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인들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무지합니다.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 남이 만든 것을 단순히 퍼 나르지 않는다는 나의 블로깅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알려주기에 여기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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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노무현을 떠나 보내며,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장례식 그 자체가 우리를 매우 감동케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에 참여하여 눈물을 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잘못 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부자에게 돌아가는 잘못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공동체적 정신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상이 인간의 정신을 매우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발 금융위기와 맞물려 진보적 이념이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보수의 이념은 가진 자들과 그들에게 봉사하려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졌다는 의미는 돈, 권력, 지식 등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들을 많이 가졌음을 말합니다. 돈은 자본가들에게, 권력은 정치인들에게, 지식은 학자들에게 많습니다. 또한 이들을 돕거나 동조함으로써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덩달아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뭔가 가진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냉전시대에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냉전 당시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냉전이 마무리되면서 보수주의자들이 쇠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경제적 변화를 꾀하고자 할 때는 진보적 인물들이 득세하다가, 김정일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면 보수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이처럼 보수란 뭔가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방어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경제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권 여당과 정부고위관료들, 국가권력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정기관의 고위층, 지식을 가지고 있는 대학교수들은 대개 보수적입니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진보적이었다가, 어른이 되면 대개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뀝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가족을 부양하게 되면, 행동의 변화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입장으로 기울게 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보수와는 달리 진보의 이념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지식이 없는 자, 즉 갖지 못한 자들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권력,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보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타고난 성향도 있을 수 있어서 가난한 사람도 보수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고, 부자도 진보적일 수 있습니다.

 

사회구성이나 인구비례로 따지면, 진보하기를 바라는, 갖지 못한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할만한 정보와 역량이 부족하여 보수주의자들의 정책적 선동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주의자인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선동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둘째, 진보주의자들은 손익보다는 선악의 문제를 중시하는 성향이 있어서,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그름을 강조하다 보니, 서로서로 협동하기보다는 분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진보주의자들은 지금도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서로 통합적인 협동이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세계 어디서나 정치적 활동에서 보수주의자들보다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세상을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설명해버렸습니다. 이런 단순이분법이야말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사고와 행동패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분류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유와 행동의 뿌리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사람마다, 사안마다, 시대마다 필요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를 획일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파병과 한미FTA를 반대하면 진보, 찬성하면 보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원인과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파병에는 극구 반대하지만 한미FTA에는 찬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에는 반대했지만, 올해는 반대하지는 않는 태도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가 두부모 잘리듯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를 판단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에 내린 의사결정과 행동패턴을 파악해 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 이것보다 더 정확한 방법은 없습니다. 과거의 의사결정과 행동패턴은 미래의 유사한 상황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황석영 같은 사람들이 가끔 나오기 때문에, 가능성이라는 확률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세상사 늘 그렇듯이, 통계학적으로 볼 때 이상한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노무현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노무현이 추구했던 정치적 이상(理想), 그리고 그가 바라던 사회적 가치(價値)는 분명 진보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재임시절에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혜택이 늘어나긴 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만족스럽진 못했습니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정치적 이상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파병과 한미FTA를 보면서, 진보주의자들은 노무현에게 등을 돌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이 분열한 것입니다. 힘을 잃었고, 선거에서 패배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아 봉급쟁이들의 신화였던 이명박을 내세워 온갖 선전 선동을 했습니다. 나라를 부자로 만들 것이라는 선전과 선동 말입니다. 이명박의 과거 의사결정과 행동패턴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이념의 소유자인지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선전과 선동에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무현의 정신과 영혼은 그렇게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표차로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주의자들은 힘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권력,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가난한 자들의 몫을 부자들에게 돌려줌으로써 부자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쇠고기 광우병 파동, 촛불시위, 용산참사 등을 겪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습니다. 안타깝게도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노무현 장례식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회한이었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당신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의 의미를 대다수 국민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대통령의 지위를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가급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권력을 지키려고 보수적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민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언론과도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듯한 그의 직설적 어법은, 가진 것이 없는 서민들에게는 진실하게 들렸지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심장을 비수로 꽂는 아픔이었을 겁니다.

 

당연히 보수적 입장을 취할 위치에 있는 대통령이 오히려 진보적인 입장과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로부터는 엄청난 비난과 무시를 당했습니다. 대통령이 오히려 핍박을 당했다고 말해야 옳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기보다는 서민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할 줄 아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자신의 선한 의지를 굽히려 하지 않았지만, 평범한 말투와 인간적인 약점투성이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서민들의 영혼을 움직였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추모인파는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것입니다.

 

눈물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제 눈물을 닦고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똥 냄새를 덮거나 중화시켜보려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똥 냄새의 진원지가 어딘지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힘이나 권력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 때문에 망한다는 진리가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둘째, 선거에 출마한 사람은 과거에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막연한 선전 선동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행동패턴은 재현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진보주의적인 사람들은 옳고 그름만 따지지 말고, 큰 방향이 옳으면 서로 협력하는 자세가 절실하다는 점입니다. 적전 분열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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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비전/목적/방향이 없다는 점이고, 둘째 늘 바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쁜 이유는 비전/목적/방향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서인데, 오늘은 두 번째 특징인 항상 바쁘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전/목적/방향이 없는 사람은 매사를 전략으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이란 여러 프로젝트의 조합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실행합니다. 가능하다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프로젝트 중에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을 예로 들면, 대운하, 영어몰입교육, 특목고 확대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 말고도 여러 잡다한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 바쁩니다. 현장을 챙겨야 하고, 매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가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그 현장이라는 실체도 애매합니다. 정치에서 현장이란 국민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데나 현장이라는 데를 가서 눈에 띄는 대로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공단에 가면 전봇대를 빼야 한다, 아니다 옮겨야 한다는 둥, 기업에 가면 자전거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 아니다 자전거 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둥. 증권거래소에 가면 주가가 얼마까지 가야 한다는 둥, 심지어 회사이름까지 바꾸는 게 좋겠다 등의 지시와 명령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내가 보기에는 김정일의 현장지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수행원들 쭉 데리고 가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지시하고, 일부 충성파는 수첩 꺼내서 받아 적고, 폼 나는 장면은 사진 찍고, … 그리고 난 다음 사무관이 하기에도 쪼잔한 것들 몇 가지 지시합니다. 이런 얘기를 홍보담당자와 공보관은 열심히 받아 적어서 보도자료를 뿌립니다.

 

그래서 비전/목적/방향이 불분명한 사람은 늘 바쁩니다. 열심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무를 할 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업에서도 높은 자리에서는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이런 것을 요즘 말로 하면, “개념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개열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바쁜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
이런 김정일식 현장지도가 내가 알기로는 박정희 군사정권시대의 브리핑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공무원들이 이런 방식에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런데, 현장지도식 브리핑문화의 가장 큰 병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업무를 거의 포기하고 그 일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이 일을 해보니까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지만, 높으신 분들이 방문해서 얻는 효과라고는 사진 찍는 것 외에는 별로 없습니다. 국가운영은 한 두 사람이 명령하고 지시해서 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직자들이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운영시스템을 설계하여 잘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정부시절에는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면서 비전을 잃었습니다. 요즘이 그 때와 거의 유사한 형국입니다. YS집권 후반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비전결핍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커버하려고 했습니다. 일하면 일할수록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수록 밤샘 근무까지 하느라 그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국가부도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온 국민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방향을 잃고 빙산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데, 선장은 갑판 위를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가지런히 놓으라고 지시하고, 나사 빠진 것을 챙겨서 잘 꽂으라고 명령한다고 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배에 탔다면 선장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정신차리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방향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제정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갑판 위에서 떠들고 지시하던 것을 다 집어치우세요! 그리고 배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학생과 고객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비전/목적/방향의 설정이 더 우선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비전/목적/방향을 먼저 세우고 공유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숫자 같은 것은 절대로 (절대로!) 제시하지 말라고 얘기해 둡니다. 숫자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비전/목적/방향이 불분명한 채 열심히 일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부산인지 평양인지 모르면서 어디론가 열심히 뛰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유럽과 같은 복지화 사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남미와 같은 양극화 사회로 갈 것인가? 몇년 전에 남미에서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전근 온 독일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서울사무소로 발령이 나서,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달 간의 서울생활을 한마디로 이렇게 치안이 확실하게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남미의 도시들에서는, 해가 떨어지면 거리에 나다닐 수가 없답니다. 부자들은 저택에서 사설경비원을 고용해서 살고, 국민들의 상당수가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거의 노숙자 수준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고, 강력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때로는 경찰력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남미를 가본 적이 없어서 그저 상상을 할 뿐입니다. 남미는 70년대만해도 세계10대 부국에 드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20년 후에는 미국을 넘보는 초일류 부국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남미로 이민을 많이 갔습니다. 일본사람들도 꽤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남미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 2007)을 보세요. 장 교수는 우리사회가 왜 복지화 사회로 가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한, 남미와 같은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로마 병사들이나 빌라도 총독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그 결과가 용서될 수 있을까요? 역사의식의 결여는 용서될 수 있을까요? 물론 성경의 예수처럼 우리는 그들이 무지했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할까요? 이명박 정부의 고위층은 정말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무지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현상분석과 대안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들은 비교검토했고, 철저히 손익을 따져보았습니다. 역사의식의 결여와 그로 인한 비전/목적/방향의 결핍을 은폐하기 위해 여러가지 잡다한 프로젝트를 하느라 바쁩니다. 그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면밀히 따져보고 그 전체적인 기조를 보면, 결국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몫을 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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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골고다 언덕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자신을 죽인 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예수가 죄수 두 명과 함께 처형되는 현장에 있던 로마 병사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가 없었던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죽은 자를 살렸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은 위선을 조장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세계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 병사들은 예수가 죄 없다는 그 명백한 사실을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요? 병사들이야 무식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를 심문했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맡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역사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식인 계급에 속했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예수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유대사회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의 비범성을 알아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을 깨지 못했습니다. 유대땅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롯왕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거침없는 가르침과 진실폭로에 겁을 먹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의 역사의식의 결여. 이것이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역사의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성찰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역사적 존재로서 자각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의 결핍은 사회적으로 많은 위험과 위기를 초래합니다. 최근에 겪은 대표적인 사례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시는 세계사적 역사의식의 결여로, 박정희는 민족사적 역사의식의 궁핍 때문에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부시나 유신시대의 박정희와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비전/목적/방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비전/목적/방향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 또는 사회가 그것을 원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을 힘으로 밀어 부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다른 부분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내 분야에서만 본다면 경영학은, 20세기 초반, 숫자로 쥐어짜던 제1세대 경영학(Taylorism)에서, 20세기 후반,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던 제2세대 경영학(Druckerism)을 지나왔습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제3세대 경영학(Wholism)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직과 조직구성원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구성원 개개인은 구분되는 독립체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조직에 소속되면 그 조직의 전체가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개체가 전체요 전체가 곧 개체인 상태입니다. 개개인이 조직의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낱개로 찢어진 존재가 아니라 낱개의 특성을 보존한 채 따뜻하게 연결된/뭉쳐진 공동체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때, 비로소 높은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국식 경영학의 폐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현정부의 경영방식은 제1세대 경영학에 속하는 계량화에 의한 명령과 통제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실용적 기술을 활용해야 하는지도 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하지만, 현정부에서는 이런 고민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속도전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온갖 과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역사의식의 결여를 힘의 실용적 활용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요? 힘의 활용과정에서 겪는 무수한 고통과 희생을 우리는 그저 감수하고 있어야 할까요?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힘으로 밀어 부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가 가르쳤던 것처럼, 힘을 쓰는 사람은 결국 힘으로 망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이런 의문들은 흥분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촛불을 든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촛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효과가 있긴 하지요.) 온 국민의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합니다. 사색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간의 훈련을 해야만 사색이 가능합니다. 역사의식은 사색을 통해 싹틉니다. 사색의 훈련이 없이 오로지 손익만 계산해 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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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죄수 두 명과 함께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장면이 성경에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로마 병사 둘이서 예수가 걸쳤던 옷을 제비뽑기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가 죽었는지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보았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곤란을 겪은 가장 힘든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모르고 범한 죄는 용서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르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왜 예수는 자기를 죽인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했을까?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예수의 뜻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정말 그렇게 살아가는가?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 누가의 기록(누가복음 2334)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을 갖게 되고, 그 다음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람 지나가는 것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신기해 합니다. 매일 보던 풀 한 포기가 새롭게 보입니다. 이마에 스치는 바람결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 없어집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부활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관심사는 인간의 정신이 역사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하이데거에게로 이어졌고, 노동의 문제는 마르크스(Karl Marx)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나는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매 순간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현재화함으로써 매 순간의 삶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아름다운 영혼의 변증법이 주는 교훈이 있다. “아름다운 영혼은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자로 내몬 가혹한 세상의 조건들, 즉 자신의 선한 의도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비탄해 하지 않는다. …… 나는 져야 하되 호된 시련에 부딪쳐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적을 고발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240~241)

     

    그렇습니다. 노무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패배시키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스스로 패배하는 길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활용했던 최후의 수단도 자기 자신을 패배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방식으로 궁극적 승리를 쟁취한 수많은 인물들을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도 그랬습니다. 임금의 칼에 죽느니 적장의 칼에 죽겠다던 이순신이 그랬고, 무장해제한 채 영국군에 맞섰던 간디도 그랬습니다. 비열하고도 폭압적인 권력 앞에 구차한 변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삶은 인류의 정신 속에 부활했습니다. 노무현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그렇게 부활할 것입니다.

     

     

    p.s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개명한 세상에 이토록 비열하고도 폭압적인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런 권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책을 온전히 읽을 수도, 글을 제대로 쓸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잡을 수 없군요. 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서럽지 않았는데, …… 오늘은 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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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노무현은 순진했습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던 어린아이처럼. 대학물도 먹어보지 못한 그는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가진 사람이 헐벗은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이 말한 대로 실천해 보려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은 그리 큰 힘이 없지만, 그것을 실제 정책으로 입법화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가 추진했던 대부분의 정책들은 그렇게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용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소위 가진 사람들은 그의 파격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갖 이론을 갖다 대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이득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노무현의 말투에서부터 건들거리는 걸음걸이까지 시비를 걸었습니다. 권좌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사돈의 팔촌까지 일망타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법의 부재가 금지를 보편화한다

     

    그가 권좌에서 내려오자, “법의 부재가 금지를 보편화한다는 라깡의 역설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경을 건드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잡아갑니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말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라깡의 후예인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은 문명비평가답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불필요한 위선과 가식으로부터 벗어날 것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난 후, 그러니까 너무 늦어버렸을 때 우리는 불현듯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의 짓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 즉 우리가 속한 공동체 자체가 붕괴된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 이런 이유로 그 소년의 행위에 대한 통상적인 칭찬을 포기하고, (기존의 상호 주관적 네크워크가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불쑥 말해버림으로써 결국 자기도 모르게 파국을 초래하고 만다) 순진한 수다쟁이의 전형으로 인식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159)

     

    노무현의 순수함과 순진함

     

    그래서 그는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암묵적인 관행을 깨고 진실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자신이 말한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가 없습니다. 지젝의 말처럼 노무현을,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파국을 초래케 한, 순진한 수다쟁이의 전형으로 인식해야 할 시간이 도래한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노무현의 부활을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임금님과 사기꾼들, 그리고 순진한 어린이

    우리가 지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온 백성이 임금님처럼 사기꾼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순진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젊은이를 길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기성세대는 그런 젊은이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빛나는 동화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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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과 손익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은 의사결정의 기준이 손익보다는 옳고 그름에 있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부류입니다. 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합니다. 옳다고 믿기 때문에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믿는 진리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죄책감이 중요한 행동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손익지향적인 사람은 행동의 동기가 선악보다는 손익에 있습니다. 그것도 이기적인 손익에 의사결정이 좌우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공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인 손익이 우선입니다. 이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먹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상도(商道)를 지키는 존경 받을만한 상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일본이나 유럽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우리사회가 선악중심의 사회에서 손익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상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독일유학시절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바가지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불한 가격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불을 켜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상거래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선악이 손익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기업인들과 지도자들에게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 중에서 가장 수치심과 죄책감을 많이 가지고 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지향적인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옥양목에 풀 먹인 듯 뻣뻣했던 대통령이라는 권위주의의 상징을 유럽의 정치인들만큼이나 부들부들하게 풀끼를 빼버렸습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손익중심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뻔뻔한 인물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손해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묵묵히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손익중심의 인물들이 그 동안 저지른 추악한 비리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명예가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의문입니다.

     

    그래서, 『국화와 칼』을 떠올렸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에게 연구를 부탁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지 꽤 됐지만, 일본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이 일본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그렇게도 잘 짚어낼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인들을 잘 모릅니다. 하긴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판에 바다 건너 섬사람들의 특성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겠지요.

     

    그녀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소가 수치심(shame)이라고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을 크나큰 불명예로 생각합니다. 모욕하는 것도 모욕당하는 것도 매우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일본말에는 상대방을 비하하는 욕설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수치심을 건드리는 일은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모욕을 받은 경우, 상대에게 반드시 복수를 감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법률체계가 완비되면서 상대에 대한 물리적인 복수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 즉 자살을 시도하곤 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래서 불명예스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는 할복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서양에는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 따라 수치심보다는 죄책감(guilty)이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사회적 행동이 좌우됩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옳고 그름, 즉 선악시비의 마음을 말하며, 이것이 행동을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중세에는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성경에 대한 해석권한을 독점했던 교회의 가르침에 의지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선악을 판별하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유대기독교의 기본사상이었습니다.

     

    양심의 빛은 희미해지고, 선악은 손익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대적인 이성 중심의 계약사회에서는 양심의 소리보다는 법률에 저촉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약, 법률, 합리성 등과 같은 근대적 이상(理想)은 인간에게서 죄책감이 점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계약과 법률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정한 것이고, 그것조차도 힘있는 자들의 농간으로 만신창이가 되곤 합니다. 계약과 법률이 주로 가진 자의 자기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현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도적으로 양심의 빛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법률이 복잡해질수록 인간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지고 죄책감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사상이 전지구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부터 옳고 그름에 대한 양심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경제문제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익이 되면 옳은 것이고 손해가 나면 틀린 것이 됩니다. 이익과 손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손익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손익은 영원하고 선악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익이란 사회적 손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손익은 공익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악의 판단에 포함됩니다.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사회적 이익을 선악의 문제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이익이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굶주린 자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장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성향과 상관없이 오늘날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사회를 비교해 보았을 때, 미국에는 손익지향적인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유럽사회에는 아직도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북구의 여러 나라들은 유대기독교적 사상에 근거한 죄책감이 지도층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적인 사회규범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가요?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현지도층의 행태에서 늘 보듯이,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손해를 보는 것은 악이고, 이익이 곧 선이라는 등식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정책적 의사결정을 보면, 사회적인 손익이라는 빌미를 끌어다 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계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일을 하고자 했던 노무현은, 기업인들에게 돈이나 갈취하고 부정부패에 찌든 인간으로 비춰진, 저 모욕적이고도 불명예스런 사건들에 직면했을 때,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 오늘은 정말 슬픈 날입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그는 분명 손익을 따지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덕인 법률조차 어기면서까지 오로지 손익만 따지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슬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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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