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세계를 합리화(rationalization) 해왔습니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이성(reason)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면서 급속도로 합리화되어 왔습니다.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한 사람은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고리대금업이나 상업을 통한 이유추구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러나, 베버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는 부가 축적되고 있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사상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배태한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을 검증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그는 이 저작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이 경제적 부를 얻은 합리적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중세에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부에 대한 관념을 죄악시했습니다. 특히 고리를 취하는 것은 철저히 비난받을 일이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수도원에서는 엄격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수도원에만 머물던 금욕적인 삶이 세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금욕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성경의 엄격한 가르침에서 현실에 맞도록 다소 순화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수도원의 고독 속으로 도피했던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개혁주의자들의 직업윤리에 의해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속적인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금욕의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거나 느슨하게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의 금욕 사상이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직업윤리로 세속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직업윤리의 세속화 과정이 바로 막스 베버가 관찰했던 합리화(rationalization)였습니다.

 

베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 금욕주의는 닫아 버린 수도원의 문을 뒤로 하고 삶의 시장으로 걸어 나와 현세적 일상생활에 자신의 방법을 침투시키기 시작했고, 세속 안에서(그러나 세속에 의해서나 세속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합리적 생활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막스 베버, 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111)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금욕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말은 금욕이 탐욕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탐욕의 맛을 아는 것은 중독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중독되면 끊기 어렵듯이 탐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탐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볼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 바탕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거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성이 신앙의 힘을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합리화는 이성의 기능입니다.

 

막스 베버의 최대의 관심사는 이성에 의한 사회의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다른 지역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은 곳에서 일어 났을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는데, 자본제와 그 정신은 이미 14세기부터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 지방에서 일어나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버는 합리화가 개신교 윤리(protestant ethic)에서 나왔다고 보았습니다. 수도원에 갇혀있던 금욕정신이 프로테스탄트들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이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정신을 일에 대한 성실성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내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일을 통해 신의 뜻을 이루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낭비는 모든 죄 중에서도 최고의 중죄가 됩니다. 인생은 신의 부르심(calling)에 응답하기에도 너무나 짧고 소중합니다. 사교와 잡담, 사치와 소비 등을 통한 시간낭비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는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만인에게 적용됩니다. 노동의욕의 결핍은 구원 받지 못함의 징후였습니다.

 

부자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신의 섭리는 만인에게 아무 차별 없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일해야 하는 직업이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윤리는 개신교의 사회윤리에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지도자들도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선 독일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돈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법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상업적 거래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독일 국민 최대의 불행은 말할 것도 없이 이익을 위한 거래이다. …… 악마가 그것을 발명했는데, 교황은 그것을 승인함으로써 전세계에서 무수한 악을 저질렀다.”(리차드 토니, 김종철 옮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1983, 113쪽)

 

하지만, 스위스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루터는 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칼빈은 자본주의적 물결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고지식했고 이상주의적이었지만, 합리적인(rational) 사고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회의 부패와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칼빈에게도 신학적인 문제, 특히 로마카톨릭에 저항한다는 입장에서는 루터와 비슷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유연했습니다. 아마도 로마카톨릭의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특히 영향력이 큰 인물들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칼빈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자본주의 물결과 그 정신을 교회 내로 끌어들여 공식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루터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이자는 법정최고액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살짝 바꾸었습니다. 이자의 최고액이 정해졌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대부가 무상으로 행해져야 하며, 채무자는 채권자와 같은 이익을 얻어야 하고, 지나친 담보를 짜내서는 안 된다고 물러섰습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빈민의 곤궁을 이용하여 짜낸 이자와 번창하는 상인의 자본으로 번 이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적 상식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자의 질(quality)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해서 이자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양보했습니다. 기독교의 사회윤리가 엄청나게 이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내 생각에는, 자본과 이자를 바라보는 칼빈의 사상은 서구 정신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이었습니다. 성경이 제시했던 인류의 정신적 안정망(mental safety net)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자를 받지 않는다에서 “이자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진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에서 "너에게 이익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로 변질되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변화를 합리화(rationalization)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견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반쯤 맞을 수도 있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교회가 자신이 억눌러 왔던 자본주의 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본제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자본주의 정신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정신이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했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버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위대한 철학자였던 베버조차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발흥시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이 부에 대한 기독교의 엄격한 가르침을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정의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자본주의 정신은 14세기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 등을 중심으로 충분히 발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베니스의 상인들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복식부기의 원리가 이미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자본주의와 그 정신은 이미 14세기에 싹 텄고, 16세기에는 그 정신이 유럽의 전역에 퍼져있을 때였습니다. 기독교는 그 정신을 자신의 내부로 종교개혁이라는 형식을 빌어 살며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자본과 이자를 불려 부를 쌓은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면서도 이윤추구를 죄악시했던 이율배반적인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스위스 개혁가들이 기독교를 합리적으로(rationally) 구해낸 셈이 됩니다. 이로써 경제적 욕망과 탐욕적 에너지가 기독교내에 싹 틀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하여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켰지만, 교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대해서는 성공적으로 저항(protest)했지만, 자본주의 탐욕정신의 도전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신흥부자들의 가렴주구를 보다 못한 목사회(제네바의 칼빈 지도 아래 있던 성직자 단체)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려 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의 궁핍을 이용해 부유해지려고 애쓰는 파렴치한 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에 재갈을 물리자.”(리차드 토니, 김종철 옮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1983, 137쪽)

 

그러나, 목사회의 어느 누구도 이 강령이 실행되리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적 합리화(rationalization of reason)는 부()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개신교 사회윤리는 금욕에서 탐욕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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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나는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무신은 쉬 떨어질 뿐 아니라 발이 시커멓게 되는 게 흠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비 오는 날에는 신을 벗고 다니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읍내에서 흰 고무신을 사 오셨는데, 나는 그 신을 신고 다닌 게 아니라 아끼느라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 내 신발은 신발장에 차고 넘칩니다. 여러 켤레의 구두는 물론, 조깅화, 등산화까지 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현대인은 생활필수품도 고장이 나거나 못쓰게 돼서 바꾸지 않습니다. 유행이 지나면 바꿉니다. 내가 쓰는 휴대폰이 6년 된 것을 알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공산품의 기능과 디자인을 바꾸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모델을 빠르게 바꾸면서 소비자를 현혹합니다. 새로 나온 휴대폰을 갖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광고선전을 해대고 있습니다.

 

소비생활에도 유행을 탑니다. 욕망이 끼어듭니다. 명품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을 충족합니다. 비싼 명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과시욕이 작용합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 소비합니다. 그래서 경영학은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여기서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상품을 소비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순환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폐경제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로 진화된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때문이 아니라 타인과 차별화 하고 싶은 욕망이 상품을 소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품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생산되지도 않을 것이고,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자본도 축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비야말로 미덕입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행위는 사회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소비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투자의 기본원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라입니다. 경영의 기본원리는 욕망을 부추겨서 충족시켜라일 것입니다. 막스 베버와 동시대를 살았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이런 현상을 아주 잘 포착했습니다. 100년 전에 쓰여진 그의 책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에서 화폐경제는 봉건주의를 극복하고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발전하게끔 유도했지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자존감이나 삶의 태도가 돈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돈이 곧 신이다.”(Das Geld wird Gott.)

 

은행이 교회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었고,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공동체적인 연대는 무너졌습니다. 예술가들조차 돈을 위해 예술활동을 합니다. 놀이로 하던 스포츠도 돈이 점령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재듯이, 돈이 세상을 재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식으로 얘기하면, 돈으로 세상은 더욱 촘촘히 합리화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짐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은 사회적 그물망을 짜는 거미이다.”(Das Geld ist die Spinne, die das gesellschaftliche Nets webt.)

 

현대인은 지금 거미가 짜 놓은 그물에 걸렸고,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돈의 승리는 질(Quality)에 대한 양(Quantity)의 승리이고, 목적에 대한 수단의 승리입니다. 현대인은 돈을 버느라 삶의 질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 일하는지 그 목적도 잃어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삶도 불가능해졌고, 삶의 자유도 잃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구시대의 봉건영주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새로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속박입니다. 구시대에는 영주와 교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즉 타인과 차별화 되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ans)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차별화된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향유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더 큰 차, 더 큰 집, 더 비싼 장신구, 더 큰 요트와 더 비싼 자가용비행기를 요구합니다. 혹시 미국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가보셨나요? 마이애미 키 비스케인, 캘리포니아 서부해안 등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월 스트리트라는 도박판에 수많은 타짜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각종 수학적 모델을 가지고 도박판을 요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요리사들이 쓰고 있던 회칼이 어느 날 갑자기 무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여 수많은 요리사가 피흘리면서 퇴장 당했습니다. 도박판이 깨진 것입니다.

자기들만 피해를 보면 좋은데, 전혀 관련없는 사람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수학모델에 의지한
도박으로, 그리고 자기과시를 위한 지나친 소비로, 구원받으려던  자본주의와 그 추종자들이 구원은커녕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그토록 찬양했던 미국식 사회모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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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