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나서 공동체 마을의 학교, 도서관, 회의실, 대형 세탁실, 가구공장, 화초를 기르는 곳, 농장, 수영장(큰 연못인데 다이빙대로 있어 수영도 함)을 둘러보았습니다. 가구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배려한 튼튼한, 그러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만듭니다. 장애인용 가구들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듭니다.


구글에서 본 다벨 브루더호프입니다. 마을이 아름답죠.

 

마을을 둘러보는 도중에 열 명쯤 되는 무리가 피크닉을 가는지, 조카 내외와 서로 인사를 하고는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으니, 공동체 멤버로 한 가족이랍니다. 아이들이 자그마치 7, 부부까지 합쳐서 9명입니다. 일요일이라 온 가족이 아침 먹고 등산 겸 산책을 떠나는 거라는군요. 나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자는 정부시책에 잘 따랐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 다 떠나고 나니 허전합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을 보면 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아이들이 일곱이라! 온 가족이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하나씩 메고 숲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피크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피크닉 준비를 하는 동안, 조카부부 이웃에 사는 독일인부부를 잠시 만났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80세는 족히 돼 보이는데, 겉으로 봐도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식은 다 장성해서 결혼했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대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영어를 잘했는데, 남편은 영어가 서툴고 독일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녹슨 독일어를 했습니다. 남편은 중남부 독일어 악센트로 말했습니다. 아들이 다 크고 나서 자신이 하던 사업체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집에서 굴리던 차 두 대를 처분해서 공동체로 왔노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의 브루더호프(브루더호프는 미국에도 6군데가 있음)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브루더호프로 온지는 몇 년 안 되는데, 미국에 있을 때 부인은 공동체 내에서 주로 영문출판관계 일을 했다고 하네요. 노부부는 나에게 자본주의적 삶의 정신적 황폐함을 얘기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빨리 가야 한다고 아이들이 졸랐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피크닉을 참을 수 없죠. 공동체에서 내준 봉고차를 몰고 남부해안도시 헤이스팅스(Hastings). 갔습니다. 인구만 명의 어촌입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카메라를 들고 제대로 서있기가 곤란했습니다.


파란색의 맑은 바다를 생각했다가 칙칙한 갈색이라서 다소 실망했습니다.

잉글랜드 남부해안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맛보는 바닷바람입니다.

소박한 해양박물관이지만, 역사교육의 현장입니다.

작은 마을이라도 박물관은 있지요. 어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박물관입니다.

아이들을 돌봐주는 간호사와 유치원 교사부부도 함께 갔습니다.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죠.

이런 시골에도 중국집은 어김없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한국음식 맛 내는 것을 시켰는데, 어떤 것은 성공했고 어떤 것은 실패했습니다. 오랜만의 나들이였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만, 바닷가는 바람이 세고 기온이 낮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보디엄 성(Bodiam Castle)

돌아오는 길에 공동체마을 근처에 있는 보디엄 캐슬(Bodiam Castle)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 성의 특징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성주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정사각형으로 지었는데, 주위에는 해자까지 있습니다.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이니까 약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같은 성이라고 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여러 차례 쓰였다고 합니다.


성에서는 중세의 무사들이 싸우는 장면을 연습해서 어린이들의 주목을 끌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른이고 애고 모두 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예 무릎꿇고 앉아서 듣고 보고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장면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정답을 외우고 시험보는 역사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수백년 된 성에 와서,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조카부부. 화려한 장신구는 없지만 삶의 순수함으로 오히려 빛나고 있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내가 할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곳에 가서 살아보는 것도 삶을 새롭게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지만, 제대로 된 삶이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사는 동안 잠시 빌려서 쓰는 것뿐이죠. 그리고는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겠지요.


이들의 삶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조카부부는 갓 결혼해서, 그러니까 
1997 2월경 다벨 브루더호프를 일주일 방문해서 살아보고 나서 몇 년 후에 다시 공동체로 들어와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인터넷에서 있는 것을 퍼온 것인데, 나의 짧은 방문에서도 여기에 소개된 삶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체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거의 만지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 신경 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면 그들은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섬길까를 생각하며 산다.

 

브루더호프가 우리나라에 알려지면서 무려 1,000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그 먼 곳까지 방문했다. 방문자들에게 그곳 사람들은 처음엔 "왜 왔느냐, 이곳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굉장히 힘들다"는 말을 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지기까지 사랑과 섬김은 보지 못하고, 환상만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잉글리쉬(영어)로 얘기하지 말고, 허티쉬(마음의 언어)로 얘기하라고 말한다. 언제나 조용 조용하게 얘기하며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이부자리에서 조차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암시를 주는 말조차도 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에게 직접 솔직히 얘기한다. 19살 먹은 청년도 80살 할아버지에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혼

 

대부분이 공동체 식구끼리 결혼하고, 혼전 순결을 철저히 지키는 이 공동체에선, 한 청년이 한 공동체의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할 때, 성직자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고, 그 성직자는 여자 쪽의 부모와 의논한다. 그리고 그 여자의 부모가 자녀와 의논해 남자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면, 공동체에선 비밀리에 둘만이 교제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령 공동체 밖으로 둘을 장기간 함께 파견한다거나, 공동체 안의 한 일터-학교나 출판사,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대에 대해 충분히 알며, 결혼할 마음을 갖추도록 도와준다.

 

약한 자를 위한 배려

 

아이를 낳으면 6주 후부턴 베이비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 전에도 산후 조리를 도와준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친정 집에서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편하고 더 좋았을 만큼 배려를 해주었다. 먹을 것도 굉장히 배려했다. 자녀를 낳아 그리스도의 자녀로 양육하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겨 많은 아이를 낳긴 하지만, 산후조리 때 이렇게 대우받으니, 아이를 더 많이 낳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들은 약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병자와 노인들에게 배려한다.

 

일터

 

공동체 마을의 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오후에는 진찰실을 떠나 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그래서 왜 의사가 공장에서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계속 지시하는 일만 하면,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때문에, 남의 지시를 받는 일을 함께 한다"고 했다.

 

이들을 자신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내려놓는다. 그러니 공동체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는) 인간의 본능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각기 일터를 배정받아 일을 했는데, 이들을 어찌나 일을 열심히 하는 지 일이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일이 힘들다고 하면, 마치 도청장치가 돼 있는 것처럼 이들은 다음날 일을 더 줄여주고, 다른 일을 맡기곤 했다. (그 정도로 상대가 고충은 없는 지, 일을 힘들어하지 않는 지 살피고 있다는 의미다)

 

한번은 일이 힘들어 그곳의 한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천국에 가면, 이렇게 일할 일 없겠지요"하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가 말씀 하기를 "섬기는 삶이 없이 어떻게 천국이 이루어지겠느냐" "내게 만약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일이 전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토의

 

브루더호프엔 텔레비전도 없다. 그러나 도서관은 세계적인 수준. 밤이면 영성 깊은 부모와 순수한 아이들이 조용하고 깊은 대화를 한다. 토요일엔 문화의 날로 정해 아이들과 함께 여러 문화도 즐긴다. 한번은 프랑스의 재즈댄스팀이 방문했다. 그들은 옷차림이나 춤 모양새가 매우 야했다. 그들이 춤추는 사이 이를 보다 못한 한 어른이 춤 도중에 일어서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댄스는 중단됐는데, 재즈팀은 그렇게 다른 문화에 대해 닫혀있는 줄 몰랐다며, 실망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공동체는 이 문제의 토의로 시끄러웠다. 그 다음날 모임의 토의에서 댄스를 중단한 사람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그 춤이 야하다거나 야하지 않다거나 -아무런 분별없이 그냥 즐기는데, 왜 춤에 대해 야하다는 해석을 붙여 분별하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재즈팀에게 사과를 해야한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댄스를 중단시킨 사람도 이에 공감해 사과하러 프랑스로 떠났다. 그들은 세속과 충돌하지 않는 방법으로 `어린아이처럼 즐기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우리를 돌봐주던 분이 부활절 예배 준비를 맡았는데, 그 분은 온 성심을 다해 부활절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굉장히 화려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분은 공동체가족들의 이의에 봉착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냐,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하느냐"는 물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부활절을 준비한 것을 알고, 스스로 징계를 받아 공동체와 상당히 떨어진 외딴 곳으로 떠나 회개의 기간을 가졌다. 그 때 그는 공동체에 편지도 보내지 못하지만 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그가 자신의 영광이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돌아오도록 도왔다.

 

신앙

 

이들은 성경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물어보면 어느 신학자보다 성경에 대해 박식했다. 그들은 기도는 남이 보지 않는 다락방에서 해야한다는 말씀을 따르는 듯 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는 신앙을 하지 않고, 삶 자체가 신앙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복음주의적 신앙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이제 이들의 삶을 조금 상상하실 수 있나요? 소위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이죠.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이겠죠. 사는 동안 끊임없이 신뢰와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곳 공동체에서 무소유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욕망의 때와 자본의 때를 벗은 사람들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을 보면서,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껨(Emile Durkheim, 1858~1917)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회의 기초는 성스러움이다.” 그런, 우리 사회는 지금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온통 기독교로 채색되어 가고 있지만,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점점 상스러움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브루더호프에서의 성스러운 만남을 아쉬워하며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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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내가 지난 여름 영국에 있는 브루더호프(Bruderhof) 다벨공동체(Darvell Community)를 방문했을 때, 그들의 무소유의 신념, 봉사와 희생정신에 기반한 내면의 아름다움, 공동체 마을에 깃든 평화로운 아우라(aura)와 자연스럽게 화음으로 퍼지는 찬양은 나를 감동케 했습니다.

 

다벨 공동체 입구

그런 공동체 내에서 처참하고도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배신, 권모술수와 권력투쟁, 사선을 넘나드는 아픔과 육체의 질병,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씻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 그리고 용서, 사랑과 평화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은 아닌데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저열한 행태에서부터 가장 숭고한 용서와 사랑의 행위까지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어린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모습에서, 나는 고이는 눈물을 참으려고 자꾸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이 책은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ohann Heinrich Arnold, 1913-1982)의 생애를 그린 전기입니다. 그의 외손자 피터 맘슨(Peter Mommsen)이 외할아버지의 생애를 기술한 것이지만, 무소유의 기독교 생활공동체 브루더호프(Bruderhof)의 탄생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그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합니다.

 

하인리히 아놀드의 아버지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 1883~1935)는 독일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공부하여 1909년에 에어랑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에미(Emmy von Hollander)와 결혼했습니다. 작가와 강연자로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1920년에는 베를린 중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아내 에미와 아들 하인리히를 포함한 온가족이 독일 중부지방의 자너츠(Sannerz)라는 조그만 마을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 기초한 신앙공동체인 브루더호프(Bruderhof, 형제의 공간)를 세웠습니다. 후일 독일 튀빙겐대학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브루더호프에 대해 매우 어둡게 보이는 시대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도 자너츠의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에버하르트와 에미는 사유재산제가 절도이며, 제아무리 훌륭한 선진문명이라고 해도 가난한 자들의 등 위에 세운 문명은 썩었다고 믿었고 사랑의 공산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자너츠에서는 무엇이건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 수입과 모든 물건이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에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대중의 고통을 나누기 원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몫으로 뭔가를 챙길 수 있겠어요.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랑의 정신으로 섬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요. 무소유의 욕구는 우리에게 신조와도 같아요.

 

나치 정부의 핍박이 가혹해지면서 독일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영국에 잠시 머물렀지만, 당국은 적국에서 온 공동체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는 공동체를 받아 줄 나라가 없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공동체를 받아준 나라가 파라과이였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도록 허용된 땅은 질퍽질퍽한 초원과 처녀림으로 이어지는 버려진 방목장이었습니다. 공동체는 목숨을 걸고 일해서 숙소와 공동시설을 지어 마을을 건설했습니다.

 

위생상태가 안 좋아 아이들과 허약한 사람들은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동체의 비전을 가지고 가난과 죽음에 맞서 번창하는 공동체를 일구어 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스(에버하르트의 사위, 그러니까 하인리히의 매형)은 세속적으로 보면 아주 유능한 회계사였는데, 공동체에 들어와서 온갖 술수를 부려 공동체의 헤게모니를 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인리히는 공동체로부터 격리되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한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스는 사람들을 망치로 내려치지 않아. 그렇게 했다면 사람들이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겠지. 그가 사람들을 쥐어짜는 방식은 수압프레스와 비슷해. 서서히 누르지만 결국 마지막 한 조각의 생명까지 짓눌러 버리지.

 

하지만, 끝까지 인내하면서 매형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동체가 성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운영비를 감당하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여행을 떠납니다. 하인리히가 모금여행에서 얻은 것은 기대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성공적이었고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브루더호프의 공동체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인 부자들이 합류하거나 재산을 기부하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미국 동부에 브루더호프를 세워 하인리히가 이끌었고, 서로 다른 사상과 신념, 습관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해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파라과이 브루더호프는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전문가가 되었지만,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공동체주의가 그리스도를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에버하르트가 죽은 후, 브루더호프에는 공식적인 책임자 없이 20년이 넘도록 한스가 리더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는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처럼 배후에서 다른 사람을 조종함으로써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통일성 있는 리더십을 발휘해 줄 진정한 리더를 세우고 싶어했고, 공동체 전부가 하인리히가 적임자라는 폭넓은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종과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형제들 속에서 형제로 있고 싶을 뿐입니다. …… 참된 리더십은 섬김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쓴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1962년이 되자 하인리히는 공동체의 장로로 지명되었습니다. 그 후 1982년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브루더호프의 공식적인 리더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단 하루라도 불신 속에서 사느니 천 번 신뢰하고 배신당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추행과 악행은 결국 권력욕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에의 의지이며, 이것이 악의 근원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꼬뮨은 악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 아놀드가 일구어낸 사랑의 꼬뮨 브루더호프는 이 패역한 세상에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은 www.churchcommunities.org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소개하는 동영상은 <여기>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공동체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출판물들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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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젊은이들이 재테크에 미치다니


나에게는 조금 걱정이 생겼습니다. 얼마전에 보니까 20대에 재테크에 미쳐야 한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니, 이건 정말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장래가 걱정입니다. 20~30대에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공부에 쏟아도 모자랄 텐데, 재테크에 미치다니...... 재테크에 미치지 않아도 소유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세워서 철저히 실천하면 재테크에 미치는 것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검증된 방법론이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습니다. 이 방법론을 따르면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재테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비전을 세워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하면 바라는 모든 것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시간 내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천천히 그 방법론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젊은이들이 재테크에 미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사고력을 기르는 공부에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비전>에 대해 잘 이해해야 합니다. 비전체계는 핵심목적, 장기목표, 핵심가치로 구성됩니다. <핵심목적 또는 사명>은 다른 포스트에서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장기목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장기목표를 단순히 비전(vision)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죠. 먼 미래에 달성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소망을 담은 구체적인 꿈입니다. 여기서 장기를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짧게는 5~10, 길게는 50년을 볼 수도 있고, 아주 길게는 다음의 몇 세대 후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환경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길게 봅니다. 환경이란 한번 망쳐 놓으면 회복되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죽은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를 명확히 하면 자신의 최장기 목표가 설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제대로 하지 못하죠. 그래서 아주 짧은 미래를 내다 볼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정도까지의 전망만을 생각합니다. 미래를 보는 눈도 훈련하지 않으면 줄어들기 때문에 목전의 이익에 급급한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늘 훈련이 필요합니다.


소유의 목표와 존재의 목표


아무튼 장기목표는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 장기목표에는 두 가지를 포함해야 하고, 균형 잡힌 수준에서 통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유의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둘 중에 소유의 목표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소유가 존재를 대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진정한 존재양식이란 소유를 배제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인류학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무소유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 사회에서 소유를 배제한 존재양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소유는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육체적 편안함은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행계좌의 부족으로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소유가 없다면, 미래의 의식주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의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소유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물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존경할만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일반적인 대다수 시민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나는 성북구 삼선동의 산꼭대기 문간방에 250만원짜리 전세를 얻어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집들이 있는데 왜 나에게는 잠잘만한 집 한 채를 가지지 못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소유의 편안함을 갈망했었습니다. 삶의 모든 형편이 불편했습니다. 밤에 일어나서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밤중에 일어나서 19공탄을 갈아야 했고, 더운 물이 없어서 연탄불에 데워 세수를 해야 했습니다. ...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남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조망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부동산 투자를 포함한 어떠한 재테크도 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그럴 의지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에너지와 시간을 공부하고 일하는 데 썼으니까요), 그러나  부자는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소유를 성취했습니다. 그 동안 별로 고생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아내와 다 장성한 두 자녀, 그리고 부부의 노후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소유의 목표가 가져다 준 후유증

내가 잘 아는 한 분은 자신이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의 목표가 멀어지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한 가지 사례를 들려 주었습니다. 21세기로 들어서려는 전환기에 IT벤처 붐이 일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의 권유로 벤처에 투자하면 몇 배의 이익을, 아니 몇 십 배의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상당한 금액을 투자했습니다. 지금은 다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투자하게 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불노소득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노동의 대가가 아닌 묻지마 투자로 일확천금을 노렸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으로서 시장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투자해 두는 게 좋다고 자신의 재테크를 정당화했습니다. 그 후에도 소소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소유는 마약과 같아서 소유할수록 자꾸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하게 되고, 소유 자체가 목적으로 변해 버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유의 무서운 특성을 무시한 채, "더 많이 더 많이"를 마음으로 외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잘 살다가 어느 날 거액의 토지 보상금을 받은 후부터는 형제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형제를 살인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 재벌 2세들의 재산 다툼을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생각하지만, 소유의 미묘한 독성을 이해한다면 형제는 고사하고 부자간에도 서로 싸움질하는 게 소유의 특성입니다. 소유에 맛들기 시작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죠. 겉잡을 수 없이 자신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어 갑니다. 자자손손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려고 불법과 비리를 거침없이 저지르는 것을 보아도 소유는 인간의 마음을 좀먹는 마약과 같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모든 악의 근원이 소유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소유는 아주 잘 다루어야 할, 깨지기 쉬운 유리잔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소유를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로 살 수만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인생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에서 산다면 무소유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충분히 소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소유가 나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진정한 소유의 목표는 존재의 목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소유에 대해서도 장기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유가 나를 소유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입니다.
10년 후에 부장 또는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도 소유입니다. 넓은 정원에 아름다운 정원수와 잔디가 깔린 전원주택이나 별장고급 승용차도 소유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법고시 합격이나 MBA학위 취득도 소유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소유물들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유의 목표가 워낙 강력하게 마음을 끌어 당기기 때문에, 더구나 그런 것을 조장하는 각종 광고물과 언론매체와 서적들 때문에, 그리고 감성과 이목을 중시하는 풍조 때문에 존재의 목표는 최근 들어 급격히 그 가치가 저하되고 있습니다
. 소유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한 꺼풀 들춰보면
,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과는 반대로 존재가 소유를 결정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사유가 곧 소유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목표란 자기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들어 가는 목표입니다. 영혼의 능력을 발휘하는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깊이와 넓이만큼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사고력 또는 해석체계를 확장하는 것만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목표를 세우세요


존재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운다면
, 사람, 자연, 시간 그리고 현상에 대한 해석체계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사물을 보다가 장성한 후에는 어린 아이의 생각을 점차 버리는 방식입니다. 세상을 불투명하게 보다가 보다 더 투명하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식체계와 해석체계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       무기력과 절망 속에 있던 모습에서 용기와 열망의 불꽃을 지피는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봅니다.

-       부정적인 언어습관과 제한적 신념들이 긍정적으로 변화됩니다.

-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존심과 질투심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인내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       불안과 초조감을 일으키는 환경에서도 마음의 안정과 고요한 평화를 느낍니다.

-       어떠한 소유물도 자신의 존재를 흔들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존재양식으로 스스로를 바꿔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것이 소유의 목표를 달성해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소유의 목표까지 자연스럽게 성취하게 됩니다.


소유는 죄악이라는 생각과 소유는 만능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생각에서 우리는 종종 헷갈립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둘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수도원의 수도승이 아닌 한, 소유 없는 존재가 불가능하며, 존재 없는 소유는 무가치하거나 해악을 끼칩니다. 소유의 목표와 존재의 목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아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장기목표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그 목표를 향한 자신감으로 서서히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존재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소유의 목표는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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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