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여러 차례, BSC가 전략실행을 위한 강력한 관리수단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종의 management tool입니다. 강력한 관리수단을 필요로 하는 경영자들에게 어필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BSC를 채용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캐플란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 박사는 인사문제의 전문가들이 아니고 회계학과 기업전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기업의 전사적 성과나 역량에 관한 관리수단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변의 인사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협력하여 BSC개념들을 확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기업의 성과와 전략을, 그리고 조직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양사상의 뿌리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세계에 대한 관리주체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맺음(connectedness)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사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관리의 개념은 유대기독교 사상, 즉 구약성경 창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도록 최초의 인간에게 위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질서한 세계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서로 조화롭게(다른 말로 하면 질서 있게) 잘 자라고 유지되도록 돌봐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서구인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은 동양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불교와 유교에 영향을 받은 동양인에게 세계란 서로 관계를 맺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주체(subject)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서구인들에게 세계란 다스려야 할 대상(object)이었습니다. 모르는 세계가 있다면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대상과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아 다스렸지만, 일상적인 관리의 대상과 방법은 계명과 율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상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정했습니다. 심지어 피해액을 정확히 계산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는 것까지 정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정신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런 계명과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힘의 외교를 하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으로 타인과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계명과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존의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복음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선악을 문제 삼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포도원 일꾼의 비유>, <달란트 비유> 등과 같은 주옥 같은 비유를 통해 사랑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겉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면서, 속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에 대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관리의 대상과 방법을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사회의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바람에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관리의 대상은 타인이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했고, 관리의 방법은 법규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가르침이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간단했지만,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법은 위선을 조장할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겉으로는 법을 지키면서 내면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BSC는 성과관리 또는 전략실행의 수단으로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규정합니다. 하지만, 법이 위선을 조장하는 것처럼, 이런 규정은 주인의식의 결핍을 면책시켜 줄 뿐입니다. 조직원들은 평가에 유리한 것들을 성과지표로 설정하거나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목표수준으로 정합니다. 주인의식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표와 목표를 정하고, BSC의 매뉴얼에 맞춥니다. 여기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영자나 혁신담당자들은 경영목표(숫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줍니다. 이것을 톱다운 캐스케이딩(top down cascad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직원들은 위에서 내려준 숫자에 맞춰서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창의성과 주인의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조직 내에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됩니다. 경영자들은 로봇 같은 조직원들을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보상과 처벌에 의한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을 강구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과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에 대한 보상의 차이와 처벌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류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영향은 아직까지 경영학의 여러 분과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보상에 의한 인간의 행동수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논의는 <돈은 인간의 정신을 왜곡한다>에서 간단히 포스팅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의 충격적인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을 BSC와 같은 규정화된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고 관리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도록 창조(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오직 서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과부, 고아,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인간을 품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사상이 지난 2000년 동안 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기독교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유일신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유일신 개념은 다른 세계관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이런 배타성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정복하는 과정은 유대기독교 근본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지만, 유대기독교 사상은 이런 착취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 확립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가 줄어들었지만, 음성적으로는 여전히 착취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기득권자의 약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여 <테일러리즘>에서 <MbO>를 거쳐 <BSC>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기득권층의 질서유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사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경제적 부가 곧 신의 축복으로 인식되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개신교 윤리의 세속화>라는 제목으로 이미 포스팅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기득권층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노동통제의 내용과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린이 노동금지, 근로시간의 제한, 노동조합의 결성 등과 같은 근로조건이 현격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관리의 수단이 점차 정교해졌고 모든 것을 측정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BSC가 개발되었고 많은 경영자들에게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직에 적용했을 때, 조직원들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됩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지 매우 의아해합니다. 기업이익을 위해 인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관리이데올로기(management ideology)와 인간정신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녀를 길러보신 부모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부모들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아이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의 뜻대로 관리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장성한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녀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관리의 대상으로 자란 자녀들은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이 억압되어 후일 장성해서도 자신의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기대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육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조직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BSC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이제 결론 삼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물론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관리대상자에게 노예의식을 심어줍니다. 타인을 관리하려는 관리자는 타인을 자신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예속된 인간에게는 자발성과 창조성 같은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원을 강력하게 관리하는 수단인 BSC는 오히려 조직을 점차 병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l  맥도날드는 맛을 계량화해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l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경영진의 입장에서 계량적 지표가 필요한 게 현실 아닌가?

l  사물을 측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l  그렇다면 경영자의 입장에서 관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의 계량화와 측정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약한 매운 맛을 가미한 비빔밥을 참 좋아합니다. 비빔밥에도 약한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을 넣어 비비면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청양고추장 같은 강도가 높은 고추장을 넣는 경우에는 비빔밥을 실패합니다. 딸꾹질이 날 정도로 강한 매운 맛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운맛을 정확히 측정하고 등급화하여 번호를 매겨서 어느 식당에 가도 동일한 맛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매운맛도 철저히 측정하고 관리했으면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측정과 관리의 합리화를 거쳐야 합니다. 경영진은 이런 계량화된 지표를 활용하여 경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갑순은 75점짜리 인생이고, 홍길동은 80점짜리 인간이라고 점수를 매기거나 등급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정신이 삽시간에 상품화되겠지요. 이런 짓은 인간의 영혼에 심대한 상처를 입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내가 영국 리더풀을 여행하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노예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었다는 역사를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노동시장이라고 이름 붙인 노예시장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진척되면,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꿈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상품화하려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사물에 대한 측정과 계량화 노력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에 있어서 사물과 인간 사이에 뚫을 수 없는 방어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을 관리하려는 의도와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상사는 부하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하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상사는 이미 리더십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리더십의 결여는 관리를 부릅니다. BSC같이 부하를 강력하게 쫄 수 있는 관리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리더십이 아닌 관리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리더십에 대해서는 이미 몇 꼭지를 쓰긴 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리더십과 관련된 주요 포스트

  • 2008/12/05 욕망하는 인간
  • 2008/10/27 비전(vision)수립
  • 2008/10/21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 2008/10/21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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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신뢰와 평안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상업화와 경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적 유대감(solidarity)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겁나는 화두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서로 도와주는 것은 그들의 자활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가난은 자조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가 도와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정말 맞을까요?

     

    이런 발상은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복지수준이 높은 북구의 여러 나라,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 이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은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 국가들은 건재합니다. 이들 국가는 국민의 세금부담율이 평균 70%를 넘습니다. 소득의 70%를 세금과 보험료의 명목으로 정부가 거두어 간다는 말입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자가 볼 때, 전체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수탈한다고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갹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의 완벽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합니다. 이러한 국가운영시스템과 정부에 대해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앞서 얘기한 공정성과 투명성에서 나옵니다.

     

    국가운영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하다면, 신뢰가 생기고 공동체 운영에 대해 안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악을 쓰거나 속임수를 쓰면서까지 영악스럽게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사회안전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배려하게 됩니다. 만약 두터운 사회안전망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번 실패하면 쪽박을 차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하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긴장하면 자신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재기할 기회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사회안전망은 설사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쿠션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합니다.

     

    덴마크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높은 경쟁력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유럽은 세금 많이 내기로 유명한 지역. 높은 세금은 일하려는 인센티브를 감소시키므로 노동 공급을 줄이고 성장에도 부정적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북유럽의 노동 시간은 짧다. 그런데 왜 이들 나라의 경쟁력과 생산성은 높을까?

     

    코롬자이 전 국장은 높은 세금에 기반한 탄탄한 사회안전망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사회안전망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으므로, 구성원들이 유연한 노동시장 같은 개혁을 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덴마크는 사회안전망이 물 흐르듯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어낸 환상적 사례라며 미국의 자동차 노조와는 확연하게 대비된다고 평했다."

    (발 코롬자이 OECD 국가연구국장와의 대담, 조선일보 2009.6.13일자 C2)

     

    이런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은 의심할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의 표면에는 성공한 사람이 보상받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를 하며, 또한 수많은 좌절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성공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될만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을 위해 다수의 시민들이 고통 받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조치된 근로자들과 택배운송노조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시위하는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일부 좌빨 극렬분자들의 선동으로 보아선 안 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습니다.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잘라내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폭력성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북구모델은 꿈 같은 이야기일 뿐 우리나라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퍼주기식 복지를 실현하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들이 생겨나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얼핏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놀고 먹는 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맨날 놀고만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나카타니 이와오(
    中谷巖) 교수의 견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기업이 언제나 간단한 잉여인원을 해고할 수 있다.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고되어도 실업보험이 넉넉히 지급되므로 생활의 불안이 없다.

     

    이와 동시에 덴마크에서는 임금은 철저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한, 같은 회사에서 몇 년씩 근무한다고 해도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기술 승급인데, 실업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전국적으로 훌륭한 직업훈련소가 정비되어 있어서, 해고되면 무료로 즉시 직업훈련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끔 해고되는 것이 오히려 기능훈련을 할 수 있어 미래가 열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이점은 노동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크로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동성이 확보된다는 이점도 있다. 이것은 기업에게도 대단히 고마운 것이다. 왜냐하면, 과잉고용으로 골치를 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인원이 과잉되면 즉시 해고하면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노동비용은 당시의 경제정세에 맞추어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비용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국가 수준에서 보아도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산업구조의 전환이 용이해진다. 경쟁력이 없어진 산업에서 고용조정이 실시되면 해고된 노동자는 직업훈련학교에서 장래에 유망한 산업에 적합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기업은 새로운 산업을 시작해도 기술을 가진 노동자를 즉시 조달할 수 있으므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원활해진다.”

    (나타카니 이와오(中谷巖),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351~352)

     

    우리도 이런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이 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적 연대(solidarity)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잘 알다시피,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들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에는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장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국가를 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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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할 수 있다면, 시장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최적의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믿음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만약, 시장이 이러한 자기조절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파국으로 나가기 전에 스스로 균형상태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번번히 파국을 맞았고, 인위적인 조정을 가해야 다시 살아나곤 했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이 가져온 파국의 절정은 1929년의 대공황입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의 결말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엽까지 거의 무제한적 자유방임을 추구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팽창한 것처럼 보였지만 엄청난 버블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대공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았습니다. 이런 경제적 공황상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적 신념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경제학적으로 알려준 사람이 바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였습니다. 정부가 적절한 수준의 개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잡도록 인위적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대공황은 유효수요의 부족이 원인이므로,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돈을 풀어서 수요를 진작하여 생산자의 공급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부의 대규모 개입이 시장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혁명적 처방이었는데, 시장을 맘대로 주무르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케인즈의 처방은 옳았고, 시장경제의 패러다임은 개입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종전 후에도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여 자유주의적 방임에 따른 극심한 빈부격차를 축소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시행해 나갔습니다. 부유층의 부당한 탐욕을 제어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중산층이 매우 두터워졌고, 30여 년간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명실상부하는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했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미국은 국제무대에서도 지나친 개입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후, 미국의 진보적 개입주의는 서서히 힘을 잃었습니다. 시장에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자유주의를 대공황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보수적인 공화당의 레이건이 1981년에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시장의 규제적 장치를 다 풀어 놓았습니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하고, 시장경쟁에서 자기책임의 원리를 내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시장은 활기를 띠고, 모든 것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전환시켰습니다. 시장은 커졌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탐욕도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는 앞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저축은 물론 퇴직연금과 같은 장래를 담보한 투자금을 날리기 일쑤였습니다. 대형기관의 경영진은 이미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높은 연봉으로 미리 단물을 다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파국이 오면, 경영진은 물러나면 그 뿐입니다. 경영판단이었기 때문에 배임과 같은 범죄행위로 처벌하기도 곤란합니다. 지난 30년간 대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은 결과적으로 가진 자들이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메커니즘으로 굳어졌습니다.

     

    나는 통계수치를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숫자가 때로는 이해를 훨씬 빠르게 해주기 때문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레이건 등장 이전에는 상위 1%의 부유층이 차지하고 있던 총소득은 국민총소득의 8%, 상위 0.1%의 초부유층이 차지했던 총소득은 국민총소득의 3%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패러다임의 시행 후 25년이 지난 2005년에는 상위 1%의 부유층이 국민총소득의 17%로 늘어났고, 상위 0.1%의 초부유층의 소득은 전체소득의 7%로 늘어났다. 양극화 현상이 극한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카타니 이와오,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49)

     

    아울러 1970년대에는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보상수준이 종업원의 평균임금의 약 40배 수준이었습니다. 21세기 들어와서는 약 400배로 늘어났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패러다임이 중산층을 빠른 속도로 무너뜨렸습니다. 부유층이 중산층의 부를 빨아들인 것입니다. 부유층은, 중산층 사람들이 시장에서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에 따라 주체적으로 의사결정 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기책임의 원리에 따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선택의 자유”, “기회의 평등”, “자기책임의 원리라는 용어가 얼마나 허울뿐인 논리와 도덕인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들이 많지만, 최근의 사례만 들어보겠습니다.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와 그 탐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파렴치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진원지인 월 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과 금융기관 경영진들이 보여준 무책임한 행태에서 나는 경악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심대한 손실 때문에 파산시킬 수 없어서, 대형금융기관에 국고를 지원했습니다. (자유방임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당연히 파산시켜야 마땅하지만 그들 역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시장의 자기조절기능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원받은 돈으로 경영진들은 거액의 보너스를 챙겼고, 심지어 그 돈으로 의회에 로비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제도를 바꾸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구조조정을 빌미로 수많은 종업원들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1980년대부터 일어난 금융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그 행태는 거의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의 자유, 기회의 평등, 자기책임의 원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이렇게 금융시장은 또 다시 파국을 맞았고, 극단적인 인위적 조치를 취해야 겨우 되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시장은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시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장에는 자기조절기능이 있다는 헛된 믿음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것은 시장이야말로 가진 자들의 지배수단으로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진 자들은 지배수단으로서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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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