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설명하면서, 성경의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 14~30)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달란트는 고대 중동지방의 화폐단위였지만, 그것이 재능이라는 뜻으로 변했다가 오늘날에는 자신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 달란트 비유에 대해 타고난 재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노동윤리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재(人材)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예수의 비유를 차분히 읽어보겠습니다.

 

  1.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2.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3.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4.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5.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
  6.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7.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2.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4.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5.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이 비유를 읽고 얻은 첫인상이 어떻습니까? 처음 성경을 배울 때는 잘 몰랐는데, 철 들고 나서 이 비유를 음미할수록 너무 무자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한 달란트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는 행태는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의 달란트 비유는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재능의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큰 재능이든 작은 재능이든, 수학재능이든 음악재능이든 상관없이, 어떤 재능이든 연마해서 남김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란트 비유의 핵심이었습니다.

성과가 적은 사람에게 적게 보상하고, 성과가 큰 사람에게 많이 보상하라는 취지의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해석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신이 주신 재능(달란트)을 크든 적든 연마하여 남김 없이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실패할 것을 염려하지 말고, 결과는 상관하지 말고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엄격한 사람이라서 장사하다가 실패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호된 꾸지람과 가혹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썩힌 것에 대한 징벌이었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재능을 연마하여 활용하라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나는 크게 두 가지 시사점을 생각했습니다.

 

첫째, 사회적으로 실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실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 있는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왕창 실패해도 다시 재기하는 데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한번 실패하면 어떻게 되나요? 큰일 납니다. 회사생활에서 실패하거나 실수하면 찍힐 뿐만 아니라 한직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선배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조직의 쓴맛을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적당히 중간만 가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재능을 갈고 닦으려는 의지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창의성도 발휘하기 어렵죠.

 

이런 상황에서 적은 재능이라도 맘껏 연마하고 잘 발휘하라고? 불가능한 얘깁니다. 어린 아이들이 걸음마를 뗄 때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걷는 것을 배웁니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과정이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덴마크의 사례>를 예를 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아무리 재능이 적더라도 아예 포기하지 않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재능의 크기를 서로 비교합니다. 학교성적을 비교해서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는 차별합니다. 재능은 학교 점수와 상관 없는 데도 말이죠. 점수가 낮은 사람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리곤 포기합니다. 부자와 행복, 성공과 위대함은 학교성적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수로 비교합니다. 그래서 재능이 적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재능연마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그리곤 환경 탓 하거나 찰라적 쾌락에 탐닉하게 됩니다. 나아가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울지도 모릅니다.

 

재능의 크기에 상관없이 누구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연마하고 활용할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인재(人材)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적게 내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사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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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질문이 있어서, 성경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뿌리 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한 시간 일한 근로자나 뙤약볕에서 10시간 일한 근로자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어떤 식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오늘날의 지성과 합리성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죠..

 

혹시 일용근로자들의 새벽 인력시장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적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일해서 일당으로 사는 분들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입니다. 남대문 근처를 비롯한 서울 전역에 여러 군데서 새벽마다 노동시장이 섭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 작업장에서 봉고차를 몰고 와서 필요한 인원수만큼 데려갑니다. 뽑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건장하고 힘 잘 쓸 수 있고 숙련된 것처럼 보이는 순서대로 뽑힙니다. 이 인력시장에서 뽑히지 못한 사람은 그날 하루는 공치는 겁니다.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일당을 벌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에도 이런 인력시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포도원 일꾼>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인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가서 필요한 만큼 데려왔는데, 오후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녁에도 나가 보았더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운이 없거나 무능해서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그날 일당을 똑같이 지불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절 참조)

 

예수가 들었던 이 비유의 맥락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술 더 떴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때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마태복음 1916~30절 참조)

 

일부 신학자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한정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세상 사람들을, 포도원은 교회를, 관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천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협의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일관된 가르침은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부의 탐욕적 추구가 악한 것이고,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뛰어난 지식과 고도의 합리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한 방에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이 인간의 뛰어난 지식인지 생각해볼까요? 대단히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는, 최근에 유행하는 이론 중에 보상(칭찬)을 통해 코끼리를 춤추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에 근거한 것인데, 보상에 따른 강화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의 보상제도가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확장하면 당근과 채찍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기업의 보상제도, 성과와 역량의 문제는 나의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인 포스팅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주 방문하셔서 읽고 함께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여느 짐승과 동일하게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을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의 거래적 존재(transactional being)으로 인식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따위 이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계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아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existential being)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인간의 뛰어난 지식 중에 형평성 이론(equity theory)이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하는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론입니다. 적어도 10배는 아니더라도 보상의 상당한 차이가 노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뛰어난 지혜입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계산적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뛰어난 지혜를 성경은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대학에서 현대적인 경영이론을 배울 때, 나는 그 이론의 정교함과 합리성, 그리고 실증가능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이론들이 현실에 잘 적용되기만 한다면, 훌륭한 경영성과와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거쳤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고 온갖 문제상황에 직면해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영이론들을 적용하면 할수록, 조직문화는 점점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을 10:1로 결정해서 지급한다면 일단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계산합니다. 보상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더 이상 일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손익을 철저히 계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될만한 것에는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조직문화가 어떻게 될까요? 이런 조직에는 공동체 정신은 사라지고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위한 계산만 남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아우를 대하듯, 사랑과 온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지름길입니다. 조금 못난 자식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듯이, 포도원에 제때 불려가지 못한 사람, 즉 사회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회에는 서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손익을 넘어선 사랑이 오히려 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하고, 그런 부의 향유가 사회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드는 선순환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북유럽의 사회모델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형평성을 따지는 계산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예수의 형상을 닮았고,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포도원 주인 같은 사람들이 꾸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스스로 그리스도(메시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Christian이란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기독교인들 스스로 자신을 작은 그리스도라고 인식한다는 것이죠. 독일어에서는 기독교인을 아예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도 그리스도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이 곧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겁니다. 놀랍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그러므로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생생한 가르침이 있을까요? 포도원 비유는 뒤늦게 포도원에 왔거나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 일꾼들에게, 그래서 생계가 막막해진 사회적 약자인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아니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예수의 명백한 가르침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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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