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07 도올 김용옥 선생의 성서해석에 대하여 (11)
  2. 2009.02.23 신은 죽었다. 도대체 누가 죽였는가? (5)

도마복음에 관한 칼럼을 써왔던 도올 김용옥 선생이 연재를 마치고 지난 일요일에 중앙SUNDAY와 대담을 했습니다. 연재와 대담은 매우 재미있었고, 유익했습니다. 나는 성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그의 관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도올 선생은 그동안 기독교에 관한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 전통적인 기독교인이나 학자들에게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해 왔습니다. 나는 이 논쟁에 가담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믿음(신앙)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에게도 그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 글을 썼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나의 밖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내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2,000년 전에 예수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리스도(Christ)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그분의 모범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됩니다. 영미권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은 그리스도로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자신을 직접 “Christ”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基督)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초월적 힘이 자신을 끌어당겨서 뭔가를 해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 있는 신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고, 신은 신이라는 분리된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내가 잘 살고 구원받는 길은 내 밖에 있는 신에게 잘 보이면 된다는 탐욕적인 생각이 문제입니다.

 

도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마복음은 기독교가 해체돼 예수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기독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예수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중앙SUNDAY 108, 2009.4.5일자 13)

 

예수가 기독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겠죠. 그냥 동아리 모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에 대해 논의할 건더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음의 체계가 아니니까요. 그냥 역사학이나 사회학이 되고 맙니다.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종교가 아닌 엄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은 특정한 믿음체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믿음에 근거하여 학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리스도적 사건이 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세속적인 학문의 결과와 아무 상관없이 매 순간 이 구원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잘 이해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 과부와 고아들, 나그네들, 누구나 천시하고 멀리하던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돌보았습니다. 이 멈출 수 없는 거룩한 힘은, 당시로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강대한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부와 권력이 주는 맛을 본 후부터 기독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부와 권력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 힘을 과시합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육신이 부활하느냐 영혼이 부활하느냐를 가지고 네편 내편을 가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지고 파벌을 만듭니다. 심지어 성만찬을 화체설(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로 봐야 하느냐 아니냐로 갈라집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새발의 피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살육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기독교인들이 내 안에 있던 신을 밖으로 빼버린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내 밖에 있는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신을 빼앗아 오려니까 갈등과 전쟁은 자연스런 현상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분오열은 신을 자신의 밖으로 빼버렸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는, 편가르기
를 했던 모든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25장 45절)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배고플 때, 밥 한그릇 주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비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극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도올 선생의 말은, 인간의 탐욕을 허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더 큰 분열과 전쟁으로 나가게 할 뿐입니다. 예수는 탐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적 삶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논쟁의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쓸데없이 서로 힘을 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잡다한 교리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얄팍한 이성이나 조잡한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학문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어떤 예술적 표현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실천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적 사역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는 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내가 곧 작은 그리스도(I’m a Christian!)”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독일어권에서처럼 내가 곧 그리스도(Ich bin Christ!)”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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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동안 썼던 교과서를 주섬주섬 모아서 시내 헌책방에 갔습니다. 그걸 팔아서 읽고 싶은 다른 책을 사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마침 눈에 띄는 전집이 보였습니다. 5권짜리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이었습니다. 내 눈에 유독 니체라는 단어가 띈 것은 아마도 학교에서 니체라는 철학자가 신은 죽었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는 말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신이 죽다니? 죽을 수 있는 신이라면 신이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시골교회에서도 니체에 대해 뭐라고 가르쳤는데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 사탄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눈에 들어온 『니체 전집』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남은 단어는 짜라투스트라가 어쨌다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이 하는 말은 정상적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서울로 온 후에도 그 전집을 계속 끌고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이사 때 분실되었는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아까운 전집 중의 하나입니다. 니체가 했다는 그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경영학이 먹고 사는 데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무지 니체를 읽을 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 책세상 출판사에서 21권짜리 『니체 전집』이 완간되었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가끔 니체를 읽습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문장은 1882년에 출간된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세 번 나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읽어보시지요.

 

108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이 그렇듯이, 앞으로도 그의 그림자를 비추어주는 동굴은 수천 년 동안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그 그림자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183)


 

125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200~201)


 

343

근래의 최대의 사건은 – “신은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믿지 못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이 사건은 이미 유럽에 그 최초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꿰뚫어 볼 만큼 시력과 의혹의 눈길이 충분히 강하고 예민한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태양이 지고 있으며, 오래된 깊은 신뢰가 의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319)


 

건성으로 읽지 말고 다시 한번 더 찬찬히,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해가 1882년이니까, 이 해를 기점으로 근대를 넘어서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줌(Cogito, ergo sum)의 방법서설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을 때, 근대 문명은 1637년에서 1882년까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 250년간 이성중심의 서구 근대문명이 형성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근대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성중심의 세계관을 서서히 받아들인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얻어가면서 함께 타락했고 부패해졌습니다. 그 결과 권력의 맛을 알았던 교회와 이성중심의 신학이 신을 죽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신의 무덤이 된 셈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보면 니체의 말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거의 사라진 세계, 즉 신이 아닌 인간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스위스에서 라브리(L’Abri)공동체를 창설해서 2대전 후 절망에 빠진 유럽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 가르쳤던 분이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ugust Schaeffer, 1912~1984) 박사인데, 그 분의 견해대로 인류는 절망의 선(line of despairs)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문명은 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패러다임을 확립했습니다. ‘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직하게 말했을 때, 오로지 욕구와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입니다. 이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됨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성은 매우 취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성은 욕구와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생리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그것을 넘어선 욕심이고, 탐욕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입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감정을 비롯한 다양한 변수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통합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뇌과학, 진화생물학, 행동경제학 등과 같은 최근의 과학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자신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상대화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불안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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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