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영상은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MBA과정 2009학년도 가을학기 리더십개발론강의 중 중요개념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내용의 보완이나 다른 견해가 있으면 댓글로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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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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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리더십에 대한 수요가 매우 큽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도력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권여당은 자신의 비전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다양한 의견을 통합 조정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야당은 국민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그 중요성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야는 서로 상대방을 욕합니다. 보수는 진보적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진보는 보수적 정책대안을 매도합니다.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살리기, 미디어법, 금산분리 규제완화 등과 같은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도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대립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국가적 아젠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위조직으로 내려와도, 역시 동일한 문제가 생깁니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수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리더십의 결핍은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립니다. 국론이 분열되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갈등과 반목이 있다면, 생산성 저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생산성이라는 것은 적은 노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지도자 또는 상사가 비전이 없거나 분명치 않을 때, 이런 갈등과 반목, 불신과 투쟁이 나타납니다. 리더십의 출발점은 비전을 설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만들고, 실제로 비전지향적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의 전부입니다. 리더십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부하들을 빡빡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더십은 생산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리더십의 결핍은 그래서 조직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하고 부하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듭니다. 근로의욕을 심각할 정도로 떨어뜨립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리더십에 대한 체계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적 위치에 올라 조직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은 수백만 원짜리 몇 박 며칠씩 진행하는 리더십코스에 참여했다고 해서 길러지지 않습니다. 리더십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올바른 가치와 신념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들을 잘 조성하는 방법을 배우고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며칠 사이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부단히 노력해서 몸에 스며들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자리에 가니까 리더십이 생기는 경우란 없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들은 누구나 리더십에 관한 지속적인 훈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서 이번 가을 학기에는 리더십개발과정을 진행합니다. 강의개요 소개, 리더십개발의 목적, 학습내용과 구조에 대해서는 첨부한 문서를 보시면 됩니다.


 주요 강의내용은 녹화하여 이 블로그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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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여러 차례, BSC가 전략실행을 위한 강력한 관리수단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종의 management tool입니다. 강력한 관리수단을 필요로 하는 경영자들에게 어필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BSC를 채용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캐플란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 박사는 인사문제의 전문가들이 아니고 회계학과 기업전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기업의 전사적 성과나 역량에 관한 관리수단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변의 인사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협력하여 BSC개념들을 확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기업의 성과와 전략을, 그리고 조직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양사상의 뿌리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세계에 대한 관리주체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맺음(connectedness)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사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관리의 개념은 유대기독교 사상, 즉 구약성경 창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도록 최초의 인간에게 위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질서한 세계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서로 조화롭게(다른 말로 하면 질서 있게) 잘 자라고 유지되도록 돌봐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서구인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은 동양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불교와 유교에 영향을 받은 동양인에게 세계란 서로 관계를 맺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주체(subject)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서구인들에게 세계란 다스려야 할 대상(object)이었습니다. 모르는 세계가 있다면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대상과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아 다스렸지만, 일상적인 관리의 대상과 방법은 계명과 율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상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정했습니다. 심지어 피해액을 정확히 계산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는 것까지 정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정신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런 계명과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힘의 외교를 하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으로 타인과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계명과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존의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복음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선악을 문제 삼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포도원 일꾼의 비유>, <달란트 비유> 등과 같은 주옥 같은 비유를 통해 사랑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겉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면서, 속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에 대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관리의 대상과 방법을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사회의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바람에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관리의 대상은 타인이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했고, 관리의 방법은 법규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가르침이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간단했지만,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법은 위선을 조장할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겉으로는 법을 지키면서 내면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BSC는 성과관리 또는 전략실행의 수단으로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규정합니다. 하지만, 법이 위선을 조장하는 것처럼, 이런 규정은 주인의식의 결핍을 면책시켜 줄 뿐입니다. 조직원들은 평가에 유리한 것들을 성과지표로 설정하거나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목표수준으로 정합니다. 주인의식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표와 목표를 정하고, BSC의 매뉴얼에 맞춥니다. 여기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영자나 혁신담당자들은 경영목표(숫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줍니다. 이것을 톱다운 캐스케이딩(top down cascad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직원들은 위에서 내려준 숫자에 맞춰서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창의성과 주인의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조직 내에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됩니다. 경영자들은 로봇 같은 조직원들을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보상과 처벌에 의한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을 강구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과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에 대한 보상의 차이와 처벌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류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영향은 아직까지 경영학의 여러 분과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보상에 의한 인간의 행동수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논의는 <돈은 인간의 정신을 왜곡한다>에서 간단히 포스팅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의 충격적인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을 BSC와 같은 규정화된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고 관리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도록 창조(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오직 서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과부, 고아,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인간을 품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사상이 지난 2000년 동안 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기독교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유일신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유일신 개념은 다른 세계관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이런 배타성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정복하는 과정은 유대기독교 근본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지만, 유대기독교 사상은 이런 착취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 확립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가 줄어들었지만, 음성적으로는 여전히 착취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기득권자의 약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여 <테일러리즘>에서 <MbO>를 거쳐 <BSC>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기득권층의 질서유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사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경제적 부가 곧 신의 축복으로 인식되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개신교 윤리의 세속화>라는 제목으로 이미 포스팅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기득권층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노동통제의 내용과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린이 노동금지, 근로시간의 제한, 노동조합의 결성 등과 같은 근로조건이 현격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관리의 수단이 점차 정교해졌고 모든 것을 측정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BSC가 개발되었고 많은 경영자들에게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직에 적용했을 때, 조직원들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됩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지 매우 의아해합니다. 기업이익을 위해 인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관리이데올로기(management ideology)와 인간정신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녀를 길러보신 부모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부모들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아이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의 뜻대로 관리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장성한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녀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관리의 대상으로 자란 자녀들은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이 억압되어 후일 장성해서도 자신의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기대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육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조직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BSC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이제 결론 삼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물론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관리대상자에게 노예의식을 심어줍니다. 타인을 관리하려는 관리자는 타인을 자신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예속된 인간에게는 자발성과 창조성 같은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원을 강력하게 관리하는 수단인 BSC는 오히려 조직을 점차 병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l  맥도날드는 맛을 계량화해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l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경영진의 입장에서 계량적 지표가 필요한 게 현실 아닌가?

l  사물을 측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l  그렇다면 경영자의 입장에서 관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의 계량화와 측정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약한 매운 맛을 가미한 비빔밥을 참 좋아합니다. 비빔밥에도 약한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을 넣어 비비면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청양고추장 같은 강도가 높은 고추장을 넣는 경우에는 비빔밥을 실패합니다. 딸꾹질이 날 정도로 강한 매운 맛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운맛을 정확히 측정하고 등급화하여 번호를 매겨서 어느 식당에 가도 동일한 맛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매운맛도 철저히 측정하고 관리했으면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측정과 관리의 합리화를 거쳐야 합니다. 경영진은 이런 계량화된 지표를 활용하여 경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갑순은 75점짜리 인생이고, 홍길동은 80점짜리 인간이라고 점수를 매기거나 등급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정신이 삽시간에 상품화되겠지요. 이런 짓은 인간의 영혼에 심대한 상처를 입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내가 영국 리더풀을 여행하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노예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었다는 역사를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노동시장이라고 이름 붙인 노예시장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진척되면,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꿈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상품화하려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사물에 대한 측정과 계량화 노력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에 있어서 사물과 인간 사이에 뚫을 수 없는 방어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을 관리하려는 의도와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상사는 부하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하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상사는 이미 리더십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리더십의 결여는 관리를 부릅니다. BSC같이 부하를 강력하게 쫄 수 있는 관리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리더십이 아닌 관리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리더십에 대해서는 이미 몇 꼭지를 쓰긴 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리더십과 관련된 주요 포스트

  • 2008/12/05 욕망하는 인간
  • 2008/10/27 비전(vision)수립
  • 2008/10/21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 2008/10/21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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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역량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직무와 관련되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어떤 직무에서 높은 성과를 내는 데 필요한 역량이란, 직무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리직무와 영업직무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경영진과 실무진의 차이를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경리직무에는 꼼꼼하게 챙겨보는 철저하게 확인하려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고, 영업직무에서는 타인을 설득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겠지요. 경영진은 멀리 볼 수 있어야 하고, 실무진은 지금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챙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직무에서건 공통으로 필요한 역량요소들이 있습니다. 여러 역량요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사고력을 나타내는 역량군이고, 다른 하나는 실행력을 돕는 역량군입니다.

     

    성과는 조직구성원의 사고력과 실행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림에서 보듯이 개인이나 조직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다 활용했을 경우 나오는 성과를 100이라고 하면, 분석적 사고와 전략적 사고의 부족 등에서 오는 계획의 불완전성은 성과를 감소시킵니다. 이것은 대개 조직구성원의 사고력 결함이 원인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완벽한 사고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림에서 보면, 계획대로 실행될 경우 70정도는 성과를 낼 수 있겠지요. 그것마저 그대로 실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원인은 대개 대인관계, 직무몰입, 성취하려는 의욕 등과 같은 실행력과 관련된 역량의 부족 때문입니다. 사고력과 실행력의 부족으로 실제 얻는 성과는 고작해야 40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경영에서 높은 성과를 내려면 사고력과 실행력을 높여야 합니다. 사고력과 실행력은 서로 다른 차원의 역량이기 때문에, 사고력이 아무리 높아도 실행력이 떨어지면 높은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거꾸로 실행력이 아무리 높아도 사고력이 떨어지면 역시 높은 성과는 불가능합니다.


    조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고력이 출중한데, 실행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개 연구직이나 기획직무에 어울립니다. 마치 최규하 대통령 같은 사람입니다. 사고력은 부족해도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전두환 장군 같은 사람입니다. 조직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서로 다른 역량을 잘 조화시켜서 조직의 성과를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을 팀 리더십(team 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조직구성원의 사고력과 실행력이 곧 성과를 결정합니다역량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어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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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주 소위 工神(공부의 신)들과 함께 오전 내내 워크숍을 했습니다. 곤지암리조트에서 했는데, 최근에 개설해서 그런지 시설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곤지암에는 골프치러 몇 번 가보긴 했는데, 리조트는 처음입니다.

    서울대 의대와 서울대 병원 중진교수들과 함께 리더십 모델과 성과책임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이전에 했던 워크숍에서 다소간 진보된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더 근원적인 설명이 곁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치료의 철학적 의미를 조금 가미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이미 포스팅했던 내용들입니다.


  • 2009/04/24 치료란 무엇인가(3)_레비나스의 경우
  • 2009/04/22 치료란 무엇인가(2)_가다머의 경우
  • 2009/04/20 치료란 무엇인가(1)_칼 야스퍼스의 경우 
     

  • 리더십 워크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이란 무엇인가

    둘째, 마음이란 무엇인가

    셋째, 경영이란 무엇인가

     

    리더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 경영이라는 현상이 어디서 왔으며,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위 세 가지 이슈에 집중해서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때로는 철학과 역사, 그리고 심리학적인 이슈들이 가미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역시 공신들과 함께 하는 워크숍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오찬시간에까지 많은 의견과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준비한 만큼 배우게 됩니다. 가르친 것보다 내가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공신들답게 좋은 질문들이 많았고, 미처 내가 생각지 못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비타민 몇 알 먹고 건강해지지 않듯이, 워크숍을 통해 건강한 리더십을 습득할 수는 없습니다. 참가자들이 경영이나 리더십은 결코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점을 머리로만이라도 이해했으면 합니다. 몸으로까지 확실히 이해하려면 훨씬 더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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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놀이, 대화,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등과 같은 개념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이고도 중립적인 영역을 갖습니다. 그 개념 또는 사건에 누군가가 참여해야만 성립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둘 이상의 참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이런 통찰은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사유에서 나왔습니다. 가다머의 통찰은, 놀이가 참여자들을 동등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동등하지 않으면 놀이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참여자가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화가 아니라 선언이나 주장일 뿐입니다. 대화의 외적 형식을 갖추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마음 속으로 수용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말한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명령이 됩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상태라면 독백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선언, 주장, 명령, 독백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대화라고 착각합니다.

     

    직원들과 대화를 하면, 직원들은 상사 앞에서 말씀 주시면 실행하겠습니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수첩에 받아쓸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고 대화일 뿐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대화가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화란, 상사는 말하고 부하는 듣고 받아 적는 것입니다. 회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의는 다양한 의견과 견해가 만나고 부딪치는 시간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선언, 주장, 명령, 독백으로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대화와 회의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부장님’, ‘상무님’,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무슨 말을 할 수 없는지는 자동적으로 정해집니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와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말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직 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걸 잘 모르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아부의 기술, 유혹의 기술, 권력을 다스리는 법칙 등과 같은 각종 처세술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다머의 놀이와 같은 개념, 즉 대등한 입장에서 중립적인 영역인 놀이에 참여하는 주체들처럼 대화하고, 회의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황이 경영현실에서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하겠죠. 그렇다면 체념하고 말 것인가? 어떤 대안은 없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대안이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얼굴의 철학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얼굴이란 무엇인가? 얼굴은 아마도 인간의 온전함을 향한 욕구(Ganzwerdenwollen)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고독함, 분노, 희열과 소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얼굴에 드러나는 현상을 계시(Offenbarung)라고 불렀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창피함을 당했을 때, 얼굴을 잃었다(face losing)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쪽팔림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얼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 체면이 문제시 됩니다. 체면 때문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못할 일을 합니다. 우리는 얼굴이 자신의 인격 전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대화할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합니다. 얼굴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와 같은 개념을 원용할 경우, 커뮤니케이션과 리더십에서도 얼굴의 중요성이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계시가 곧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있고 깊이를 얻으며, 이 열려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강영안 지음,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얼굴은 과학적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의미가 바로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가져다 줍니다.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분명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합니다.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얼굴은 항상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타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 불안, 궁핍은 나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명령에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타인의 얼굴이 드러내는 호소는 이렇게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강영안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저항은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왜냐하면 만일 타자가 연약하기 때문에 나에게 동정을 불러일으킨다면 타자는 나의 선의와 자선에 종속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 자신이 나의 행위의 의미를 규정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149쪽)

     

    아니, 뭐 얼굴을 가지고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이는가, 얼굴은 그냥 얼굴이지, 라고 힐난할 수도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간단한 철학자가 아닙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온 가족이 죽었고 자신만 살아남아,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고민했던 인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과 타인의 얼굴에서 온전함을 향한 욕망”(Ganzwerdenwollen)을 느낍니다. 내 블로그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얼굴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에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한 모습의 얼굴을 아름답게 바꾸려고 합니다.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혹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서 온전함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온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영애의 얼굴도 김태희의 얼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얼굴을 향해 그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어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얼굴에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 부족을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가 우리의 책임입니다. 부족을 결핍으로 느낄 때,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착취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에 대한 지배력(권력)과 부의 과시로 채울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세상의 고통과 불안은 대부분 여기에서 옵니다.

     

    그러나 부족을 결핍이 아니라 자유로움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드러내는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의 궁핍함이 나의 잘못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의 난폭함이 나의 잘못된 부와 권력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의 온전함을 향한 욕망을 이해하게 됩니다.

     

    경영과 리더십은 얼굴과 얼굴의 맞대면을 통해 상사와 부하의 존재가 계시되는 사건이 됩니다. 이 계시의 사건을 통해 상사와 부하는 함께 온전함(Ganzheit)을 향해 가는 존재가 되고 치유의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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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오늘날 암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암환자보다 더 많은데도, 암환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치료는 의사의 전유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의사의 치료행위에 의해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실존적 이해는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스퍼스의 사유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환자의 병력기록도 중요하지만, 그가 살아온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의사의 치료행위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야스퍼스의 사유는 의사가 환자를 여전히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상을 본다는 것은 인간을, 무엇을 위한 존재로 수단화하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맹장염에 걸린 환자는 맹장수술의 대상이 됩니다. 맹장수술이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맹장염환자는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논리가 확장되면, 모든 인간은 질병이라는 못된 것을 가지고 있는 치료대상으로 전락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병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질병에서 오는 고통보다, 인간이 단순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관점을 바꿔서 인간을 대상이 아닌 목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질병과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설사 질병이 있더라도 그 질병을 가진 인간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 가능성을 우리는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의 해석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놀이(Spiel)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하는 데에 전적으로 몰두할 때에만, 놀이함은 그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놀이가 전적으로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은 놀이로부터 벗어나 있는 진지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놀이에서의 진지성이다.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놀이를 망치는 사람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를 대상처럼 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가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행하는 것이 다만 놀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단지 표현될 뿐이다.”
    (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이길우 외 옮김,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2000, 190-191)

     

    도대체 놀이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는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제3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놀이가 성립되지만, 놀이는 놀이로서 독립된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이는 참여자의 진지한 몰입을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놀이의 하나로서 고스톱을 예로 들어보죠. 고스톱에 참여하는 사람이 고스톱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놀이로서의 고스톱은 망치는 것이 됩니다. 사방치기, 바둑, 테니스 등 모든 놀이가 동일합니다. 놀이에서는 어떤 위계구조도 거부합니다. 놀이 참여자는 동등합니다. 그래야 놀이가 놀이로서 성립합니다. 나는 가다머의 이런 통찰을 위대한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놀이의 개념을 치료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라는 제3의 중립영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환자도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치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는 함께 치료에 참여함으로써 동등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의사는 자신의 전문성을 진지하게 치료의 중립지대에 내어놓고, 환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질병을 진지하게 치료의 장에 내어 놓음으로써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의사와 환자가 치료에 몰입할 때, 온전한 치료가 됩니다. 치료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환자와 의사는 치료의 영역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만납니다. 치료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의사는 환자가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온전함을 얻게 되고, 환자 역시 의사가 진지하게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치유(healing)의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의사와 환자는 치료를 통해 온전함에 이릅니다.

     

    이렇게 대등한 입장에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을 통해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온전한 치료가 가능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힘의 격차로 불균형하게 찌그러진 관계가 지속된다면 오히려 치료를 망치게 됩니다.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닌 경우에 놀이가 망가지듯이 말입니다.

     

    치료에서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모든 인간은 야스퍼스가 말한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Ganzwerdenwollen)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함 또는 온전성(Ganzheit)를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온전함"으로 번역된 간츠하이트(Ganzheit)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독일어의 독특한 용법입니다. 온전함은 완전성이나 완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딘가에도 상처가 없는(unverletzt) 또는 상해되지 않은 전체라고나 할까요.

     

    이 개념을 경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리더십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존적으로 평등합니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상태에 시달립니다. 모든 인간은 힘의 격차에 의해 고통 당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온전함은 훼손됩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상사와 부하는 결코 대등하지 않습니다. 부하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상사는 그것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부하는 성과를 내는 자원 또는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향해 부하를 끌든 밀든 앞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아 고통을 제거하듯이 말입니다.

     

    리더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30년 직장생활을 통해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리더십 훈련뿐만 아니라 코칭과 같은 유사 리더십훈련과정에도 참가해 보았습니다. 자격증이나 수료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의 리더십이 좋아지거나 바뀌었을까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물론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별로 큰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리더십에 관한 지식을 조금 더 쌓았을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리더십훈련과정에 참여해 본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얻는 지식은 실존적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리더십을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그 영향력을 좋게 생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면에서 끌어 오르는 힘에 의해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 자발성이라고 볼 수 없겠죠. 어떻게든 강제된 것이니까요. 강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상사와 부하가 '리더십'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내어 놓고 대화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사와 부하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의 장, 리더십의 장을 통해 부하는 물론 상사도 자신의 영혼을 일깨워,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생기를 찾게 됩니다. 대화가 우리를 살립니다. 대화를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치료'가 가능하듯이, '리더십'도 대화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이란 리더십의 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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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어느 의사가 불치의 병에 손을 써본들 아무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확실히 유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노예 근성 역시 치명적인 병과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인민에게 가르치고 충고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민들은 이러한 불치병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랄만한 노예근성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자발적 복종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하므로 모든 현상은 마치 인간의 본성에서 파생된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 도사린 게 아니라, 노예화를 갈구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다고 말이다. ……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에서 어떤 분명하고도 확실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어느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한 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평등이다. 신의 시녀이자 인간의 교사인 자연은 인간을 오로지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설계에 따라 창조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서로 동지로서 그리고 나아가 형제로서 인식하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연은, 영혼의 영역이든 육체의 영역이든 간에, 어느 한 사람을 선호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부여했는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강한 자와 영리한 자가 마치 무장한 강도처럼 약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습격하거나 약탈하게 하지는 않았다. 자연은 이 세계에 마치 전쟁터와 같은 무엇을 설치해 주지는 않았다. 자연이 개개인들에게 제각기 다른 능력을 부여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추측컨대 강한 자와 영리한 자로 하여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형제애를 나누게 하고, 힘없는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박설호 옮김, 『자발적 복종』, 울력 2004, 33~35쪽, 밑줄 추가)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Etienne de La Boetie, 1530~1563) 1530년 프랑스 사를라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고대 문학을 교육받았고, 16세에는 고전 작품들을 번역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시를 쓸 만큼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평적 사조와 개혁적 분위기가 흘러 넘치던 오를레앙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불과 18세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혁명적이었던 자발적 복종을 썼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보르도 지방의회 의원에 발탁되었고, 거기서 몽테뉴와 우정을 맺습니다. 당시는 신구교 사이에 종교전쟁의 기운이 있던 터라, 그는 그런 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 분쟁의 와중에 33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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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조직이란 무엇인가(5)_제3세대 경영학(Wholism)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적 합리성 너머에 비합리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제3세대 경영학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조직이론에 연결시키면, 조직구성원들간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연결되어 있음의 원리(principle of connectedness)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평안과 행복을 느낍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긴장과 불안이 엄습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부하들이 상사나 동료들과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평소의 행동패턴을 바꿉니다.

     

    오래 전부터 조기유학 붐이 일고 있는데, 조기유학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입니다. 조기유학은 아니지만, 나도 유학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학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유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국어 문제도, 돈 문제도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인간에게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못된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하는 부모의 대부분은 아이들을 자신의 욕구에 부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아이들과의 연결상태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설계할 때는 어떻게 하면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이란 조직구성원들을 항시 일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휴대전화나 블랙베리(Blackberry)와 같은 물리적 연결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간의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의 연결입니다.

     

    조직의 정의

     

    이런 입장에서 조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조직은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어 발휘하도록 돕는 삶의 수단이다.

     

    이제 제3세대의 경영학으로서의 조직이론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이유는 명백해졌습니다. 아직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1, 2세대의 경영학에서 보면 공동의 목표도 없고, 협동도 없는 조직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운영의 현실을 보면, 오히려 이러한 정의가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

     

    첫째, 구성원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의 느낌(feeling of connectedness)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관심을 갖게 되는 첫 출발이자 신뢰로 나가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둘째,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도록 서로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이 그 정보와 에너지를 조화시켜서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셋째, 조직이 구성원의 삶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은 목적이 될 수 없고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삶의 풍요로운 수단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또 다른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직접적으로는 조직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이 창발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는 조직의 목적은 결코 이윤추구에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대차대조표에 나타나는 이윤은 인간의 잠재력이 발현된 결과이지 이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경영한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2세대 경영학과 완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기업의 존재목적이 이윤추구에 있다는 가정은 매우 편협한 가르침이며, 인간의 삶을 오도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최근에는 이윤보다는 조직의 이해관계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점을 흐리는 효과밖에는 없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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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