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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대화,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등과 같은 개념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이고도 중립적인 영역을 갖습니다. 그 개념 또는 사건에 누군가가 참여해야만 성립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둘 이상의 참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이런 통찰은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사유에서 나왔습니다. 가다머의 통찰은, 놀이가 참여자들을 동등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동등하지 않으면 놀이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참여자가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화가 아니라 선언이나 주장일 뿐입니다. 대화의 외적 형식을 갖추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마음 속으로 수용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말한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명령이 됩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상태라면 독백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선언, 주장, 명령, 독백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대화라고 착각합니다.

 

직원들과 대화를 하면, 직원들은 상사 앞에서 말씀 주시면 실행하겠습니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수첩에 받아쓸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고 대화일 뿐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대화가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화란, 상사는 말하고 부하는 듣고 받아 적는 것입니다. 회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의는 다양한 의견과 견해가 만나고 부딪치는 시간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선언, 주장, 명령, 독백으로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대화와 회의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부장님’, ‘상무님’,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무슨 말을 할 수 없는지는 자동적으로 정해집니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와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말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직 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걸 잘 모르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아부의 기술, 유혹의 기술, 권력을 다스리는 법칙 등과 같은 각종 처세술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다머의 놀이와 같은 개념, 즉 대등한 입장에서 중립적인 영역인 놀이에 참여하는 주체들처럼 대화하고, 회의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황이 경영현실에서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하겠죠. 그렇다면 체념하고 말 것인가? 어떤 대안은 없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대안이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얼굴의 철학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얼굴이란 무엇인가? 얼굴은 아마도 인간의 온전함을 향한 욕구(Ganzwerdenwollen)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고독함, 분노, 희열과 소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얼굴에 드러나는 현상을 계시(Offenbarung)라고 불렀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창피함을 당했을 때, 얼굴을 잃었다(face losing)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쪽팔림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얼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 체면이 문제시 됩니다. 체면 때문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못할 일을 합니다. 우리는 얼굴이 자신의 인격 전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대화할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합니다. 얼굴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와 같은 개념을 원용할 경우, 커뮤니케이션과 리더십에서도 얼굴의 중요성이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계시가 곧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있고 깊이를 얻으며, 이 열려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강영안 지음,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얼굴은 과학적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의미가 바로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가져다 줍니다.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분명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합니다.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얼굴은 항상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타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 불안, 궁핍은 나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명령에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타인의 얼굴이 드러내는 호소는 이렇게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강영안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저항은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왜냐하면 만일 타자가 연약하기 때문에 나에게 동정을 불러일으킨다면 타자는 나의 선의와 자선에 종속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 자신이 나의 행위의 의미를 규정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149쪽)

 

아니, 뭐 얼굴을 가지고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이는가, 얼굴은 그냥 얼굴이지, 라고 힐난할 수도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간단한 철학자가 아닙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온 가족이 죽었고 자신만 살아남아,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고민했던 인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과 타인의 얼굴에서 온전함을 향한 욕망”(Ganzwerdenwollen)을 느낍니다. 내 블로그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얼굴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에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한 모습의 얼굴을 아름답게 바꾸려고 합니다.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혹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서 온전함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온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영애의 얼굴도 김태희의 얼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얼굴을 향해 그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어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얼굴에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 부족을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가 우리의 책임입니다. 부족을 결핍으로 느낄 때,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착취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에 대한 지배력(권력)과 부의 과시로 채울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세상의 고통과 불안은 대부분 여기에서 옵니다.

 

그러나 부족을 결핍이 아니라 자유로움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드러내는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의 궁핍함이 나의 잘못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의 난폭함이 나의 잘못된 부와 권력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의 온전함을 향한 욕망을 이해하게 됩니다.

 

경영과 리더십은 얼굴과 얼굴의 맞대면을 통해 상사와 부하의 존재가 계시되는 사건이 됩니다. 이 계시의 사건을 통해 상사와 부하는 함께 온전함(Ganzheit)을 향해 가는 존재가 되고 치유의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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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