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어서, 성경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뿌리 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한 시간 일한 근로자나 뙤약볕에서 10시간 일한 근로자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어떤 식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오늘날의 지성과 합리성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죠..

 

혹시 일용근로자들의 새벽 인력시장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적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일해서 일당으로 사는 분들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입니다. 남대문 근처를 비롯한 서울 전역에 여러 군데서 새벽마다 노동시장이 섭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 작업장에서 봉고차를 몰고 와서 필요한 인원수만큼 데려갑니다. 뽑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건장하고 힘 잘 쓸 수 있고 숙련된 것처럼 보이는 순서대로 뽑힙니다. 이 인력시장에서 뽑히지 못한 사람은 그날 하루는 공치는 겁니다.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일당을 벌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에도 이런 인력시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포도원 일꾼>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인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가서 필요한 만큼 데려왔는데, 오후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녁에도 나가 보았더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운이 없거나 무능해서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그날 일당을 똑같이 지불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절 참조)

 

예수가 들었던 이 비유의 맥락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술 더 떴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때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마태복음 1916~30절 참조)

 

일부 신학자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한정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세상 사람들을, 포도원은 교회를, 관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천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협의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일관된 가르침은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부의 탐욕적 추구가 악한 것이고,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뛰어난 지식과 고도의 합리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한 방에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이 인간의 뛰어난 지식인지 생각해볼까요? 대단히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는, 최근에 유행하는 이론 중에 보상(칭찬)을 통해 코끼리를 춤추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에 근거한 것인데, 보상에 따른 강화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의 보상제도가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확장하면 당근과 채찍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기업의 보상제도, 성과와 역량의 문제는 나의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인 포스팅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주 방문하셔서 읽고 함께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여느 짐승과 동일하게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을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의 거래적 존재(transactional being)으로 인식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따위 이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계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아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existential being)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인간의 뛰어난 지식 중에 형평성 이론(equity theory)이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하는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론입니다. 적어도 10배는 아니더라도 보상의 상당한 차이가 노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뛰어난 지혜입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계산적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뛰어난 지혜를 성경은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대학에서 현대적인 경영이론을 배울 때, 나는 그 이론의 정교함과 합리성, 그리고 실증가능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이론들이 현실에 잘 적용되기만 한다면, 훌륭한 경영성과와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거쳤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고 온갖 문제상황에 직면해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영이론들을 적용하면 할수록, 조직문화는 점점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을 10:1로 결정해서 지급한다면 일단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계산합니다. 보상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더 이상 일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손익을 철저히 계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될만한 것에는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조직문화가 어떻게 될까요? 이런 조직에는 공동체 정신은 사라지고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위한 계산만 남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아우를 대하듯, 사랑과 온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지름길입니다. 조금 못난 자식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듯이, 포도원에 제때 불려가지 못한 사람, 즉 사회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회에는 서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손익을 넘어선 사랑이 오히려 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하고, 그런 부의 향유가 사회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드는 선순환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북유럽의 사회모델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형평성을 따지는 계산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예수의 형상을 닮았고,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포도원 주인 같은 사람들이 꾸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스스로 그리스도(메시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Christian이란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기독교인들 스스로 자신을 작은 그리스도라고 인식한다는 것이죠. 독일어에서는 기독교인을 아예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도 그리스도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이 곧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겁니다. 놀랍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그러므로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생생한 가르침이 있을까요? 포도원 비유는 뒤늦게 포도원에 왔거나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 일꾼들에게, 그래서 생계가 막막해진 사회적 약자인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아니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예수의 명백한 가르침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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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독교 신앙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논쟁과 시비가 있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또 다시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아주 주제 넘는 일입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나 자신의 개인적 성찰에서 오는 개인적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다시 쓰는 것은 내가 앞서 쓴 글(도올 김용옥 선생의 성서해석에 대하여)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면 그뿐이고, 공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항상 유한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 선택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면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학식이 높지 않았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잘 이해했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계시해 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계시해준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질문하는 것처럼, 예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도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한 보라, 여기에 있다’, ‘보라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말 성경, 누가복음 17 20~21)

     

    그렇다면, 이제 질문이 생깁니다. 천국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관혼상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 각종 윤리체계를 만들어서 선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계율을 다 지켰던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지켰습니다. 제가 아직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청년은 이 말을 듣고 슬픔에 잠겨 돌아갔습니다.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우리말 성경, 마태복음19 20~22)

     

    이 부자 청년이 요즘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은 근심을 했습니다. 우리도 돈 때문에 염려가 많습니다. 예수는 이 부자청년과 같이 재물에 대한 인간의 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윤리적 체계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모든 율법이 소용없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계명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해야 한다.”(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5 48)

     

    인간이 온전함을 향해 나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온전함은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률은 위선만을 조장할 뿐입니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법과 원칙 속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숨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겉으로는 법을 지키면서 마음으로는 범죄하는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멋있는 옷을 입고 공공장소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교사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자꾸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22 36~40)

     

    예수는 인간의 온전함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명확히 알려 주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가진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온전함이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가르친 것은 이 땅에 천국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법률과 원칙들이 이 두 계명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법률과 원칙이 이루고자 하는 본래의 뜻은 보지 못하고, 그 텍스트의 문자만을 고집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습니다. 법률과 원칙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부패하고 황폐해진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각종 교리가 이데올로기화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랑이 없는 그 어떤 행위도 위선입니다. (교리들이 어떻게 이데올로기화되었는지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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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한국교회에 벼락같이 떨어진 축복(1)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의 마케팅 전략은 기업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업들이 교회의 마케팅 실력을 보고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교회들은 교인을 고객으로 생각해서 철저한 고객만족경영을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불안이 아닌 위안, 회개가 아닌 축복, 희생이 아닌 성공, 절제가 아닌 풍요를 원합니다. 그들의 니즈를 정기적으로 조사하여 그에 부합하는 프로젝트와 이벤트를 기획합니다. 목사는 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설교를 하면, 교인들의 수는 늘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다음과 같은 교회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의 윌로우크릭 교회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


           
     

    이런 교회들을 한국교회는 금과옥조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회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교회끼리 서로 경쟁을 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교회가 경쟁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를 상세히 분석한 책이 바로 옥성호의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 교회에 스며들면서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포장하여 고객에 팔기 시작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간에 경쟁체제가 도입되었고, 복음을 누가 더 잘 포장하여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마케팅과 경영효율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와 경쟁한다고 할 때 반드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삼성과 LG가 경쟁하는 이유는 삼성의 주인과 LG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같은 회사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경쟁하지 않습니다. 너의 승리가 나의 승리이고 나의 승리가 너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의 주인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세워진 모든 교회는 한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교회간의 경쟁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358~359)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경쟁력을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교회를 계량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숫자로 측량하여 가치를 계산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측정하는 순간, 측정의 기준이 나타내는 가치 이외의 가치는 모두 삭제되기 때문입니다.

     

    사물이 숫자로 계량화 되면, 사물의 본래 가치를 잃어 버립니다. 내가 쓰고 있는 볼펜의 값이 100원으로 매겨지는 순간, 이 볼펜은 그냥 100원으로 계량화 된 가치 밖에는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필히 써야 할 상황에서 쓸 것이 없어서 당황해 본 적이 있나요? 그 때 볼펜의 가치는 아마도 그 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볼펜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볼펜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라면 어떨까요? 영원히 닳지 않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그 볼펜의 가치는 감히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겠지요.

     

    한국교회가 복음을 상품으로 포장하는 마케팅기술에 힘입어서 교회간의 경쟁으로 큰 성장을 이룩했다면, 그 속에서 진실한 복음의 씨앗은 어디 있는가? 교회가 세속적인 기업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교회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계량화된 숫자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계량화된 숫자에 의해 성공여부를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천 명을 먹인 후에 기적 같은 일들을 보고 따라다니던 그 많은 추종자들이 나중에는 다 떠나가고 몇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크고 장대한 것이 진리인 것처럼 현혹되기 쉽지만, 오히려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진리가 전달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조크를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로부터 재인용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던 조크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유대 사람들 말이에요. 옛날부터 메시아인지 하는 구세주를 기다리던 그 사람들한테 한 사람이 오기는 왔대요. …… 그런데 웃긴 건 그 사람이 나사렛이라는 완전 시골 동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거예요. 게다가 또 자기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자칭 구세주라는 친구가 세상을 구하는 방법인데 말이에요. …… 십자가에서 그냥 팍 죽어 버리는 방법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거예요. …… 세상에 농담도 좀 말이 되는 걸 해야 하는데 말이야. ……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당시 교육 받은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향해 가지던 반응이었습니다.(398~399)

     

    그렇다면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의 논지를 따라 그 해법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393~452)

     

    첫째,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십자가는 끔찍함, 부끄러움, 꺼리낌,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는 가장 믿기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게 되는 반프래그머티즘적인 사건입니다. 목걸이를 만들어 가슴팍에 달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사치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마케팅 상품으로 부드럽게 포장하여 설교에 삽입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가르쳐야 합니다. 심리학이나 마케팅으로 포장된 복음이 아닌 복음 자체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복음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성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묘한 말로 사람의 귀를 현혹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눈이 빔 프로젝터로 쏘아대는 화려한 장면에 취하도록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찬송으로 감정적인 정화상태를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복음의 어리석음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숨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인간이 회개하여 죄에서부터 돌아서게 만듭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하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회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웠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상대적 판단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심에 어긋나는 것은 진노의 대상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실용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혼전 동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대학가의 원룸지역에 특히 그렇다고 합니다. 교회는 절대적 거룩함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마케팅상 복음을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장 거부감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기브앤테이크의 거래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와 가르침은 이 세 가지를 지향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성공이데올로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와중에 옥성호의 저작들을 읽게 되었으니, 그의 작품들을 한국교회에 벼락같이 떨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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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요 며칠 사이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경영학,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한국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특히 대형교회들의 탈선은 심각한 정도를 넘어 스스로는 정화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인숫자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은, 마치 시장에서 고객만족을 위해 싸우는 기업경영의 현장을 보는 듯합니다. 복음은 사라지고 고객만족을 위한 경영효율화가 교회운영의 원리로 자리잡았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세속적인 성공의 법칙으로 포장하여 가르치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교회재정은 블랙박스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불법적인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권에 로비하는 것처럼 교회도 정치권력이나 정치이념과 결탁하여 정치권에 로비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겉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겉이 화려한 만큼 그 속은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더 이상 기독교로 인정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정직하게 설명한 책을 읽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옥성호가 쓴 다음과 같은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드디어 스승을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

    내가 꿈꾸는 교회

     

    저자는 탄탄한 독서력을 바탕으로 크리스천으로서의 고백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작들을 읽으면서 한동안 깊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내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입장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경험을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써 내려간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이미 맛이 간 상태라고 진단해 왔습니다. 물론 소형교회라고 해서 다 옳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형교회들의 폐해가 극심하기에 특히 대형교회를 언급했을 뿐입니다. 소형교회들도 대형교회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교인숫자와 교회재정을 늘리기 위해 기를 쓰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복음적(反福音的)인 행태는 비기독교인들에게조차 빈축을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행태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옥성호의 첫 저작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영역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복음과 비복음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점에서 옥성호의 분석은 탁월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해괴망칙한 이름 아래 심리학이 기독교를 점령해버린 현상을 지적합니다. 기독교 물리학, 기독교 생물학, 기독교 수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비극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으로 충분합니다.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각종 세속적인 학문의 권위를 빌어서 복음의 부족함을 보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과 심리학을 혼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 자신들이 공부한 심리학 이론에 맞추어 성경을 적용하려니 당연히 성경말씀을 심리학 이론에 맞추어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함정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혼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갖다 섞어 버림으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게 되는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결과 결국 진짜도 없고 가짜도 없으며 보기에 따라 아무렇게나 다 해석되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98~9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심리학에서 가르치는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나 리더십 스킬 강좌를 개설해서 심리학 이론에다 성경구절로 포장하여 워크숍과 세미나 형식으로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을 이용하여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비법을 가르칩니다. 이런 현상은 복음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세속적인 학문의 성과를 혼합하여 복음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와 같은 연설집(감히 설교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을 금과옥조로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에는 지금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자의 이런 분석은 지극히 타당하고 이런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특히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물리학이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연구하듯이 심리학이라는 세속적 학문은 철저하게 인간의 심리현상을 연구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이상행동의 치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최면치료도 이상심리의 치료를 위한 일환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작용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함으로써 독자적 학문영역으로 성립되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뇌과학의 발달로 심리작용과 뇌세포 연결망(neural wiring)의 상관관계를 연구함으로써 반사회적 행동뿐만 아니라 건강한 정신활동의 강화를 위한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들은 실제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말한 대로 심리학이 종교, 특히 이단 종교인 것처럼 언급한 것은 조금 과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기독교가 심리학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든 말든 심리학자들은, 물리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연구성과를 축적해 나갈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저자의 심리학에 대한 이해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일리가 있고 나도 공감합니다. 교회에 심리학이 스며듦으로써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변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리학 탄생의 역사적 배경까지 설명하면서 심리학이 학문일 수 없고 종교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과격하면서도 매우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심리학이 교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심리학은 마귀의 학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체계와는 아무 상관없이 환자들을 치료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물리학의 연구성과가 기독교 교리체계와 다르다고 해서 물리학이 마귀의 학문이라고 할 수 없듯이, 심리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몰지각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심리학의 치료효과를 복음으로 인식하여, 심리학을 복음으로 대체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학문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과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전에는 하나의 학문으로서만 존재하던 것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는 크게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 둘은 그 학문방법이 서로 다르게 분화하여 발전되어 왔습니다. 자연과학은 엄밀한 실증성을 요구합니다. 학문의 이런 분화가 거의 없던 시절에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들이 기독교의 교리와 충돌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실증된 자연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은 이제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과학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신비주의적 환상에 불과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각종 신비주의적 환상에 빠진 사람들의 말로는 그 환상만큼이나 참담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라 해도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정신과학의 연구결과를 기독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습니다. 근대학문으로 발전한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은 인간의 정신문제와 그 결과를 다루도록 발달해 왔기 때문에 항상 기독교 교리와 긴장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물론 자연과학도 예나 지금이나 불편한 면이 있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조금씩 확장하면서 자연과학적 연구성과를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과학(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포함하는)은 기독교 정신의 발현과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인 정신과학과 기독교 교리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에 직접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의 죄성과 회개, 구원과 영생의 교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 우주의 존재목적과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해석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작용과 행동체계가 달라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확연히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심리학은 학문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실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영성을 추구하는 일파들이 심리학을 빙자하여 영혼을 구원한다고 과장한다면, 학문의 영역을 넘어선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류를 제외한 심리학은 사회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마음의 구조를 정비해 주는 데 좋은 공헌을 하고 있고, 그것은 항상 검증 가능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영혼의 구원에 충분하기에 심리학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이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튼, 한국교회가 심리학과 교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 둘을 혼합하여 마구잡이로 세속적인 성공의 비법을 가르쳐온 데 대한 저자의 비판을 우리는 심각한 자세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옥성호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별 다섯개로도 부족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면죄부를 팔던 중세교회만큼이나 희망이 없어 보이던 한국교회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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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번역된 책을 읽다가 감동적이면, 원서를 주문해서 다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없는 감동에 빠집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묘미 때문에 항상 책을 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씨 에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의 저작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장경철 이종태 옮김, 홍성사 2001)라는 책입니다. 『사로잡힌 영혼』을 읽을 때도 감동이 있었는데, 씨 에스 루이스의 책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 탄생 후 2,000년이 지났지만 지구의 역사와 진화과정을 볼 때, 우리 시대는 기독교로서는 아직 초대교회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인류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대부분의 인류가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진화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토를 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경영자와 관리자들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함께하는 부하나 동료나 상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조직의 재무제표를 살찌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관한 책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식 기독교의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 인간과 조직에 대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만약 이 책을 읽은 분이 기독교인이라면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줄 것이고, 만약 기독교인 아니라면 기독교라는 종교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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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