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07 도올 김용옥 선생의 성서해석에 대하여 (11)
  2. 2008.10.21 역량(competence, 力量)이란 무엇인가 (4)

도마복음에 관한 칼럼을 써왔던 도올 김용옥 선생이 연재를 마치고 지난 일요일에 중앙SUNDAY와 대담을 했습니다. 연재와 대담은 매우 재미있었고, 유익했습니다. 나는 성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그의 관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도올 선생은 그동안 기독교에 관한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 전통적인 기독교인이나 학자들에게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해 왔습니다. 나는 이 논쟁에 가담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믿음(신앙)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에게도 그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 글을 썼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나의 밖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내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2,000년 전에 예수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리스도(Christ)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그분의 모범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됩니다. 영미권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은 그리스도로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자신을 직접 “Christ”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基督)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초월적 힘이 자신을 끌어당겨서 뭔가를 해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 있는 신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고, 신은 신이라는 분리된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내가 잘 살고 구원받는 길은 내 밖에 있는 신에게 잘 보이면 된다는 탐욕적인 생각이 문제입니다.

 

도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마복음은 기독교가 해체돼 예수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기독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예수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중앙SUNDAY 108, 2009.4.5일자 13)

 

예수가 기독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겠죠. 그냥 동아리 모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에 대해 논의할 건더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음의 체계가 아니니까요. 그냥 역사학이나 사회학이 되고 맙니다.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종교가 아닌 엄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은 특정한 믿음체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믿음에 근거하여 학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리스도적 사건이 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세속적인 학문의 결과와 아무 상관없이 매 순간 이 구원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잘 이해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 과부와 고아들, 나그네들, 누구나 천시하고 멀리하던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돌보았습니다. 이 멈출 수 없는 거룩한 힘은, 당시로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강대한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부와 권력이 주는 맛을 본 후부터 기독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부와 권력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 힘을 과시합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육신이 부활하느냐 영혼이 부활하느냐를 가지고 네편 내편을 가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지고 파벌을 만듭니다. 심지어 성만찬을 화체설(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로 봐야 하느냐 아니냐로 갈라집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새발의 피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살육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기독교인들이 내 안에 있던 신을 밖으로 빼버린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내 밖에 있는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신을 빼앗아 오려니까 갈등과 전쟁은 자연스런 현상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분오열은 신을 자신의 밖으로 빼버렸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는, 편가르기
를 했던 모든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25장 45절)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배고플 때, 밥 한그릇 주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비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극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도올 선생의 말은, 인간의 탐욕을 허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더 큰 분열과 전쟁으로 나가게 할 뿐입니다. 예수는 탐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적 삶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논쟁의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쓸데없이 서로 힘을 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잡다한 교리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얄팍한 이성이나 조잡한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학문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어떤 예술적 표현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실천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적 사역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는 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내가 곧 작은 그리스도(I’m a Christian!)”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독일어권에서처럼 내가 곧 그리스도(Ich bin Christ!)”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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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역량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역량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부패와 부조리가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량개념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역량을 단순히 바람직한 행동패턴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상업화된 역량개념(commercialized competency concept)이라고 부릅니다. 역량개념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 없이 컨설턴트를 자처하는 몇몇 상인들이 기존의 지식에다 컴피턴시라는 그럴 듯한 포장지를 입혀서 정보가 거의 없는 고객들에게 마구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객들은 뭐가뭔지 구별해낼 재간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적당히 넘어가고 맙니다. 내가 아는 한,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량과 관련된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효과가 없는 처방약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이라는 약이 계속 팔리는 이유는 고객들이 역량이라는 약을 먹지 않으면 혹시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고, 치열한 인재전쟁 시대에 인사담당자들이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역량이라는 게 있다니까 새로운 처방처럼 보여서 깊은 공부도 없이 덥썩덥썩 받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개발된 개념들이 우리나라에 수입될 때, 약간 비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개념이 생성된 문화적 배경 내지 컨텍스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그것으로 당장 효과를 보려는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적나라한 예가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서구적인 입장에서의 기독교 신앙과 한국적 기독교 신앙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한반도의 토착신앙인 샤마니즘에 영향을 받아 비틀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이 기복적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서양의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예배하는 마음은 철저히 기복적입니다. 보이는 것을 흉내냄으로써 즉각적인 효험을 보려고 할 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그 근본을 배우려는 인내심과 고통은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역량의 개념이 비틀리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역량의 개념들은 기독교 예배형식과 마찬가지로 역량개념, 역량모델, 역량평가, 역량관리 등과 같은 용어의 형식만 비슷할 뿐, 실제로 그 내용은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역량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역량은 행동(behavior) 또는 행위(action)와는 어떻게 다른가? 기존에 쓰던 용어인 능력(ability)이나 지능(I.Q)와는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런 의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역량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그래서 우선 역량이란 용어인 원어인 competency 또는 competence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컴피트한다(compete)"는 동사는 서로 경쟁한다는 것이고, "컴피턴트하다(competent)"는 형용사는 어떤 상황에 적합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경쟁하여 어떤 상황에 누가 더 적합한지를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행동이나 능력이라는 말에는 서로 경쟁하여 어느 하나가 가장 잘 부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지만, 역량이란 용어는 특정한 직무 또는 직위에 부합하려는 특성(characteristics)과 관련된 개념이다. 

따라서 역량은 행동이 아니며 행동패턴은 더더욱 아닙니다. 역량이 어떤 행동이나 행동패턴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같은 역량요소라 하더라도 특정한 행동이나 행동패턴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일관성을 갖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리더십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이 동일한 행동이나 행동패턴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명백합니다. 링컨, 간디, 알렉산더, 징기스칸, 이순신은 리더십 역량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행동과 행동패턴은 일관성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달랐습니다. 행동이나 행동패턴이 같다고 해서 같은 역량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량을 개발하고자 할 때 바람직한 행동패턴을 훈련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또한 역량은 단순히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능력이라는 용어만큼 그 활용범위가 넓은 것이 없습니다. 능력은 그야말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의 총칭을 말합니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로는 특정한 직무에 부합하는 속성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역량, 컴피턴시(competency)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역량이란 무엇인지 설명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역량이란 한마디로 "우수한 성과를 창출하게 하는 내적 속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정의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첫째, 역량은 우수한 성과와 관련되어야 합니다.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의 평균적인 성과보다 차별적으로 더 높은 성과를 창출해야 합니다.

둘째, 어떤 사람이 평범한 성과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내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역량은 그 우수한 성과를 창출하게 하는 원인을 가리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역량은 외부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성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역량개념을 현실에서 잘 활용하려면, 인간의 행동이 유발되는 인지적 과정(cognitive process)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개념적 틀(conceptual framework)과 과학적 근거(scientific evidence)가 필요합니다.

과학적 근거는 특히 영미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증적 분석에 근거한 수많은 주장들이 영미학계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스펜서의 연구결과가 그 대표적인 저작입니다(Lyle M. Spencer/Signe M. Spencer, Competence at Work, John Wiley 1993). 나는 항상 실증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념적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증분석이 지지해 주면 더욱 좋겠지만, 실증분석이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다고 볼 수도 없는 현상은 우리 인간사에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개념적 틀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개념적 틀도 없이 아무렇게나 역량모델을 만들고 역량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개념적 틀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이 유발되는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사고력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을 통해서 역량의 배치구조를 이해하여 역량개발을 위해 더욱 노력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역량요소의 배치구조가 곧 역량모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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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