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과는 관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문헌들이 몇 권 있습니다. 관리에 대한 패러다임을 다르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문헌들이죠.

그 중에서 오늘은 『성과관리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꿔라』(Catalytic Coaching, 개롤드 마클 지음, 갈렙앤컴퍼니 옮김, 교보문고 2007)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했던 이용석 상무(현재는 삼천리 그룹의 기획담당)가 번역 출판했습니다.

 

『성과관리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꿔라』(Catalytic Coaching, 개롤드 마클 지음, 갈렙앤컴퍼니 옮김, 교보문고 2007)

 

지식사회가 되면서, 성과에 대한 객관적 측정과 평가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계량화할 수 있는 성과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성과일수록 오히려 계량화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성과측정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성과평가방식은 외려 점점 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뚜렷한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사학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과를 관리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도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개롤드 마클(Garold L. Markle)이라는 컨설턴트입니다. 인사부문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지금은 코칭, 교육, 컨설팅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다면, 우리의 성과관리방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내가 경영대학원의 MBA 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교재로 읽힌 적이 있는 데, 당시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였던 학생은 이 책을 읽고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죠. 그는 기존의 성과관리방식이 회사에 너무나 견고하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성과관리를 코칭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에 큰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죠.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같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인사관리가 바뀐다는 것은 인간관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성과관리가 바뀌려면 성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번역도 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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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여러 차례, BSC가 전략실행을 위한 강력한 관리수단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종의 management tool입니다. 강력한 관리수단을 필요로 하는 경영자들에게 어필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BSC를 채용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캐플란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 박사는 인사문제의 전문가들이 아니고 회계학과 기업전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기업의 전사적 성과나 역량에 관한 관리수단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변의 인사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협력하여 BSC개념들을 확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기업의 성과와 전략을, 그리고 조직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양사상의 뿌리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세계에 대한 관리주체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맺음(connectedness)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사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관리의 개념은 유대기독교 사상, 즉 구약성경 창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도록 최초의 인간에게 위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질서한 세계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서로 조화롭게(다른 말로 하면 질서 있게) 잘 자라고 유지되도록 돌봐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서구인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은 동양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불교와 유교에 영향을 받은 동양인에게 세계란 서로 관계를 맺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주체(subject)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서구인들에게 세계란 다스려야 할 대상(object)이었습니다. 모르는 세계가 있다면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대상과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아 다스렸지만, 일상적인 관리의 대상과 방법은 계명과 율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상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정했습니다. 심지어 피해액을 정확히 계산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는 것까지 정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정신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런 계명과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힘의 외교를 하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가치와 신념으로 타인과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계명과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존의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복음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선악을 문제 삼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포도원 일꾼의 비유>, <달란트 비유> 등과 같은 주옥 같은 비유를 통해 사랑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겉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면서, 속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에 대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관리의 대상과 방법을 완전히 전복시켰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사회의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바람에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관리의 대상은 타인이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했고, 관리의 방법은 법규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가르침이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간단했지만,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법은 위선을 조장할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겉으로는 법을 지키면서 내면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BSC는 성과관리 또는 전략실행의 수단으로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규정합니다. 하지만, 법이 위선을 조장하는 것처럼, 이런 규정은 주인의식의 결핍을 면책시켜 줄 뿐입니다. 조직원들은 평가에 유리한 것들을 성과지표로 설정하거나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목표수준으로 정합니다. 주인의식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표와 목표를 정하고, BSC의 매뉴얼에 맞춥니다. 여기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영자나 혁신담당자들은 경영목표(숫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줍니다. 이것을 톱다운 캐스케이딩(top down cascad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직원들은 위에서 내려준 숫자에 맞춰서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창의성과 주인의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조직 내에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됩니다. 경영자들은 로봇 같은 조직원들을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보상과 처벌에 의한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을 강구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과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에 대한 보상의 차이와 처벌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류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영향은 아직까지 경영학의 여러 분과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보상에 의한 인간의 행동수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논의는 <돈은 인간의 정신을 왜곡한다>에서 간단히 포스팅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의 충격적인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을 BSC와 같은 규정화된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고 관리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도록 창조(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오직 서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과부, 고아,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인간을 품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사상이 지난 2000년 동안 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기독교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유일신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유일신 개념은 다른 세계관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이런 배타성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정복하는 과정은 유대기독교 근본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지만, 유대기독교 사상은 이런 착취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 확립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가 줄어들었지만, 음성적으로는 여전히 착취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기득권자의 약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여 <테일러리즘>에서 <MbO>를 거쳐 <BSC>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기득권층의 질서유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사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경제적 부가 곧 신의 축복으로 인식되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개신교 윤리의 세속화>라는 제목으로 이미 포스팅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기득권층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노동통제의 내용과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린이 노동금지, 근로시간의 제한, 노동조합의 결성 등과 같은 근로조건이 현격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관리의 수단이 점차 정교해졌고 모든 것을 측정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BSC가 개발되었고 많은 경영자들에게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직에 적용했을 때, 조직원들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됩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지 매우 의아해합니다. 기업이익을 위해 인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관리이데올로기(management ideology)와 인간정신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실존(human existence)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녀를 길러보신 부모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부모들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아이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의 뜻대로 관리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장성한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녀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관리의 대상으로 자란 자녀들은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이 억압되어 후일 장성해서도 자신의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기대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육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조직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BSC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이제 결론 삼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관리할 수 있을까? 물론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관리대상자에게 노예의식을 심어줍니다. 타인을 관리하려는 관리자는 타인을 자신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예속된 인간에게는 자발성과 창조성 같은 주인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원을 강력하게 관리하는 수단인 BSC는 오히려 조직을 점차 병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l  맥도날드는 맛을 계량화해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l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경영진의 입장에서 계량적 지표가 필요한 게 현실 아닌가?

l  사물을 측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l  그렇다면 경영자의 입장에서 관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의 계량화와 측정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약한 매운 맛을 가미한 비빔밥을 참 좋아합니다. 비빔밥에도 약한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을 넣어 비비면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청양고추장 같은 강도가 높은 고추장을 넣는 경우에는 비빔밥을 실패합니다. 딸꾹질이 날 정도로 강한 매운 맛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운맛을 정확히 측정하고 등급화하여 번호를 매겨서 어느 식당에 가도 동일한 맛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매운맛도 철저히 측정하고 관리했으면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측정과 관리의 합리화를 거쳐야 합니다. 경영진은 이런 계량화된 지표를 활용하여 경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갑순은 75점짜리 인생이고, 홍길동은 80점짜리 인간이라고 점수를 매기거나 등급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정신이 삽시간에 상품화되겠지요. 이런 짓은 인간의 영혼에 심대한 상처를 입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내가 영국 리더풀을 여행하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노예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었다는 역사를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노동시장이라고 이름 붙인 노예시장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진척되면,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꿈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상품화하려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사물에 대한 측정과 계량화 노력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에 있어서 사물과 인간 사이에 뚫을 수 없는 방어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을 관리하려는 의도와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상사는 부하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하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상사는 이미 리더십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리더십의 결여는 관리를 부릅니다. BSC같이 부하를 강력하게 쫄 수 있는 관리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리더십이 아닌 관리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리더십에 대해서는 이미 몇 꼭지를 쓰긴 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리더십과 관련된 주요 포스트

  • 2008/12/05 욕망하는 인간
  • 2008/10/27 비전(vision)수립
  • 2008/10/21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 2008/10/21 리더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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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오늘은 BSC의 전략에 관한 문제점을 검토하겠습니다. 기업경영은 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전략 없는 경영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전략(strategy)이라는 용어가 경영학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도 20세기 중엽에서부터였으니까, 고작해야 40~5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개념의 변천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략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전략이란 어느 한 조직을 경쟁우위에 서도록 포지셔닝시키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업이 어떤 산업에 참여해야 하는가, 어떤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 자신이 보유한 자원들을 어떻게 할당해야 하는가의 의사결정과 관련된다. 그리고 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고객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주주들과 여타의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코렐리스 클뤼버, 조 피어스 2(2007), 송재용 외 옮김, 전략이란 무엇인가?, 3mecca, 23]

     

    전략적 사고는 지난 수십 년간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산업(industry)의 중요성과 제품(product)의 품질을 강조했고, 자원(resource)과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이 각광을 받았다가, 최근에는 기업의 비전(corporate vision), 가치(value), 신념(belief) 등 인적자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전략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전략계획과 전략실행은 기업의 장기적인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전략이란 그저 운명에 불과하다고 보는 비관론입니다. 전자는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교수처럼 경영전략론을 가르치는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지만, 후자는 스탠포드대학의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교수처럼 전략이란 고작해야 사람의 문제에 종속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인사조직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입장인가? 전략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후자에 속합니다. 기업의 성패는 소위 운칠기삼”(運七技三)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의 전략적 요소가 3할 정도라면, 성공할 것인지의 7할 정도는 행운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결국, 기업의 성패는 전략에 따라 좌우된다기보다는 구성원의 마음가짐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전략적 방향에 따라 커리어를 설계해서 그대로 실천해 온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멀리 보면서, 매순간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기업의 현재 위치를 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거에 세웠던 전략계획을 잘 실행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기업가의 직관적 판단과 구성원들의 헌신, 그리고 외부환경의 우연한 도움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공한 기업가들과 학자들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인텔의 전략수립을 이끈 앤디 그로브의 역할은 미래를 미리 내다보았다기보다, 전략적 중요성을 먼저 깨달았다는 점이다. 인텔에게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하는 행운이 왔을 뿐 아니라, IBM PC 디자인에 참여하게 되는 더 큰 행운이 주어진 셈이다.”
    [
    제프리 페퍼, 로버트 서튼(2009), 김용재 옮김, 증거경영,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88]


     

    인텔이 성공한 것은 전략수립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수립된 전략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굴러들어온 우연한 행운을 놓치지 않고 이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던 회사의 역량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BSC는 전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BSC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관리원칙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습니다.[로버트 캐플란, 데이비드 노튼(2009), 웨슬리퀘스트 옮김, 전략실행프리미엄, 21세기북스, 13쪽 참조]

    1.
    경영진의 리더십을 통해 변화를 활성화하라
    .
    2.
    전략을 운영적 용어로 구체화하라.
    3.
    조직을
    전략에 정렬시켜라.
    4.
    동기부여를 통해
    전략을 모든 사람의 일로 만들라.
    5.
    전략을 지속적인 프로세스로 만들라.

     

    BSC는 이렇게 전략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가히 전략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략을 중시했습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전략계획의 수립에 집중했으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전략의 실행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BSC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기업의 전략실행이 성과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는 행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비우고, 과연 전략기획과 전략실행이 기업성과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냉정하게 살펴봐야 할 때입니다. 몇몇 연구결과에 의하면, 전략과 기업성과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낮게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략이 재무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일치된 견해를 찾을 수 없으며, 전략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평가했거나 기업성과에 영향을 준 다른 우연적 요인들을 전략적 요인들과 구분하지도 않았습니다.[제프리 페퍼, 로버트 서튼(2009), 김용재 옮김, 증거경영,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78~281쪽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이 중요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위 "경쟁세력 모델"(five forces model)을 개발했습니다. 장기간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현상을 산업구조과 업종구조가 가지는 특성과 연관 지어 설명했습니다. 디지털화 시대에 타자기와 필름카메라를 만들어 파는 회사는 아무리 용을 써도 실패하는 업종인 것은 분명합니다. 포터 교수는 어떤 기업이 특정 산업 또는 업종에서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장기간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 진입장벽의 보호 때문이었는지, 제한적 경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산업구조 특성 때문이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려 했습니다.

     

    그래서 업종이 좋아야 회사가 성공한다.” 또는 위치가 좋아야 이익이 많다.”는 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사양산업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위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사양산업 내에서도 높은 성과를 내며, 같은 위치에 있는 회사라도 경이적인 이익을 장기간 창출하는 경우를 포터의 경쟁전략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특허도 없고 진입장벽도 없는 회사가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전략개념이 아닌 다른 패러다임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우스웨스트항공사와 월마트, 그리고 약품소매체인인 월그린즈의 성공적인 사례는 기존의 전략개념으로는 설명이 곤란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물론 포터는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그 후에는 개별기업의 경쟁우위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소위 밸류체인(value chain)개념을 만들어서 사용했지만, 이것 역시 기업 내 여러 기능들의 인과관계 또는 상관관계를 묶어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전략컨설팅회사들이,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기업들에게, M&A를 통해 인근 산업으로의 진출을 검토하도록 조언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식의 컨설팅을 통해 M&A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이 많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일부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상당부분 실패했거나 당초의 기대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략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어의 사례>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비상장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업계 1위인 SAS연구소의 존 샐(John Sall)고객과 조직원들이 말해주는 것을 듣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진실을 들어주는 것이 똑똑한 제안보다 더 낫고, 굉장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전에 고객과 직원에게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제프리 페퍼, 로버트 서튼(2009), 김용재 옮김, 증거경영, 국일증권경제연구소, 302쪽 참조]

     

    많은 경영자들이 자신의 회사에 경영실적이 떨어지면, 전략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전략을 세워서 실행에 옮기면 실적이 좋아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기대했던 대로 회사가 움직이지 않으면, 또 다시 다른 전략으로 옮겨갑니다. 말하자면, 고객중심 경영전략을 실천하다가 실적이 오르지 않으면 비용절감 전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제품전략, 가격전략, 마케팅전략, 고객서비스전략, IT전략, 유통망전략, 인재전략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이전에 수립한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저 필요한 대로 전략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입니다.

     

    사우스웨스트항공사의 CEO였던 허브 켈러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전략적 기획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낭비다. 석 달 걸려서 무엇인가를 생각해 낸 다음, 경영진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는다. … 우리는 한 가지 일에 정신을 놓고 몰두하지 않는다. 거기에 빠져서 정신이 나가버리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제프리 페퍼, 로버트 서튼(2009), 김용재 옮김, 증거경영, 국일증권경제연구소, 310]


     

    이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요약해봅니다. BSC, 성공하는 기업들은 전략계획이라는 것이 미리 확고하게 세워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강력하게 실행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고안된 개념입니다. 그런데, 전략계획이 확정적으로 수립되어 있다 해도, 그 전략을 실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는 계획 자체의 무수한 변형을 요구합니다. 현실적으로도 무엇이 전략주제(strategic theme)이고 무엇이 전략요소인지 잘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략실행의 강력한 수단으로 개발된 BSC는 도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사실 별로 쓸 데가 없습니다. 기업가와 경영진들의 리더십 결여를 화려하게 포장해 주는, 그래서 그들의 불안심리를 해소해 주는데 약간의 쓸모가 있을 뿐입니다. 조직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숫자로 쪼아댈 수 있는 강력한, 그러나 전혀 비효율적인 수단으로 쓰일 뿐입니다. 그렇게 쓰게 되면, 회사는 서서히 골병이 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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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내가 어느 금융기관을 자문하고 있던 시절의 경험을 소개해야겠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이라 사건의 경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요지는 그 회사의 임원 중에 한 사람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여인이 회사 인사부서에 찾아와서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하여 자녀까지 있는 임원에게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사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연히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자문을 구해왔습니다. 그리고는 즉각 퇴출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회사의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장문의 자문의견서를 보냈습니다. 해고를 할만한 사안은 아니며, 필요하다면 가벼운 경고로 충분하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 외도한 것을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저버렸다고 해서 그것을 함부로 공적 영역에서 다루려고 하면 안 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다고 해서 직장에서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문제는 공적인 일로, 사적인 문제는 사적인 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이런 의견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기업도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했던 사람이 파렴치범을 싸고 돈다는 것이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뭘 얻어먹겠다고 파렴치범을 감싸고 돌겠습니까. 소문이라는 것은 무섭죠. 일단 소문이 그렇게 나면, 나는 파렴피범을 싸고 도는 사람이 돼 버립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그 진실을 알게 됩니다.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의 사회적 기대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경우에 한하여 공적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싸움이라도 사적 폭력이 가해지면 공적 영역(예를 들어 경찰)이 개입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논리를 이제 그 사건에 비추어 보면, 내연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적 관계가 회사의 공적 영역에 어떤 손실을 가져왔는지를 따져서 그 손실에 해당 되는 만큼 징계처분을 내리는 것이 적당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 손실이란 사실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회사입장에서는 금융기관의 임원이라는 자리는 막중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그리고 윤리도덕적인 흠결이 공적인 영역에서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외부인이 인사부서에 찾아와서 큰소리가 나게 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큰 손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인사위원회를 열어 직위해제라는 중징계 조치를 취했습니다. 소위 뽄떼를 보인 것이죠.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당사자가 직접 연봉을 삭감해도 좋으니 직위해제라는 불명예스런 조치는 취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회사에 했다는 점입니다. 돈보다 명예를 중시한 것이죠. 나중에 그는 직위를 회복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쪽팔림이라고 합니다.

     

    지난 번에 썼던 포스트에서 한국은행의 조직개혁을 담당했던 사람들에게 당시 한은의 박철 부총재가 “돈 몇 푼 가지고 사람들을 치사하게 만들지 말라”고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정말, 돈 몇 푼 가지고 사람을 치사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삼가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어느 정도 성숙한 수준에 올라서면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게 됩니다.

    법과 원칙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경영하는 사람들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재판관들도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껌 하나라도 받아 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껌이라는 하찮은 것이라도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망신주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대신 공적으로 해악을 끼친 경우에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과자들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지요. 껌 한 톨 받아 씹는 것도 엄청난 불명예인 줄 아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전과자라는 공적인 "쪽팔림"을 당하고도 버젓이 공적 영역에서 활개치는 사회는 분명 정신이 건강한 사회는 아닙니다.

     

    끝으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조직 생활에서 명예가 실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제도가 설계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평가결과가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급여가 차별화 되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100미터 달리기에서 꼴찌 했어도 쪽팔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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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미국 경영학의 기초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여 합리화하고자 했던 <테일러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테일러보다 계량화에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인물이 <맥나마라>였습니다. 그는 자동차회사의 경영진으로, 국방장관으로, 세계은행총재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이상을 데이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합리적 사고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과지표(performance indicator)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를 통해 관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숫자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항상 의미가 붙어있다

     

    성과지표를 스코어로 매길 수 있도록 숫자화하는 데에는, 숫자가 주는 강력한 힘에 대한 믿음과 지표의 객관성을 높여준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숫자가 주는 마력에 빠집니다. 그리고 숫자는 객관성을 갖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있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숫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똑 같은 숫자라도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냉장고를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과 똑 같은 냉장고로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이 있다고 칩시다. 숫자로 보면, 똑 같습니다. 둘 다 똑 같은 성과를 올렸으므로 회사입장에서는 똑 같이 취급해야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에는 결코 똑 같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 있습니다. 만약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은 강남의 압구정동에서 올린 매출이고,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은 달동네에서 올린 매출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똑 같이 취급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단순화시킨 사례지만, 어떤 경우에도 숫자에는 무수히 많은 가치와 의미들이 붙어 있습니다.

     

    시험 성적이 95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잘 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모든 학생들이 100점을 맞았는데, 95점을 맞은 것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평균점수가 70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의미일까요? 평균점수가 98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뜻일까요? 헷갈리죠?

     

    전교 석차 3등은 또 무슨 뜻일까요? 잘 한 것일까요? 못한 것일까요? 10명중에서 3등과, 100중에서 3등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다른 학교학생까지 합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전국적인 석차로는 어떨까요? 아니면 다른 나라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어떻게 될까요? 부자촌 학교의 3등과 농어촌 학교의 3등은 어떨까요? 족집게 과외로 무장한 학생의 3등과 소녀가장의 3등을 비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헷갈리죠?

     

    그래서 통계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통계학은 사물을 숫자로 전환하여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거꾸로 통계학은 숫자에 붙어있는 각종 의미를 떼어내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은 통계학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학문이 되었습니다. 고객만족도, 투표성향, 직원충성도, 환자의 완치율 등과 같은 것은 모두 통계학에 의존하는 지표들입니다.

     

    그런데, 통계학은 어떤 대상이 숫자로 전환되지 않으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숫자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때 몇 가지 사항을 가정합니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 보죠. 운동장에 모인 사람 수를 세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가정이 필요합니다. 모두 300명이라고 한다면, 남자만 그렇다는 얘긴지? 성인만 그렇다는 얘긴지? 아니면 어린이도 포함된 것인지? 어린이를 포함한다면 몇 살까지 포함시킬 것인지? 임신중인 태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경제조회사 직원은 안경 쓴 사람만을 셀 것이고, 산부인과 의사는 가임 여성만을 셀지도 모릅니다. 계산하는 목적에 따라 숫자는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통계학자 데밍(W. Edwards Deming, 1900~1993)은 이 세상에 참값(true value)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험적 관찰에 의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측정절차나 관찰의도에 따라 새로운 숫자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숫자로 전환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미가 삭제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그 숫자를 나타나게 한 가치기준 이외의 모든 가치를 생략해 버립니다. 오로지 그 가치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좌우간 숫자로 전환해서 통계학의 기법들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통계학을 필수로 공부해야 하며, 통계수치를 통해 사회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통계학적 기법을 통해 처리된 모든 숫자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

     

    그래서 경영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슈들을 숫자로 전환하여 통계적인 처리를 거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온 숫자라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근대계몽주의가 뿌린 사상적 전통입니다. 오늘날 합리화의 전제는 모든 사태와 현상과 사물을 계량화를 통해 숫자로 표현해야 하고, 그 숫자를 통계적 기법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BSC는 매우 합리적인 수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BSC수단의 합리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을 세밀히 관찰했던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합리화(rational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합리화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입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이것을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구분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BSC는 수단의 합리화 장치입니다. 따라서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수단이 목적을 바꾸어서는 안 되며,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BSC라는 수단이 워낙 경영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다 보니(다른 말로 하면 컨설턴트에게는 돈벌이가 되다 보니), 목적을 잃어버린 채 BSC 자체의 정교화에 노력을 치중해 왔습니다.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는 1996년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된 『BSC: Measures that drive performance』에서부터 2006년의 『Alignment』에 이르기까지 목적합리성보다는 수단합리성을 정치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BSC개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 것이죠. 1990년대 초반에 개념화된 BSC는 이제 기업의 목적과 이념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하면서 숫자로 목적과 수단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노력과 투자에 비해 그 효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BSC에서는 목적의 합리성을 명확하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더 물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정직하게 제기해야 할 때입니다.

     

    BSC가 수단의 합리화 장치라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BSC에는 그것이 재무적 이익임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무적 이익을 위해 고객, 내부프로세스, 구성원의 학습과 성장을 고려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묻겠습니다.

     

    기업에서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 인간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물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연료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는 연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재무적 이익이 없으면 생존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닙니다.(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기업을 세운 것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한 투자자들의 몫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누가 기업을 하겠는가? 반론의 소리가 내 귀에 쟁쟁거립니다. 그런 목적으로 기업을 세웠다 해도 일단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은 사회적 현상입니다. 바로 여기서 피터 드러커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드러커는 이익의 지평을 넓힌 사람입니다. 기업의 이익이란 투자자의 위험프리미엄, 진부화에 대한 재투자비용, 사회적 공헌 등과 같은 협동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기업에서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후일 상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재무적 이익, 연료, 물은 모두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BSC는 기업의 존재목적이 재무적 이익인 것으로 가정하여 고안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BSC의 개념을 그대로 밀어붙이면 기업의 재무적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처럼 구조화되었습니다. 재무적 이익을 위해 구성원을 쥐어짜는 방식의 경영은 결국 구성원의 능력과 행복을 감퇴시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재무적 이익에 몰입하는 것은 곧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리는 셈이 됩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소수의 빗나간 행복추구를 위해 다수의 불행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재무적 이익을 추구할수록 재무적 이익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월 스트리트가 온갖 계량화된 기법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결국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재무적 이익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성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BSC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재무적 이익을 얻으려는 수단의 합리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박사는 이것을 의도의 역설”(paradoxical intention)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의도는 그 의도를 강렬하게 드러낼수록 그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프랭클 박사가 나치시절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존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떨립니다. 면접시험을 잘 보려고 애쓸수록 정작 인터뷰할 때는 머리가 하얗게 바뀝니다. 주식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돈을 잃습니다.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회장을 역임하셨던 윤병철 회장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네발 가진 짐승과 같아서 두발 가진 사람이 좇아갈 수 없다.” 오랜 기간 금융인으로 존경 받는 삶을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되새겨봐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그 결과로 돈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나는 BSC를 도입한 기업과 관료조직에서 소위 마음의 2중 장부가 쓰이고 있는 상황을 자주 보았습니다. BSC의 성공여부는 최고경영층의 이해와 관심에 달려있다고 했기 때문에(하기야 어떤 일이 최고경영자의 이해와 관심이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 BSC도입을 담당하는 혁신담당자들은 윗선의 힘을 빌어 현업부서를 BSC형식에 맞추어 숫자를 보고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면 현업부서에서는 형식에 맞는, 그러나 큰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정도의 숫자를 꿰 맞추어 보고합니다.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도덕적 감정이 굳어버립니다. 세상은 다 이런 거야! 다른 방도가 없잖아! 해달라는 대로 해줘! 스스럼없이 자포자기 하고 제도에 순응하여 살아갑니다. 점점 영혼의 능력을 잃어갑니다.

     

    숫자는 스스로 만들어 냈을 때 의미를 갖습니다. 외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의해 만들어진 숫자는 마음에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숫자 자체가 발산하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영혼과 실존을 통해 발산되도록 해야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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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BSC에 관한 글을 쓰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내가 잘 아는 패키지공급업자들과 컨설턴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못쓰고 있었습니다. 소위 BSC전문가라는 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도 인간적으로 친한 사이입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대략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계량화 하지 않고 어떻게 기업경영을 한단 말인가?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2.  올바른 KPI를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KPI로 관리하겠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지 않은가?

    3.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략을 세워서 강력하게 추진해도 될까말까 한판에 무슨 영혼이니 실존이니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가?

     

    미국 경영학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이라면, 캐플란의 BSC개념이 드러커의 MbO를 테일러리즘으로 둔갑시킨 것이라는 점을 금새 알아챘을 것입니다.



     

    캐플란과 노튼의 주요 저작들

    나는 계량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이지는 일은, 계량화와 KPI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나아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타율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구성원들이 KPI의 노예로 전락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구소련에서 그 폐해가 입증된 집단농장식 관리방법 BSC개념을 통해 도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 구소련에서처럼 무자비하게 내려 찍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스마트하게 진행된다는 표면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것이 뒤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숫자를 지배하도록 해야지, 숫자가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나면, 누구나 스스로 어떤 사물과 현상이 어떤 지표로 어떻게 관리되는 것이 좋은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compelling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을 불어넣는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없는 경영진들은 숫자로 쪼는 방식이 가장 쉽고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쪼는 방식의 관리(Screwing by Number)를 반복하는 것이죠. 나는 실무에서 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라는 그물을 씌워서 그 틀에 가둬버리는 현상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리하라는 말인가?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는 어떤 규정이나 KPI로 가족구성원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순간 고민하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규정도 없고 성과지표로 관리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각자 자기역할을 알아서 합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직장에 가면 왜 그렇게 많은 규정과 성과지표의 틀로 옭죔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업에서 각종 규정과 성과지표를 설정하기 전에, 그게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명백해진다면, 다시 말해 매력적인 비전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숫자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학생은 목표하는 성적을 위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원하는 매출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전략을 실천해 갈 것입니다. 학자는 구체적인 연구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예술가는 언제까지 어떤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숫자는 이때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쓰이는 숫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위로부터 강제로 배분된 숫자와는 완전히 다른 숫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세요. 매력적인 비전을 상실한 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당근에 대한 탐욕에 시달립니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당근과 채찍의 타율적인 통제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BSC가 그 도구로서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개념을 만든 사람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에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공산주의 집단농장체제와 다를 것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David P. Norton) 박사는, 인간이 영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한 BSC개념은, 마치 비행기조종사가 코크핏(cockpit)에서 비행고도와 항로를 조절할 수 있듯이, 경영진 몇몇 사람이 조직구성원들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고 믿게끔 하고 있습니다. 컨설턴트들은 실제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구성원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 또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곧 자본인 셈이죠. 인간은 돈이라는 숫자로 전환되어 관리됩니다. 인간이 대상이고 수단이고 자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통계적 기법과 공학적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계량화와 합리화의 대가로 일생을 살아왔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90세를 앞두고 생애 말년에 가서야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합리성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Rationality will not save us.)

    The Fog of War: Eleven Lessons From the Life of Robert S. McNamara, 2003 참조


    정교하게 합리화된 도구로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려는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인간의 정신은 합리성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BSC는 올바른 인간관에 기초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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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1990년대 초반 BSC(Balanced Scorecard)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Scorecard라는 단어는 계량화에 익숙해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균형 잡힌”(balanced)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람들은 주목했습니다.

     

    특히, 당기순이익과 같은 재무적 성과지표에만 몰두하던 경영진에게 다음과 같이 다양한 성과지표들 간에 상호 균형을 유지시켜준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ü  재무적인 성과지표(매출액, 순이익 등)비재무적인 성과지표(이직률, 고객만족도 등) 사이의 균형

    ü  장기적인 성과지표(경영진의 역량과 헌신, 직원들간의 신뢰 등)단기적인 성과지표(자본이익률, 시장점유율 등) 사이의 균형

    ü  내부적인 성과지표(직원만족도, 경영참여도 등)외부적인 성과지표(고객충성도, 신시장개발 진척도 등) 사이의 균형

     

    이런 균형을 갖출 수 있도록, 하버드대학에서 관리회계학을 가르치던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1940~)교수와 컨설턴트였던 데이비드 노튼(David P. Norton)은 자신들이 고안한 BSC개념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전략지도(strategy map)로 표현했습니다.

     

    BSC의 핵심인 전략지도의 예, 네 가지 관점이 연쇄고리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다양한 지표들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네 가지 관점으로 표시됩니다. "재무적 관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고객 관점"이고, 고객관련 지표들은 다시 "내부프로세스 관점"을 통해 지원됩니다. 내부프로세스는 구성원의 "학습과 성장관점"에 의해 합리화됩니다.

     

    재무적 성과를 위해서 고객관계와 내부프로세스를 개선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구성원의 학습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점에서 연계고리는 매우 논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과관계(causal relation)모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BSC에 열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에서도 BSC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이 과연 이런 성과지표들의 논리적 연계고리를 따라서 움직일까요? 고객만족도를 높이면 과연 재무지표들이 좋아질까요? 직원들의 학습의욕이 높아 열심히 배우고 성장하면 내부프로세스가 효과적으로 개선될까요? 큰 예산을 들여 IT인프라를 깔면 내부프로세스가 개선되어 고객이 더 좋아하게 될까요?

     

    오히려 거꾸로 되는 것은 아닐까? 이익을 많이 내서 직원만족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직원들의 학습의욕이 넘쳐 IT인프라를 개선하게 되는 경우는 없을까? 시장점유율이 높아져서 고객불만율이 낮아진 것은 아닐까?

     

    인과관계란 빈약한 논리의 고리일 뿐이다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가능성을 몇 개의 지표로 논리적 연쇄고리를 만들어서 활용하는 것은 삽시간에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조직 내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상호작용하고 있기도 하고,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한 덩어리로서 "한데 얽혀 있음"(entanglement)으로 표현하는 게 옳습니다.

    조직의 요소들은 개념으로만 분리되며, 실제 현실에서는 관리할 수 있는 어떤 요소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환상일 뿐입니다. 조직은 그 자체로서 전체이며, 조직의 여러 요소들 또한 그 자체로서 전체입니다.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인 셈입니다. 기업경영에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여 인과관계로 따로따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또한, 조직 내에서는 대개의 경우 여러 변수들 중에서도 계량화가 불가능한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단순한 숫자들의 연계고리는 현실을 거의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 동안 나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그렇습니다. 나는 90년대 후반에 BSC를 처음 접했을 때, 매우 합리적인 모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몇몇 기업이 BSC를 도입하여 운영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사회적 관계나 현상을 논리적 인과관계의 연쇄고리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BSC를 굳이 활용한다면, 배우는 학생들에게 기업경영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쉽도록 가르치는 시뮬레이션 도구로서 괜찮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업현장에서는 BSC를 지극히 제한적으로 응용할 수 있으며,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BSC가 일시적 유행(fad)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가긴 했지만...

     

    그 후로 컨설팅을 하거나 자문을 할 때 이 문제를 거론하곤 했습니다. BSC의 유용성과 그 한계에 대해도 가르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봤습니다. 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BSC열풍이 불어서 너도 나도 도입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도 이것을 도입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는 많은 경영자들이 자신의 리더십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이것저것 좋다는 경영기법을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마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신비의 약초를 다려먹는 것과 같은 현상이 한국기업계에 퍼졌습니다. 정부부처에 이 기법의 도입을 강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야 혁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습니다. BSC가 관료조직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묻고자 합니다

    BSC
    를 도입하기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보고형식과 문서가 달라진 것 외에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입니다.

     

    지난 10년간을 회고하자면, BSC의 열풍은 이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BSC를 깔아 놓고 실행해 봐도, 그렇게 강조하던 BSC의 효능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SC만큼 그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모형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검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BSC개념이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대개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은 계량화할 수 없는 것에 비해 그 가치가 낮습니다. 예를 들면, 조직구성원의 정직성과 그들간의 신뢰관계는 비용과 매출액을 좌우하지만, 비용과 매출액이 정직성과 신뢰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BSC는 그 속성상 낮은 가치의 숫자들이 높은 가치의 정신을 통제하는 잘못된 현상을 초래케 합니다. 경영진이 원하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정직성과 신뢰관계를 저버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잡아 준다고 약속했던 BSC는 오히려 숫자와 정신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케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스템이론가이자 인류학자였던 그리고리 베잇슨(Gregory Bateson, 1904~1980)은 이런 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순환(혹은 그 이상으로 복잡한 것)을 이룰 때 그 연쇄를 무시간적인 논리로 바꾸어 기술하거나 지도화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순수한 논리로는 처리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레고리 베잇슨, 박지동 옮김, 『정신과 자연』, 까치 1990, 78쪽 참조




    p.s 나는 이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매우 찜찜합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컨설턴트들이 BSC를 기업에 깔아주면서 돈을 벌고 있고, 숫자화된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가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BSC개념과 KPI들이 기업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인간의 영혼과 실존성은 결코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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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미국에서는 CEO의 평균 수명이 약 18개월이고, 한국에서도 4년 안팎이라고 합니다. 중간관리자들도 이직률이 높습니다. 바람직한 것입니까? 자세한 내용은 <인재전쟁 인터뷰>에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인터뷰과정을 개인 캠코더로 찍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보다는 인터뷰내용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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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미국식 성과주의, 단기성과에 급급한 인재관리 시스템이 서브프라임 사태와 월 스트리트의 붕괴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세한 것은 <인재전쟁 인터뷰>에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인터뷰과정을 개인 캠코더로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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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비전, 목적, 방향이 정립되고 조직이 구조화되고 난 후에는 조직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성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성과지표(indicator)가 아니라 성과(performance)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출물(output) 또는 최종성과(outcom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과(成果)라는 용어는 자원의 투입과 변용과정, 그리고 결과물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과와 성과지표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과지표가 곧 성과가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성과지표는 성과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과지표가 아닌 성과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어렵고 논란이 많은 작업입니다. 그래서 성과관리에 관한 수많은 이론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이론을 선택하느냐가 조직의 성과향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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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