시킨 분석심리학에서는 동시성이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1998, 313~323쪽을 참조하세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칼 구스타프 융의 개인적 삶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융의 저작과 관련 문헌을 읽으면서 무의식적 마음이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영혼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융의 자서전, 조성기 옮김, 『기억, , 사상』, 김영사 2007과 융의 전기인 디어드리 베어, 정영목 옮김, 『융』, 열린책들 2008, 그리고 게르하르트 베어, 한미희 옮김, 『카를 융 생애와 학문』, 까치 1998도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좋은 문헌입니다. 특히 융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문헌은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뿐만 아니라 이 교수의 3부작인 『그림자』, 한길사 1999,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2001,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2002이 있습니다.)

 

사건들이 서로 시간, 공간, 인과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일치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입니다. 융은 이 동시성을 물질적 개념이나 형이상학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흔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인과적 동시성(acausal synchronicity)을 자연계에서 가끔 발견합니다. 바닷속에서 수많은 물고기 떼가 동시에 방향을 틀면서도 서로서로 부딪치지 않는 것은 동시성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텔레파시 현상이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옛말은 동시성이 작동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계에는 인간이 발전시켜 온 지적 합리성 너머에 비합리적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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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체스터 바나드 이후에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서서히 나타나서 제2세대 경영학의 관점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입니다. 그는 미국경영학에 또 하나의 큰 산맥을 만들었습니다. 1954년에 출간된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라는 책은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드러커 자신이 조직은 유기체여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목표와 자율의 의한 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늘날 MbO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때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건너 오면서 목표관리라고 왜곡 번역되어, 목표를 정해주고 그 목표를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목표관리를 한다고 해서 보니까, 국장과 과장의 목표를 사전에 정해서 그것을 가지고 나중에 평가하는 것을 목표관리, MbO라고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율은 없고 오직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기본 사상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편리한 방식으로 비틀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료조직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은 죄다 시늉을 내지만, 실상을 까보면 정말이지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한국은행에서 20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국정감사도 받고, 가끔 감사원 감사도 받습니다. 그리고 재무부에서는 보안점검이라는 것도 나옵니다. 그리고 정보부, 보안사 등의 인사들도 들락거립니다. 수십 명의 기자단이 수시로 출입합니다. 한국은행은 그들 때문이라도 매년 조직운영의 합리화를 위한 계획을 세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연간사업계획을 보면, 매년 거의 똑 같은 말들이 되풀이됩니다. 효과성 제고, 효율성 향상, 경쟁력 강화, 생산성 신장, 조직유연성 확보 등과 같은 말을 써 왔습니다. 체스터 바나드가 정의한 효과성과 효율성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지만, 만약 20년간 사업계획대로 되어 왔다면, 내가 한국은행을 떠날 때는 효율성과 생산성이 차고도 넘쳤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진단한 한국은행은 그 동안 추진해 왔던 사업계획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행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조직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던 때였습니다.

 

내가 한은을 떠나기 전 마지막 3년간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철환 총재의 명을 받아 조직개혁 작업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전 총재는 사심 없이 한은을 위해 개혁하려고 했지만, 썩은 도끼자루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습니다. 한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보면 다들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 부총재보였던 이성태 총재뿐만 아니라 당시 총무국장이었던 이승일 부총재는 이코노미스트와 관리자로 성장한 분들이지만 조직문제에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한은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그게 매우 이상했습니다.

 

당시 재무부를 포함한 중앙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효율성이나 효과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말에 드디어 국가부도위기를 맞았습니다. 관료와 공공기관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혼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내가 아주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개별적으로 보면 다들 유능한 사람인데 조직으로 뭉치면 그 유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그 당시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그런 고민을 강의했었는데, 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한 것이 『똑똑한 자들의 멍청한 짓 한국 관료조직의 개혁을 위한 진단과 처방』이란 책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조직 속에 들어가면 흐리멍텅한 의사결정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설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조직에는 구성원들의 정신을 빼놓는 뭔가의 제도적 장치들이 유령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제도의 폭정 또는 제도적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를 바꾸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제도적 장치의 합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제도운영의 공정성, 구성원들간의 신뢰, 비전을 향한 열정, 정신과 정신의 교감 등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제도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공정해야 투명해지고, 거꾸로 투명해야 공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구성원들이 멍청한 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조직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유일한 수단인데도 정부와 공공기관은 투명성은커녕 외환위기를 빌미로 자신들을 더욱 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는 금융분야에서 일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얘기니까, 온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교육부를 보겠습니다. 교육관료들은 교육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수십 년간 끊임없이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미궁에 빠지고 있습니다. 교육관료들이 정체성과 영혼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들 역시 형편없는 교육제도를 만들어낸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제도의 암묵적인 폭력에 쓰러진 피해자인지도 모릅니다. 이들도 개별적으로 보면,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교육부라는 조직에 들어가서, 자기가 맡고 있는 직무의 존재목적을 잃어버렸을 뿐입니다.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구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드러커가 주장하는 제2세대 경영학의 기본사상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했다면, 우리는 벌써 선진국이 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왜곡되지 않은 개념과 그 취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MbO의 기본사상은 근로현장에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해 주어야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를 부여해서 쪼면 된다는 사상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목표관리제도라고 해서 목표를 기록하고 상사와 부하가 합의하면 되는 그런 조잡한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유한 잠재력이 있고, 그 잠재력을 잘 발현할 수 있도록 스스로 통제해나가는 방식의 관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도 스스로 기획하고, 그 목표를 잘 달성했는지의 여부도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피터 드러커가 의도했던 MbO였습니다. 그래서 『경영의 실제』에서 보면 목표(Objective)라는 단어와 자기통제(Self-Control)라는 단어를 마치 한 단어처럼 사용했습니다. 자기통제가 가능할 때, 조직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조직이 부여하는 목표달성의 압박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20세기 전반부에서는 테일러리즘에 의해 인간이 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되던 것을, 드러커의 사상에 의해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로 대접받게 되었고 조직운영의 주체로 해방된 셈입니다. 이윤은 기업의 존재목적이 아니며, 기업의 생존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터 드러커를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워렌 버핏과 마찬가지로 CEO들의 높은 연봉에 대해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비난했고 종업원의 평균연봉의 20배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이런 관행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부의 경영학은 제2세대 경영학으로서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했습니다. 이런 사상을 나는 드러커리즘(Druckerism)이라고 부릅니다. 조직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외부환경의 정보와 에너지를 받아들여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신진대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조직구성원은 조직전체의 유기적 부분으로서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조직의 지속성에 기여하는 인과관계를 중시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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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론의 발전과정은 경영학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조직이론가들이 만들어 놓은 조직개념도 시대의 지배적 관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영학의 발전과정을 대강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분합니다.

 

     1세대 경영학(Taylorism) : 20세기 전반

     2세대 경영학(Druckerism) : 20세기 후반

     3세대 경영학(Wholism) : 21세기

 

20세기 초기에는 조직을 기계론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은 경영학이 탄생하는 초기에 있었던 관점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테일러리즘이 대표합니다. 1강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직을 기계에 비교했고, 조직구성원을 그 기계의 부품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덕목은 기계적 조화(mechanical coherence)입니다. 인간의 근육과 움직임이 기계장치와 가장 잘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조직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현상에서 조직이라는 개념적 실체를 체계적으로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이 독일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베버도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유럽, 특히 독일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군주정으로부터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장악하여 통일국가를 이룩하였으나, 베버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조직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고 관료제의 조직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은 관료주의의 폐해를 너도나도 심각하게 얘기하지만, 당시에는 합리적이고 법률적인 근거에 의해 권한을 가지고,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따라 일하게 되면, 봉건적 군주제에서 겪었던 폐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관료제 조직이야말로 가장 능률적인 조직형태라고 주장했습니다.
(막스 베버, 박성환 옮김, 『경제와 사회 1, 문학과지성사 1997, 408쪽 이하를 참조하세요.)

 

이때부터 공식적인 조직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프로세스를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좋으냐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권한과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학파라고 부릅니다. 공식적인 구조와 체계와 절차를 정하는 방식은 마치 정교한 시계를 설계하는 것과 같고, 구성원은 몰개성적인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했습니다. 조직구성원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권한과 책임의 한계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력 따위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제1세대 경영학의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테일러리즘과 제도주의적 관점은 아직도 경영학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여러 곳에서 얘기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인간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 실험을 통해 금방 밝혀졌습니다. 공장 종업원들에게 근로조건을 아무렇게나 바꾸어도 생산성은 올라갔습니다. 당황한 연구원들이 그 원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호주출신의 심리학자인 엘톤 메이요(George Elton Mayo, 1880~1949)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실험대상인 종업원들이 연구원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생산성이 좋아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 가설 검증 작업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호손실험(Hawthorne Studies)얘기입니다. 인간은 공식적인 구조보다는 비공적인 집단에 소속되고 그곳에서 인정받을 때 높은 생산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부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론이 나왔습니다.

 

그 후에 실무경험이 풍부했던 <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는 개인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를 일치시킬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과 유인책을 잘 써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의 공로는 미국경영학에서 하나의 커다란 산맥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선 오늘날에는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효과성(effectiveness)과 효율성(efficiency)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히 구분했습니다. 명시적인 목표에 도달한 정도를 효과성으로 보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구성원의 동기가 충족되는 정도를 효율성으로 정의했습니다. 조직의 목적을 달성해서 높은 효과성을 이룩했더라도 구성원의 행위가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불만족을 유발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조직이 구성원의 동기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조직의 목표를 달성해갈 수 있다면, 그런 조직은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협동을 통해 성장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체스터 바나드(Chester Barnard), 『관리자의 역할』(The Functions of Executive), 신한종합연구소 1993, 21쪽 이하를 일단 참조하세요. 이 책은 경영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번역을 다시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이 협동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후대 경영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다양한 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였던 허버트 사이몬(Herbert Alexander Simon, 1916~2001)에게 큰 영향을 주였습니다. 사이몬은 인간의 의사결정이란 결코 완벽한 합리성에 기반하지 않으며 어느 정도 만족한 수준에서 결정해 버린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면에 인간의 행동에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지성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인데 그는 197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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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1)_인간을 보는 눈


경영학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인간관에 관한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성립된 학문입니다. 경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경영자나 경영학자들은 사람을 기계론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보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테일러리즘(Taylorism)이었습니다.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는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했습니다. 노동자의 근육을 기계장치와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동작과 시간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훈련시켰습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것이 당시 노동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테일러 자신도 과학적인 관리방식이야말로 노동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생산성을 높여서 임금을 더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뉴턴이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믿음입니다. 경영에서 모든 것을 계량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계량화의 문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계량화는 사물의 탈가치화 현상을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생수 한 병을 450원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이 PC 한 대가 45만원이라고 칩시다. PC는 생수의 1,000배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생수 1,000병을 가져가면 PC 한 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물은 다른 사물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갖습니다. 그것은 PC도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눈 앞에 있는 생수 한 병의 가치가 PC 한 대의 가치보다 훨씬 크지만, 계량화된 화폐가치로 보면 PC 1,0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히게 되면 각각의 사물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됩니다.

 

화폐경제하에서는 물물교환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유하려면 돈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원됩니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는 삭제됩니다.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만이 유일한 가치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는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삭제하는 특징을 갖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계량화는 삶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지극히 왜곡된 현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수학이나 공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수학이나 공학의 기초 위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활용하는 모든 장치와 시설물들은 수학과 공학의 덕택입니다. 나는 수학적 사고야말로 이성적 활동의 가장 아름다운 영역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계량화 또는 수학화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소금을 염소와 나트륨으로 분해해서 그 본질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소금이 인류에게 주는 은유와 상징,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가치는 계량화 또는 수학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의 대부분은 이런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계량적 인간관으로 돌아오죠.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로부터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1947~)의 경쟁전략론에 이르는 20세기 경영학의 흐름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감정을 가진 부품’, ‘생각하는 부품’,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부품’, ‘경쟁할 줄 아는 부품등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계량화의 맹점을 계량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간관은 우리에게 심대한 폐해를 남겨놓았습니다. 가치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이윤을 남기는 데 필요한 효율성과 생산성이 되었고,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해 당근과 채찍에 의해 통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실증주의 또는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뢰와 우정, 사랑과 몰입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측정하기 어려운 항목들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재무제표에 이윤을 확대하는 항목들만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조직은 자본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숭고한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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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누가 나에게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경영학 고전을 두 개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체스터 바나드(Chester I. Barnard, 1886~1961)의 『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1938)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의 『The Practice of Management』(1954)를 들 것입니다. 후자는 이미 번역되어 나왔고 드러커는 거의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의 이름과 사상의 대강은 알고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나드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체스터 바나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세기 경영학에서 경영사상의 지축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데도 세간의 인기를 크게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나드 이후의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그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은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몬(Herbert A. Simon, 1916~2001)입니다. 그의 제한적 합리성과 의사결정이론은 바나드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 중에는 피터 드러커를 들 수 있습니다. 드러커의 업적과 공로에 대해서는 나중에 리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바나드 사상의 일면을 드러낸 『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 의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938년에 출판된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문자 그대로 경영자의 기능을 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영자는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조직구성원의 헌신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영자의 핵심기능을 정의하고 나니까, 경영자의 권위는 경영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이 그의 권위를 마음으로부터 수용해 줘야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영자는 부하들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단순히 말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설득력과 성과급(incentives)을 적절히 활용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성과급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효과성(effectiveness)과 효율성(efficiency)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내가 바나드의 위대함을 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바나드는 조직론에서 효과성과 효율성을 최초로 구분했습니다. 조직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효과성과 효율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의 효과성이란 명시적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며, 조직의 효율성은 조직이 구성원의 동기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효율성을 단순히 투입대비 산출의 정도로 측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입니다. 경영학이 점차 공학으로 변해가면서 효율성의 개념과 정의도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아무튼 요즘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바나드는 조직구성원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하면, 즉 효율성을 높이면, 조직의 목적 또는 목표를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즉 효과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효율성을 높이면 효과성이 높아진다.” 즉,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상태를 제공하면 조직의 목적은 지속적으로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지성으로 본다면, 그런 정도가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대공황의 처참함에서 겨우 벗어나려고 하던 미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자는 넘쳐나는 데 일자리는 부족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래서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하기 어렵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시대정신의 흐름을 뒤집어 업는 놀랄만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상은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였습니다.

 

놀랍게도 바나드는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상아탑에 안주하는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AT&T에 사원으로 입사해서 자회사의 사장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공기업을 맡아 경영한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들과 교류하고 있었을 뿐, 한번도 전문적인 연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경영자 권위의 문제, 설득의 커뮤니케이션과 성과급 이슈, 효과성과 효율성의 명확한 구분 등과 같이 그가 보여준 통찰력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요즘 우리 경영학계과 실무계는 바나드의 통찰을 무시한 채 인간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거나 “목적달성을 위한 자원”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습니다. 사람은 기계도 자원도 아닙니다.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어하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면, 조직의 장기적인 효율성과 효과성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요즘, 경영자들은 바나드의 사상을 다시 한번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때입니다.(끝)

 

[참고] 이 책은 15년 전에 신한종합연구소의 기업문화팀에서 『관리자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역자들은 이 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번역까지 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을 텐데, 약간의 오역과 매끄럽지 못한 부분 등 다소간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원서를 그대로 보시면 훨씬 그 뜻을 명확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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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