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어서, 성경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뿌리 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한 시간 일한 근로자나 뙤약볕에서 10시간 일한 근로자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어떤 식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오늘날의 지성과 합리성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죠..

 

혹시 일용근로자들의 새벽 인력시장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적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일해서 일당으로 사는 분들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입니다. 남대문 근처를 비롯한 서울 전역에 여러 군데서 새벽마다 노동시장이 섭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 작업장에서 봉고차를 몰고 와서 필요한 인원수만큼 데려갑니다. 뽑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건장하고 힘 잘 쓸 수 있고 숙련된 것처럼 보이는 순서대로 뽑힙니다. 이 인력시장에서 뽑히지 못한 사람은 그날 하루는 공치는 겁니다.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일당을 벌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에도 이런 인력시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포도원 일꾼>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인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가서 필요한 만큼 데려왔는데, 오후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녁에도 나가 보았더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운이 없거나 무능해서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그날 일당을 똑같이 지불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절 참조)

 

예수가 들었던 이 비유의 맥락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술 더 떴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때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마태복음 1916~30절 참조)

 

일부 신학자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한정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세상 사람들을, 포도원은 교회를, 관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천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협의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일관된 가르침은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부의 탐욕적 추구가 악한 것이고,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뛰어난 지식과 고도의 합리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한 방에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이 인간의 뛰어난 지식인지 생각해볼까요? 대단히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는, 최근에 유행하는 이론 중에 보상(칭찬)을 통해 코끼리를 춤추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에 근거한 것인데, 보상에 따른 강화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의 보상제도가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확장하면 당근과 채찍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기업의 보상제도, 성과와 역량의 문제는 나의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인 포스팅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주 방문하셔서 읽고 함께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여느 짐승과 동일하게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을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의 거래적 존재(transactional being)으로 인식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따위 이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계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아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existential being)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인간의 뛰어난 지식 중에 형평성 이론(equity theory)이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하는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론입니다. 적어도 10배는 아니더라도 보상의 상당한 차이가 노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뛰어난 지혜입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계산적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뛰어난 지혜를 성경은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대학에서 현대적인 경영이론을 배울 때, 나는 그 이론의 정교함과 합리성, 그리고 실증가능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이론들이 현실에 잘 적용되기만 한다면, 훌륭한 경영성과와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거쳤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고 온갖 문제상황에 직면해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영이론들을 적용하면 할수록, 조직문화는 점점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을 10:1로 결정해서 지급한다면 일단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계산합니다. 보상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더 이상 일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손익을 철저히 계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될만한 것에는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조직문화가 어떻게 될까요? 이런 조직에는 공동체 정신은 사라지고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위한 계산만 남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아우를 대하듯, 사랑과 온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지름길입니다. 조금 못난 자식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듯이, 포도원에 제때 불려가지 못한 사람, 즉 사회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회에는 서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손익을 넘어선 사랑이 오히려 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하고, 그런 부의 향유가 사회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드는 선순환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북유럽의 사회모델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형평성을 따지는 계산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예수의 형상을 닮았고,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포도원 주인 같은 사람들이 꾸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스스로 그리스도(메시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Christian이란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기독교인들 스스로 자신을 작은 그리스도라고 인식한다는 것이죠. 독일어에서는 기독교인을 아예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도 그리스도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이 곧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겁니다. 놀랍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그러므로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생생한 가르침이 있을까요? 포도원 비유는 뒤늦게 포도원에 왔거나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 일꾼들에게, 그래서 생계가 막막해진 사회적 약자인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아니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예수의 명백한 가르침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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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외된 백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줄여서, 그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부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부자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재정이 힘들어졌습니다.
    세금을 어디선가 더 걷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농어촌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각종 세금감면을 폐지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농어촌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통계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더 가고 덜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니까요.

     

    부자들의 세금부담이 이토록 적은 나라에서 부자들에게 매기는 종부세마저 징벌적 조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영혼이 있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할 때의 자본과 재무제표상 자본계정의 자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무제표상의 자본을 추구하는 이념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란 자본계정을 무한히 확대시켜 가는 이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는 자본 그 자체가 끝없이 증식하도록 돕습니다. 자기증식을 끝없이 반복하는 세포를 의학적으로는 암세포라고 합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암세포처럼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 암세포에 의해 인간의 공동체 정신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명박 정부에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일까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기 때문도 아니고 마음씨가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신교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의 제자인가요, 아니면 예수의 제자인가요? 예수를 팽개치고 자본을 따르기로 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의향이 있다면 다음의 가르침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 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 1~16)


     

    예수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포도원에 일하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지를 받은 근로자들, 택배운송기사 등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예 노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도 바로 우리 이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불려오지도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들에도 똑 같은 몫을 주라는 가르침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바로 이 비유를 가슴에 담고, 애정이 없는 경제학은 인류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능력이 뿜어내는 힘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우주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위대하면서도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포도원의 주인처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007) 똑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는 러스킨의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로 변했습니다. 위대한 영혼이 된 것이죠. 러스킨의 이 책을 읽고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자 놓을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을 그 책의 이상에 따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 내 생애에 즉각적이고도 실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

     

    그래서, 간디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간디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개신교 장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러스킨은 묻습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똑 같은 품삯을 주어서 과연 포도원이 망했을까요? 오히려 더 흥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미국식 경영이 세상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이런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거부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히려 이 위기의 시대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복음 835)

     

    이 위대한 가르침을 받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어떤 조직이든지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 조직의 지도자가 매일 죽어야 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 날마다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살아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여러분은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복음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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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신뢰와 평안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상업화와 경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적 유대감(solidarity)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겁나는 화두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서로 도와주는 것은 그들의 자활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가난은 자조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가 도와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정말 맞을까요?

     

    이런 발상은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복지수준이 높은 북구의 여러 나라,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 이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은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 국가들은 건재합니다. 이들 국가는 국민의 세금부담율이 평균 70%를 넘습니다. 소득의 70%를 세금과 보험료의 명목으로 정부가 거두어 간다는 말입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자가 볼 때, 전체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수탈한다고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갹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의 완벽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합니다. 이러한 국가운영시스템과 정부에 대해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앞서 얘기한 공정성과 투명성에서 나옵니다.

     

    국가운영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하다면, 신뢰가 생기고 공동체 운영에 대해 안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악을 쓰거나 속임수를 쓰면서까지 영악스럽게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사회안전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배려하게 됩니다. 만약 두터운 사회안전망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번 실패하면 쪽박을 차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하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긴장하면 자신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재기할 기회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사회안전망은 설사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쿠션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합니다.

     

    덴마크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높은 경쟁력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유럽은 세금 많이 내기로 유명한 지역. 높은 세금은 일하려는 인센티브를 감소시키므로 노동 공급을 줄이고 성장에도 부정적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북유럽의 노동 시간은 짧다. 그런데 왜 이들 나라의 경쟁력과 생산성은 높을까?

     

    코롬자이 전 국장은 높은 세금에 기반한 탄탄한 사회안전망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사회안전망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으므로, 구성원들이 유연한 노동시장 같은 개혁을 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덴마크는 사회안전망이 물 흐르듯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어낸 환상적 사례라며 미국의 자동차 노조와는 확연하게 대비된다고 평했다."

    (발 코롬자이 OECD 국가연구국장와의 대담, 조선일보 2009.6.13일자 C2)

     

    이런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은 의심할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의 표면에는 성공한 사람이 보상받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를 하며, 또한 수많은 좌절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성공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될만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을 위해 다수의 시민들이 고통 받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조치된 근로자들과 택배운송노조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시위하는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일부 좌빨 극렬분자들의 선동으로 보아선 안 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습니다.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잘라내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폭력성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북구모델은 꿈 같은 이야기일 뿐 우리나라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퍼주기식 복지를 실현하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들이 생겨나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얼핏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놀고 먹는 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맨날 놀고만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나카타니 이와오(
    中谷巖) 교수의 견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기업이 언제나 간단한 잉여인원을 해고할 수 있다.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고되어도 실업보험이 넉넉히 지급되므로 생활의 불안이 없다.

     

    이와 동시에 덴마크에서는 임금은 철저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한, 같은 회사에서 몇 년씩 근무한다고 해도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기술 승급인데, 실업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전국적으로 훌륭한 직업훈련소가 정비되어 있어서, 해고되면 무료로 즉시 직업훈련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끔 해고되는 것이 오히려 기능훈련을 할 수 있어 미래가 열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이점은 노동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크로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동성이 확보된다는 이점도 있다. 이것은 기업에게도 대단히 고마운 것이다. 왜냐하면, 과잉고용으로 골치를 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인원이 과잉되면 즉시 해고하면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노동비용은 당시의 경제정세에 맞추어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비용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국가 수준에서 보아도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산업구조의 전환이 용이해진다. 경쟁력이 없어진 산업에서 고용조정이 실시되면 해고된 노동자는 직업훈련학교에서 장래에 유망한 산업에 적합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기업은 새로운 산업을 시작해도 기술을 가진 노동자를 즉시 조달할 수 있으므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원활해진다.”

    (나타카니 이와오(中谷巖),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351~352)

     

    우리도 이런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이 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적 연대(solidarity)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잘 알다시피,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들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에는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장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국가를 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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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가 이제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내가 독일의 교육시스템을 부러워하는 것은 부모의 경제능력이 아니라, 개인의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의 박사과정까지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다소 영향을 받아서 대학에서 등록금을 조금 받고 있습니다만, 영미계통의 대학등록금에 비하면 껌 값에 불과합니다.)



    2011. 8.7.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경영학부, 20여년만에 여름휴가 중에 잠시 찾아갔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독일대학에 진학하거나 졸업하는 것은 경제능력이 아닌 학습능력을 공식적으로 보여주어야 가능합니다. 초중등 교육의 목표 역시 학생들에게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에 사교육시장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파악하여 학생의 진로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것인지를 감안하여 지도합니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의 진로지도에 크게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직업학교로 갈 것인지, 대학을 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교사의 추천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경제능력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 http://pssyyt.tistory.com/[독일교육 이야기]는 박성숙님이 독일현지에 살면서 싱싱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많이 방문해서 살아있는 교육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도 교수는 학생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교수의 강의를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학업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교수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수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합니다. 학생들은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대학을 떠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대학을 떠납니다. 독일 대학생들에게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처럼 입학하면 적당히 공부해도 졸업하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학과마다 중도 탈락비율이 조금 다르지만, 인기가 있는 학과의 탈락비율은 매우 높습니다.

     

    최근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1980년대만하더라도 경영대학의 경우에는 입학생 중에서 약 3/4이 중도에 그만 둘 정도였습니다. 대략 75%가 탈락한다는 말입니다! 상상이 되나요? 대학은, 학생들에게 자상하게 대하지만,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학생들이 대학에 등록금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수의 강의와 세미나는 학생이라는 고객에게 파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교수는 학생을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받기 위해 학생을 학교에 붙잡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학생들도 다른 학생과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상대평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공부할 때, 독일친구들은 나의 공부를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세미나 논문도 여러 차례 함께 토론하면서 교정해주었고, 내 성적이 그들보다 더 좋았는데도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어서 독일대학 사회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제의 와 오늘의 가 경쟁하고, 미래의 는 오늘의 와 서로 경쟁할 뿐입니다.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절대적 경쟁입니다. 이런 교육철학과 사회운영시스템은 유럽의 대륙국가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2011. 8.7.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경영학부, 20여년만에 여름휴가 중에 잠시 찾아갔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교사나 교수는 학생들에게 공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경쟁하지 않는 체제 속에 있는 학교와 학생들이 경쟁력이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쟁하지 않고도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바로 정부의 올바른 교육철학과 정책에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는 교육기회의 균등한 배분이야말로 경쟁력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31) 정신이고, 정부에게 의무 지운 요구사항이기도 합니다.

     

    만약 등록금을 받고 그 등록금으로 대학이 운영된다면, 학생들에게 그렇게 엄격하게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지요. 학생들을 가급적 많이 끌어 모아 적당히 학점 주고 졸업시키겠지요.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끌어들여 학교 이미지를 높이려고 하겠지요. 이런 정신 나간 대학이 우리 사회에서 세칭 일류대학이라는 겁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립대학들은 학점 또는 학위증의 상업화에 심각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돈으로 거래될 수도 없고, 또한 거래되어서도 안 되는 가치(학력 또는 학문적 수준의 인정)를 시장경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업화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학교육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뇌된 것이죠.

     

    이런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실력보다는 스펙으로, 본질과 내용의 질적 수준보다는 포장의 화려함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무의미한 경쟁과 스트레스. 불신과 불안을 선물했습니다. 공동체적 연대감의 해체와 극단적인 이기심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적 표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황폐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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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불공정한 게임은 구성원간의 갈등과 폭력을 강요한다고 했습니다. 공정한 게임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공정하게 경쟁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불공정성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ic)에 기인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거래당사자 둘 다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속일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책당국자와 시민, 정치가와 유권자, 상인과 고객, 상사와 부하,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대기업과 하청업체, 경영진과 종업원, 검찰과 피의자 등등

     

    대개의 경우, 어느 한 쪽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여서라도 더 많은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몇 차례 터무니 없이 속는 거래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처음에 서울에서의 삶은 참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독일에서 하던 대로 중고차를 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세요. 그 후로 다시는 중고차를 사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시장경제에서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자동차와 같이 물질적인 것들은 정보비대칭성에 의한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정보 차이에서 오는 불이익을 사후에라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속은 다음에는 또다시 속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물질적인 대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물질적인 대상이 시장경제에서 반복적으로 거래되는 경우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폐해를 입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폐해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교육과 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이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우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교육을 과연 상품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은,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었듯이, 그 자체로서 공공재이기 때문에 상품화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교육이 상품화되어 시장경제에 편입됨으로써 사교육시장이 발달했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국민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대 정부가 국가의 마땅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사이, 사교육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정부가 조금만 소홀히 해도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시장경제의 품으로 포섭해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교육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교사와 학생 사이에 엄청난 정보비대칭성이 발생합니다.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은, 교사와 학생들은 실질적인 인격도야와 잠재력의 계발보다는 점수위주의 공부를 통해 소위 일류학교 진학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등록금을 매개로 학생은 고객이 되고 교수는 상인이 되기 때문에 정보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자동차를 사고파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보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브랜드이미지가 낮은 대학에서는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광고선전을 해대고 있고, 심지어 교수들은 연구보다 대학 세일즈와 학생유치에 더 바쁩니다. 어떤 대학에는 직업사관학교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습니다. 대학인지, 직업훈련원인지, 아니면 영리기업인지 그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업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 폐해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상업화되면, 그 자체로서 존립하기 위해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대학은 많은 학생을 끌어 모아 등록금 받는 수준에서 적당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적당한 수준에서 학점 받고 졸업합니다. 부족한 것은 또 다른 사교육시장에서 때우면 됩니다. 교육이 시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부유층과 저소득층 사이의 정보비대칭성이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교육처럼 상품화될 수 없는 영역까지 상품화하여 시장경제에 편입시키려는 자본주의 이념의 탐욕적 속임수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첫째, 교육과 같이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은 과감히 공적 영역으로 원위치 시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모든 정보의 처리와 유통이 공정하고 투명해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이 음침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아, 정보의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햇볕 아래로 끌어내야 합니다.

     

    일부 상품화된 시장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회복하라

     

    우선, 첫 번째부터 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상업화의 논리가 심각할 정도로 팽배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택공사와 토지공사 같은 공기업을 세운 것인데, 이들이 자신의 존재목적을 잃고 집장사, 땅장사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은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은 원가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서 가격구조를 시민들이 완전히 알 수 있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당시 참모들 중에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꾐에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고급주택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것은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민주택은 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공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택공사와 같은 곳에서 원가를 공개한 후, 회사의 존속을 위한 일정한 마진을 붙여서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공급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민간 건설업자들의 터무니 없이 높은 분양가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주택공사의 원가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볼펜 한 자루의 원가를 공개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시장경제를 거부하는 공산당식 발상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시장기능으로 포섭시켜야 사회가 균형을 잡는다는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볼펜과 서민주택을 같은 차원에서 보는 사람이 제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볼펜은 없어도 대체가 무한정으로 가능한 상품이지만, 그래서 가격을 통제할 필요가 없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든 보이는 주먹에 맡기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민은 집이 없으면 판자촌이나 쪽방 신세가 됩니다. 아니면 노숙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은 집 없는 설움을 경험해 보았나요? … 그러므로 서민주택은 서민생활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에 공급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라

     

    그 다음, 두 번째 이슈를 보겠습니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이 성립하려면, 경쟁질서가 매우 공정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가 완전하고 투명하게 유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정보는 결코 완전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정보비대칭성이 시장의 불공정성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불공정한 경쟁의 원인이 되고, 결국은 기득권층의 속임수 게임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정부는 이러한 속임수 게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처리하고 유통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가치, 공정성과 투명성의 가치를 실천하면 됩니다. 공정성과 투명성은 그 자체로서 매우 높은 사회적 가치입니다. 공정성은 정의로운 사회와 관련하여 철학적 논의가 가능하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매우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운영메커니즘이 초등학교 운동회와 같이 공정하고도 투명한 게임이 되도록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갈등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정보처리와 유통에 있어 공정성과 투명성으로도 구분됩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진실한 정보의 처리와 유통을 부담스러워 하고, 가급적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해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가급적 공개하지 않습니다. 뭔가 속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린 데가 있어서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보수진영에서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 부인하다가 진실이 밝혀지면 그건 오해였다고 잡아 뗍니다. 최근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소리죠. 보수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특히 사학비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육과 학문이 상업화되면서 생긴 치욕적인 일인데, 사학비리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시장경제의 탐욕성과 그 폭력성을 사학비리에서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교육을 상업화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키워온 역대 정권의 업보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학의 투명한 운영을 위해서 법을 개정하자고 하면 엄청난 저항에 시달릴 것입니다. 사학의 온갖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학을 운영하는 기득권층에서는 정보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무서운 겁니다.

     

    그러므로 사회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정성과 투명성입니다. 이 두 개의 덕목은 상호보완적입니다. 공정해야 투명하게 될 수 있으며, 투명해야 공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무에 있을 때 활용했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서가 내 방에 수시로 들어오지만, 그 때마다 반드시 문을 열어놓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투명성 때문입니다. 만약 문이 닫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와 비서 사이에 아무런 이상한 거래가 없었지만, 투명성의 결여로 공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문을 열어 놓은 채 불공정한 또는 부적절한 거래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정했다면 투명한 조치에 승복해야 하고, 투명하고자 한다면 공정한 조치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덕목, 즉 공정성과 투명성은 사회운영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에 근거하지 않은 경쟁력이란, 월 스트리트의 붕괴에서 보았듯이,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사회와 조직이 이렇게 설계되고 운영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며, 삶에 대한 안정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보적인 입장은 항상 공정한 정보의 투명한 유통을 중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보처리와 유통은 신체의 혈류와 같습니다. 이것이 완전하고 투명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정보에 특정계급을 위한 속임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선진사회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덴마크를 포함한 북구의 여러 나라는 완벽한 정보의 투명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북구 여러 나라처럼 풍요로우면서도 공정하고 투명한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경영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덕목입니다.

     

    간단한 사례를 들어볼까요?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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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15 신자유주의 시장경제(6)_불공정한 경쟁은 갈등과 폭력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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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07 신자유주의 시장경제(1)_미국이 신봉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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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노상에서 강도가 옆구리에 칼을 대고 돈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른 꺼내주겠죠.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면 됩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겠지만, 오늘 하루 일진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면 그뿐입니다. 앞으로 조심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리에 온통 강도와 절도범이 우글거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심각한 문제가 생기겠죠. 부자들은 사설경비원을 고용하거나 부자들만 사는 동네를 따로 조성해서 살면 됩니다. 하지만, 서민들은 어떻게 될까요?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부자동네로 이사 가서 부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상강도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중간지대는 없어집니다.

     

    실제로 남미국가들은 상당부분 이렇게 변했습니다. 미국사회도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른 경제정책의 결과로 빈부의 차가 심해져서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도 경제개발에 따른 빈부의 차이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공무원들의 부패가 겹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명박 정부는 지난 좌파 정권 10년의 결과라고 비난하고, 진보진영에서는 우파 정권의 부자들을 위한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양극화를 초래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경제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공정한 경쟁

    어쨌거나 부유층과 강대국은 악마의 맷돌을 계속 돌림으로써 서민들과 가난한 나라로부터 돈을 빨아냅니다. 그 메커니즘은 복잡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노상강도질보다 더 무자비하지만 스마트한 방법이 있습니다. “자유경쟁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노상강도처럼 무식하게 돈을 빼앗아가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경쟁을 시키면 됩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해봤을 겁니다.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합니다. 1,2,3등을 뽑아 시상대에서 상을 주고 칭찬합니다. 등수에 들면 그래서 어깨가 으쓱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뜀박질을 잘 한다고 인정해줍니다. 여기서 주는 상은 사용가치보다 뜀박질에 대한 사회적 인정(recognition)입니다. “자유경쟁이라면 우리는 보통 이런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유경쟁은 매우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자유경쟁의 원리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자유경쟁이 선하고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초등학교 운동회는 눈에 보이는 게임이므로 속임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초라한 운동회지만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한다는 규칙 말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서 기회도 균등합니다. 이 규칙을 어기면 그 동네에서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규칙을 통과하여 1등을 한 사람도 전부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뿐입니다. 물질적 보상은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시장경제에서 경쟁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우선 시장경제는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세계라는 점이 운동회와 다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속임수가 횡행하지만 잘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속임수가 워낙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속임수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우리의 정신 속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예를 들어볼까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 아이의 타고난 재능과는 상관없이, 학업기회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출신배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의 자유경쟁원리가 적용된 이후, 지난 수십 년간 부유층 자녀들의 일류대학 합격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교육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돈이 없는 집안에서는 일류대학을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헌법 제31조 제1)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학습능력이 아니라 집안의 경제능력에 따라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시장경제에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현실은 지금 어떤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은행융자를 알선하면서 직장인 신용대출금리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학자금융자 제도야말로 기득권층이 정부를 끼고 벼룩의 간을 빼먹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대학마다 매학기 등록금인상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심지어 여학생들이 삭발투쟁을 하는 장면을 볼 때 가슴이 무너집니다. 기성세대와 정책당국자들은 젊은이들의 이런 절규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 저 비정함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대학생들의 등록금은 정말이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입니다.

     

    내 얘기의 핵심은 우리 사회는 매우 불공정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공정한 사회가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유경쟁의 전제는 동일한 출발선이어야 하는데, 그 전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 아닙니다. 현실의 불공정성을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포장으로 살짝 바꿔서 속임수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임의 이면에는 부유층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불공정한 게임은 이긴 자에 대한 인정과 존경보다는 불신과 질투심을 유발합니다. 심지어 적개심을 품게 합니다. 제도적으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공정성이 이면에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겉에 드러난 현상만을 보면서도 불안을 느낍니다. 불안을 느낀 사람은 그 원인을 모를 때, 자기보호를 위한 폭력적 방법을 구사하게 됩니다. 사회적 불안과 갈등은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타짜>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김혜수의 ,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가 압권인 영화입니다. 바로 그 영화에서 타짜가 타짜인 것은 속임수에 능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게임이라면 노름판에서 승률이 통계학적 범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속임수를 쓰면 늘 이길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기득권층은 늘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폭력성이 있습니다.

     

    노상강도질과 타짜의 속임수는 범법행위로 처벌 받지만,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그러나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속임수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게임은 처벌은커녕 더욱 장려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경쟁은 심지어 민주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장경제에서 취업시장은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상거래는 누구도 강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잘살고 못사는 것 역시 자기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장메커니즘은 겉으로는 매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기득권층에 유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영화 <타짜>에서처럼 불공정한 게임이 된다는 말입니다.

     

    , 공정한 게임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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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한나라당 소속 나경원 의원이 엘르라는 잡지의 모델이 되어 화보를 찍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모델료는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국회의원이 잡지모델이 되어 화보사진을 찍을 수 있다 없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업적이지 않은 공익잡지에는 얼마든지 모델이 될 수도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홍보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상업화될 수 있는 영역과 상업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계가 모호하지 않습니다. 공적 영역은 어떤 경우에도 상업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상업화 현상은 항상 인간의 정신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경원 의원은 자본주의적 이념이 갖고 있는 무차별적 상업화의 위험성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상업화 논리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나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를 객관적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할 국회의원이 상업적인 일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는 것은 이미 그 정신이 상업화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 역시 아리송합니다. 모델료는 기부했다 어쨌다, 요즘 찍은 게 아니고 4월에 찍었다, 등등모델료와 촬영시기는 사태의 본질이 아닙니다. 상업적인 잡지에 몸을 맡긴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경원 의원은 자신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됐다는 얘긴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은 억울하다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인간의 정신에 파고드는 집요한 상업화 또는 자본화 현상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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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가진 자들은 어떻게 시장을 지배수단으로 활용하는가? 이 순환고리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나는 가진 자들은 신자유주의 이념, 시장경제의 규모확대, 자기책임의 원리적용이라는 삼각편대를 활용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가지 지배수단을 악마의 맷돌처럼 계속 순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는 지속적으로 가진 자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가진 자들은 풍부한 시장정보를 통해 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더 많은 것을 빨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규제를 완화하여 모든 것을 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심지어 공공기관이나 국유화된 사업들을 민영화하려고 합니다. 시장경제에 편입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기적으로 효율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의료부문과 교육부문처럼 가난한 사람은 병이 나서도 안 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도 없게 됩니다. 참으로 터무니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자유방임의 시장제일주의는 결국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 고리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기득권층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철의 삼각편대


    그래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남미와 같이 양극화 사회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 시장경제 확대, 자기책임의 원리, 이 철의 삼각편대를 풀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종말이었던 1929년의 대공황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말인 2008년의 금융위기가 그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이제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자로서 경제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巖) 교수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호소가와 정부와 고이즈미 정부에서 구조개혁과 규제철폐를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과거가 잘못되었음을 참회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개입주의적 전통이 훨씬 공동체적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면서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기파랑 2009)를 펴내 일본 독서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글에서 가진 자들이 서민의 돈을 어떤 방식으로 빨아들이는지 그 일단을 서술하고 있어서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서브프라임 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란 신용도가 낮아서, 상환능력이 없을 수도 있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융자다. 신용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대출금리는 높아진다. 그러나 금리가 높아도 그런 사람들을 주택융자로 끌어들이는 교묘한 장치가 있었다. , 처음 2,3년은 원리금 상환을 아주 낮게 해주고, 그 후에 상환액이 급증하는 식의 융자다. 당연히 융자를 받는 쪽에서는 장차 지불금리가 10%를 넘는 고금리 융자를 싫어하게 되지만, 그래도 융자를 받아볼 생각을 하게 만든 교묘한 장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주택 붐이었다. 이번 금융파탄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주택시장은 버블상태로 주택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업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저소득자를 설득한 것이다.

     

    '나중에 상환금리가 높아지는 것을 걱정하시는군요. 문제없습니다. 금리가 오르기 3년 뒤나 4년 뒤에는 구입한 주택의 가격이 상당히 오를 것입니다. 그 가격이 오른 주택을 담보로 해서 재융자(refinance)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지불할 금리는 담보가 되는 주택가격이 충분히 올라가기 때문에 서브프라임이 아니라 프라임 레이트(우대금리)가 됩니다. 장차 미국에서는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재융자를 하면 반드시 한층 더 풍요로운 생활이 보장될 것입니다. ......'

     

    이처럼 달콤한 유혹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서브프라임 론에 손을 내밀고 주택을 구입했는데, 이 때문에 주택수요가 증가해서 실제로 주택가격을 끌어올리게 되었다. … 결과적으로 보면, 서브프라임 론 업자의 이야기는 일시적이나마 적중한 것이 된다. 버블은 이 같은 자기실현적 현상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카타니 이와오,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88~89)

     

    이렇게 해서 주택금융회사들은 자신이 발행한 대출증서를 즉각 증권회사에 매각해서 현금화해 놓습니다. 그러면, 설사 주택융자금을 받은 채무자가 원리금 상황을 못하더라도 이미 대출증서를 팔아 현금을 챙겼기 때문에 손실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게 됩니다. 대출증서를 매입한 증권회사는 그것을 증권화”(securitization)합니다. 증권화란 대출증서를 모아서 금융시장에 유통될 수 있도록 상품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상품을 통칭 파생상품(derivatives)이라고 합니다. 대출증서라는 원본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위험도가 높은 대출증서와 위험도가 낮은 대출증서들을 혼합하여(다시 말하면, 위험을 분산하여) 금융상품으로 둔갑시킵니다. 이것을 다시 기관투자가인 여러 금융기관에 팝니다. 금융기관들은 이 상품에 투자할 재원을 일반투자자에게 높은 수익률을 내걸고 모집합니다. 중산층과 서민들인 일반투자자는 높은 수익률이라는 미끼에 걸려서 이런 상품에 투자합니다.

     

    이쯤 되면, 금융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강 이해하시겠죠. 위험도가 높은 대출증서가 증권화되어 끊임없이 금융시장에서 순환합니다. 순환할 때마다 이자율과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순환할수록 눈덩이처럼 시장규모는 커집니다. 원래의 대출증서가 위험자산인데, 그것에 기초한 파생상품 또한 그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택시장의 버블이 꺼지는 날에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월 스트리트에서는 이 시한폭탄이 언제 어디서 터질 것인가의 문제만 남았었는데,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서 제일 먼저 터졌고, 그 다음 리먼브라더스 등으로 옮겨졌습니다. 투자은행들끼리 서로 스크럼을 짜고 수많은 폭탄을 돌렸기 때문에 한두 군데서 터지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다 터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융위기입니다.

     

    (위기의 원인을 매우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를 동원해서 분석한 보고서는 수없이 많습니다. 일반인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복잡하게 해 놓고,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터졌는데,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발뺌합니다. 월 스트리트에 있는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금융위기의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지자, 대부분의 투자은행과 금융기관 경영진은 엄청난 보너스를 받고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월 스트리트는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서브프라임 론을 받았던 사람들은 주택을 압류당해서 거리에 나앉게 되었고, 증권화된 금융상품에 투자한 일반투자자들은 자신의 증권이 휴지조각으로 변했습니다.

     

    , 그러면 누가 잘못했는가?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주관했던 주택담보대출업체와 증권회사, 금융기관과 기관투자자의 경영진은 잘못이 없는가? 명백한 불법적 행위를 하지 않은 한, 도의적 책임만 가질 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황당하죠? 규제를 다 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감독했어야 할 감독당국, 즉 증권거래위원회(SEC),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재무부(Secretary of the Treasury)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이 금융규제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손 놓고 있었거나 눈 감고 있었거나, 아니면 문제의 원인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하거나

     

    폭탄이 터져 잿더미가 되고 난 후에, 그제서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Allen Greenspan, 1926~)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린스펀은 또 어떤 인물인가 1987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연준의장으로 지명되어 2006년까지 18년이 넘도록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금융시장을 주무른 사람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Henry Paulson, 1946~)이 "자유화된 금융은 구조적으로 폭발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자유화시켜 놓았는데, 이제 와서 폭발위험이 크다? 폴슨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 출신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경력만 봐도 악마의 맷돌을 찬양할 것은 뻔합니다.

     

    이들 미국 금융시장의 최고책임자들은 자유방임의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무능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그들의 양심을 가렸고, 마음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는가?

    원래의 대출증서를 묶어서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증권화하여 파생상품을 만드는 최초의 행위가 문제입니다. 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는 대출증서를 상품화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시장규모를 확대한 것입니다. 자본시장에서 파생상품은 위험을 헤징하는 좋은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품 자체가 대규모로 시장에서 순환하게 되면,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세밀한 관찰과 감독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연준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오히려 금융공학의 발달로 세계경제는 불황없는 성장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서 시장규모를 확대하라는 것입니다. 레이건 정부 이래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증권화 작업과 위험한 유통과정을 합법적인 것으로 모두 인정해주었습니다

     

    , 그렇다면, 시장규모가 확대되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민들의 주머니는 털렸고, 이 모든 사태를 책임지고 있던 부유층은 보너스 받고 월 스트리트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서민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반문하시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주택을 구입했고, 자기책임하에 투자했으므로 자기책임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데가 없습니다.

     

    이제, 가진 자들이 신자유주의 이념을 왜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 이념이 시장경제에서 어떤 방식으로 먹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악마의 맷돌을 계속 돌리고 싶어하는지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국제사회로 확대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다른 나라를 계속 지배하려면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악마의 맷돌을 계속 돌리면서 가난한 나라의 주머니를 털어야겠지요. 그게 바로 WTO, FTA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비판하고 있는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와 『나쁜 사마리아인』 등과 같은 자신의 책에서 세계는 결코 평평하지 않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번 금융위기가 회복되고 나면, 최대의 손실을 볼 나라는 어디이고, 최대의 혜택을 입을 나라는 어디일까요? 국제적으로 보면, 손실을 입을 나라는 역시 가난한 나라들이고, 혜택을 볼 나라는 미국이라는 것에 경제학자들은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국제경제적으로 보면, 이번 금융위기에서 미국은 손해 볼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세계무역의 기초와 금융결제수단은 모두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US$)이기 때문입니. 미국 입장에서는 지금 세계경제라는 바둑판에서 꽃놀이 패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왜 그런지는 나중에 포스팅하겠습니다. 우선 급한 것부터 글을 올리겠습니다. 써야 할 것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고…)

     

    부유층과 강대국은 악마의 맷돌을 계속 돌림으로써 서민들과 가난한 나라로부터 돈을 빨아내는 것으로 끝났을까요? 만약 돈만의 문제였다면, 그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다시 벌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돈만의 이슈가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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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할 수 있다면, 시장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최적의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믿음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만약, 시장이 이러한 자기조절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파국으로 나가기 전에 스스로 균형상태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번번히 파국을 맞았고, 인위적인 조정을 가해야 다시 살아나곤 했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이 가져온 파국의 절정은 1929년의 대공황입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의 결말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엽까지 거의 무제한적 자유방임을 추구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팽창한 것처럼 보였지만 엄청난 버블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대공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았습니다. 이런 경제적 공황상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적 신념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경제학적으로 알려준 사람이 바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였습니다. 정부가 적절한 수준의 개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잡도록 인위적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대공황은 유효수요의 부족이 원인이므로,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돈을 풀어서 수요를 진작하여 생산자의 공급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부의 대규모 개입이 시장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혁명적 처방이었는데, 시장을 맘대로 주무르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케인즈의 처방은 옳았고, 시장경제의 패러다임은 개입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종전 후에도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여 자유주의적 방임에 따른 극심한 빈부격차를 축소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시행해 나갔습니다. 부유층의 부당한 탐욕을 제어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중산층이 매우 두터워졌고, 30여 년간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명실상부하는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했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미국은 국제무대에서도 지나친 개입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후, 미국의 진보적 개입주의는 서서히 힘을 잃었습니다. 시장에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자유주의를 대공황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보수적인 공화당의 레이건이 1981년에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시장의 규제적 장치를 다 풀어 놓았습니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하고, 시장경쟁에서 자기책임의 원리를 내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시장은 활기를 띠고, 모든 것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전환시켰습니다. 시장은 커졌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탐욕도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는 앞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저축은 물론 퇴직연금과 같은 장래를 담보한 투자금을 날리기 일쑤였습니다. 대형기관의 경영진은 이미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높은 연봉으로 미리 단물을 다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파국이 오면, 경영진은 물러나면 그 뿐입니다. 경영판단이었기 때문에 배임과 같은 범죄행위로 처벌하기도 곤란합니다. 지난 30년간 대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은 결과적으로 가진 자들이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메커니즘으로 굳어졌습니다.

     

    나는 통계수치를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숫자가 때로는 이해를 훨씬 빠르게 해주기 때문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레이건 등장 이전에는 상위 1%의 부유층이 차지하고 있던 총소득은 국민총소득의 8%, 상위 0.1%의 초부유층이 차지했던 총소득은 국민총소득의 3%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패러다임의 시행 후 25년이 지난 2005년에는 상위 1%의 부유층이 국민총소득의 17%로 늘어났고, 상위 0.1%의 초부유층의 소득은 전체소득의 7%로 늘어났다. 양극화 현상이 극한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카타니 이와오,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49)

     

    아울러 1970년대에는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보상수준이 종업원의 평균임금의 약 40배 수준이었습니다. 21세기 들어와서는 약 400배로 늘어났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패러다임이 중산층을 빠른 속도로 무너뜨렸습니다. 부유층이 중산층의 부를 빨아들인 것입니다. 부유층은, 중산층 사람들이 시장에서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에 따라 주체적으로 의사결정 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기책임의 원리에 따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선택의 자유”, “기회의 평등”, “자기책임의 원리라는 용어가 얼마나 허울뿐인 논리와 도덕인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들이 많지만, 최근의 사례만 들어보겠습니다.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와 그 탐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파렴치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진원지인 월 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과 금융기관 경영진들이 보여준 무책임한 행태에서 나는 경악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심대한 손실 때문에 파산시킬 수 없어서, 대형금융기관에 국고를 지원했습니다. (자유방임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당연히 파산시켜야 마땅하지만 그들 역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시장의 자기조절기능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원받은 돈으로 경영진들은 거액의 보너스를 챙겼고, 심지어 그 돈으로 의회에 로비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제도를 바꾸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구조조정을 빌미로 수많은 종업원들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1980년대부터 일어난 금융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그 행태는 거의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의 자유, 기회의 평등, 자기책임의 원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이렇게 금융시장은 또 다시 파국을 맞았고, 극단적인 인위적 조치를 취해야 겨우 되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시장은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시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장에는 자기조절기능이 있다는 헛된 믿음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것은 시장이야말로 가진 자들의 지배수단으로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진 자들은 지배수단으로서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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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신대륙으로 건너간 초기 이민자들은 17세기 초엽에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종교적 난민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들, 특히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WASP)은 자신의 조상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믿음, 용기, 그리고 위대함을 칭송합니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대부분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리만큼 경건하게 유지하면서, 노동이야말로 신의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때부터 근검절약과 직업소명설이 개신교 윤리의 핵심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연관성을 연구해서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칼빈은 신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예정설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알 수 없는, 전적으로 신의 예정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의 여부를 알 수 없다면 매우 불안하겠지요. 열심히 노력했는데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그거야말로 낭패일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배웠고 일점일획도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쉽게 이해되었습니다. 세상에 성경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머리가 점점 크면서,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과 세상 학문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 주석과 신학서적들을 찾아 읽으면서 어려웠던 것들이 대부분 명료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더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이 왜 어려울 수밖에 없는지도 대강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공부해 가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의 성서해석이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음도 확연히 알았고,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신학적 해석도 달라져서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유파로 갈리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들이 나중에 보면 틀린 경우가 꽤 있습니다. 미국에 관한 얘기가 그랬습니다. 미국은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세운 기독교국가라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 철썩 같이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미국이 과연 기독교국가인가? 건국의 역사를 보면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물론 건국 과정에서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헌법은 정부가 어떤 특정한 신앙을 독점적으로 지지하거나 향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을 뿐 아니라, 신앙에 대해서는 어떤 규제도 하지 않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신앙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신대륙으로 찾아온 난민들이 종교적 이상을 따라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온 사람들도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들, 특히 일종의 칼빈주의자들이었던 청교도들은 칼빈의 신념에 따라 철저한 경건과 소명의식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신대륙의 척박한 땅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가혹한 시련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칼빈의 예정설에 입각한 구원의 징표를 필요로 했습니다.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오는 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이 우선 신의 축복이었고 구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황무지를 개척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소명을 잘 수행했다는 것이고, 그 징표가 바로 그들의 곳간에 쌓인 물질적인 부였습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삶, 온갖 시련을 이겨내는 삶이야말로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부자(富者)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성립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후예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고, 그들의 DNA속에는 그런 개척정신이 깊이 박혀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프론티어 정신은 서부를 개척하게 했습니다. 원주민을 살육하면서 땅을 빼앗았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들의 개척정신 속에는 이렇게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해냈습니다. 두 차례의 유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달나라에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미국을 동경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친척 중에 미국에 사는 이가 있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국유학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택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였습니다. 미국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신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고 믿을만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온갖 환난을 견뎌낸 나라로서 신의 축복과 구원의 증거가 충분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옳았다는 징표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손에는 신의 마패가 주어진 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방식을 다른 세계에도 그대로 전파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개척해야 할 땅이 없자, 이번에는 9.11테러를 빌미로 이라크를 개척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십자군이라는 말을 무심코 사용한 것도, 그래서 세계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산 것도 이런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개척할 땅이 없어진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무엇을 개척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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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