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습니다. 어느 현직 교사가 교권이 무너진 초등학교 교실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그것이 신문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나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런 현상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권이 무너진 초등학교 교실의 실상을 폭로하며 '체벌 허용'을 주장한 현직 교사의 책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서래초 영어교과 전담교사 김영화(55)씨가 쓴  『지금 6학년 교실에서는...』이다. 야단치는 교사에게 아이들이 욕하고 대들면서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현실이 소설형식으로 묘사돼 있다.

 

보도가 나간 뒤 기사와 관련된 e-메일과 전화, 인터넷 댓글 등이 쏟아졌다. “잘못하면 때려야 한다” “교권은 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는 등 체벌을 둘러싼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초등교사 경력 34년째라는 정모씨는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와기사 내용이 바로 내 얘기라면서정말 울고 싶고 하루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이달 초 2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2학년인 딸과 함께 귀국했다는 이은주씨도 메일을 보냈다. “며칠 학교에 다녀 보더니 아이가 수업시간에 떠들고 자는 학생이 너무 많아 놀랐다고 말한다. 야단친 교사 뒤에서 교사가 들을 만한 큰 소리로 욕을 계속하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안에서 생활 태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Back to the basic! (기본으로 돌아가라!)

교육은 학생들의 태도와 행동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어떤 경우에도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교육의 목적이 옳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주장은 오죽 했으면 그러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정도로 한국의 교육상황은 참담한 형편입니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면 체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벌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체벌은 비인격적이고 수치심을 유발하며 정신의학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학교와 사회의 경쟁지향적인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경쟁적인 상태가 되면, 이기심이 발동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줄어듭니다. 공감능력이 줄어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을 못할 뿐 아니라 전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터득하여, 자연스럽게 공격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협동하며 함께 일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합니다.

 

학생들의 공격성은 경쟁지향적 교육행정과 사회풍토가 만들어낸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적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 인간으로 대접 받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험성적으로 경쟁심을 유발하게 하면, 시험성적 이외의 가치에 대해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성(integrity)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며, 그 위에 사고력(thinking power)과 실행력(execution power)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기본을 잃어버렸습니다. 교사 한두 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선진교육을 실행한다고 인정되는 국가에서 시험성적순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서열을 매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교육의 목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육현장의 모든 초점은 시험성적이 아니라 독특하게 타고난 각자의 재능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항상 협력과 상생의 정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면서 교직사회에도 경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행태는 교육의 기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교육행정입니다. 교육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교사들에게 돈으로 차별화함으로써 교육행위의 동기부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교육행정에서 나는 매춘의 냄새를 느낍니다. 나에게 이것을 해주면 나는 너에게 저것을 주겠다는, 마치 매춘부에게나 강요하는 듯한 정책으로 피폐해진 교육현장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에 돈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개입하면 그 상황의 본질이 왜곡됩니다. 그러므로 교육에는 어떤 경우에도 돈이 개입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사들을 돈으로 경쟁시킨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은 교육자료와 교수방법을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돈으로 교사들의 교육행위를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치졸하고도 비효과적인 발상입니다. 교사들이 학생지도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할 일이 서로 경쟁해야 할 일보다 더 많고 더 중요하고 더 결정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훌륭한 교사들이 발휘하고 있는 역량을 추출하여 역량모형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교사들을 선발하여 배치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면, 교육계는 변화될 것입니다. 훌륭한 교사들이 많은데 어찌 교육계가 피폐해지겠습니까? 반복하거니와 돈으로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돈이 개입되면 돈 이외의 가치는 모두 사장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이념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교훈입니다.

훌륭한 교사를 선발하는 것도 시험성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과급을 내걸고 우수교사를 뽑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학생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피드백하는 역량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량의 전문용어로는 타인육성(Developing Others)이라고 합니다.

글쓰기에 곤란을 겪고 있는 학생에 대한 태도와 피드백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 지 보겠습니다. 그 학생의 숙제는 3 페이지를 채워야 했지만, 겨우 한 문단만을, 그것도 기한을 넘겨 늦게 제출했습니다.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출된 것은 겨우 한 문단이었어요. 하지만 문장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저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참 짧구나. 하지만 좋은 문장이야." 그 애가 써온 문장은 통일성이 있고, 앞뒤가 잘 맞는 글이었거든요. 문법이나 문형의 문제도 없었구요.


아이들을 무조건 칭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재력과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어 발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교사와 학생들간의 <연결되어 있는 마음(connectedness)>과 교사의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결된 마음상태는 아이들에게 매우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깨어있는 마음상태가 중요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관적인 기대를 표시하며, 자신의 불충분한 피드백 노력을 변명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그 애는 구제 불능이었죠. 그렇게 형편없는 애는 처음 봤어요. 문제해결능력이 전혀 없는, 산만하기 짝이 없는 애였어요. 번번이 저를 속이려고만 들었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같은 수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시험성적이나 성과급의 차이로 변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재의 선발에는 <역량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훌륭한 교사를 선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근무하는 조건을 잘 정비해야 합니다. 학생과 교사의 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게 한다든지, 교사에게 적정한 자율성을 교권으로 부여한다든지, 행정 잡무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든지, 교육행정을 보다 효율화한다든지 하는 교육환경의 시스템적 정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혁적 조치들이 우리나라 공교육을 살릴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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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누가 나에게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경영학 고전을 두 개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체스터 바나드(Chester I. Barnard, 1886~1961)의 『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1938)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의 『The Practice of Management』(1954)를 들 것입니다. 후자는 이미 번역되어 나왔고 드러커는 거의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의 이름과 사상의 대강은 알고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나드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체스터 바나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세기 경영학에서 경영사상의 지축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데도 세간의 인기를 크게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나드 이후의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그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은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몬(Herbert A. Simon, 1916~2001)입니다. 그의 제한적 합리성과 의사결정이론은 바나드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 중에는 피터 드러커를 들 수 있습니다. 드러커의 업적과 공로에 대해서는 나중에 리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바나드 사상의 일면을 드러낸 『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 의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938년에 출판된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문자 그대로 경영자의 기능을 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영자는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조직구성원의 헌신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영자의 핵심기능을 정의하고 나니까, 경영자의 권위는 경영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이 그의 권위를 마음으로부터 수용해 줘야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영자는 부하들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단순히 말로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설득력과 성과급(incentives)을 적절히 활용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성과급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효과성(effectiveness)과 효율성(efficiency)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내가 바나드의 위대함을 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바나드는 조직론에서 효과성과 효율성을 최초로 구분했습니다. 조직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효과성과 효율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의 효과성이란 명시적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며, 조직의 효율성은 조직이 구성원의 동기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효율성을 단순히 투입대비 산출의 정도로 측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입니다. 경영학이 점차 공학으로 변해가면서 효율성의 개념과 정의도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아무튼 요즘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바나드는 조직구성원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하면, 즉 효율성을 높이면, 조직의 목적 또는 목표를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즉 효과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효율성을 높이면 효과성이 높아진다.” 즉,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상태를 제공하면 조직의 목적은 지속적으로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지성으로 본다면, 그런 정도가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대공황의 처참함에서 겨우 벗어나려고 하던 미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자는 넘쳐나는 데 일자리는 부족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래서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하기 어렵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시대정신의 흐름을 뒤집어 업는 놀랄만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상은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였습니다.

 

놀랍게도 바나드는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상아탑에 안주하는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AT&T에 사원으로 입사해서 자회사의 사장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공기업을 맡아 경영한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들과 교류하고 있었을 뿐, 한번도 전문적인 연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경영자 권위의 문제, 설득의 커뮤니케이션과 성과급 이슈, 효과성과 효율성의 명확한 구분 등과 같이 그가 보여준 통찰력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요즘 우리 경영학계과 실무계는 바나드의 통찰을 무시한 채 인간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하거나 “목적달성을 위한 자원”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습니다. 사람은 기계도 자원도 아닙니다.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어하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면, 조직의 장기적인 효율성과 효과성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요즘, 경영자들은 바나드의 사상을 다시 한번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때입니다.(끝)

 

[참고] 이 책은 15년 전에 신한종합연구소의 기업문화팀에서 『관리자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역자들은 이 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번역까지 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을 텐데, 약간의 오역과 매끄럽지 못한 부분 등 다소간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원서를 그대로 보시면 훨씬 그 뜻을 명확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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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