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업에 들어온 MBA과정 학생들이나 외부기업체에서 내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끔 합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더러운 화장실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린 질문이기 때문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수많은 해결책이 가능하겠지요. 학생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합니다.

 

     청소원을 더 뽑아 배치한다,

     청소관리를 아웃소싱한다.

     청소감독을 철저히 하여 잘못하는 경우에는 질책한다,

     청소원에게 청소를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한다.

     시간대별 청소 체크리스트를 비치한다,

     청소담당자의 얼굴사진과 이름을 코팅해서 화장실에 비치한다,

     성과가 좋은 청소원에게는 승진을 시킨다.

     이용자의 만족도를 조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청소원의 급여를 결정한다,

    

 

학생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방식이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화장실에 가보면 이런 방식을 씁니다. 이런 방식을 쓰는 화장실은 대개의 경우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1번의 해결책은 일손을 더 늘리면 깨끗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일손이 부족한 경우라면 몰라도 일손이 남는데도 일손을 늘린다고 해서 화장실이 더 깨끗해지진 않습니다. 2~4번 해결책은 흔히 쓰는 방식입니다. 전형적인 쥐어짜는 방식의 관리입니다. 5번은 쥐어짜는 방식을 더 체계화했을 뿐입니다. 6번은 쪽팔림의 심리를 이용해서 더 열심히 청소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7~8번은 가장 현대화된 방식인데, 7번은 자리의 한계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있는 카드는 아닙니다. 그래서 8번이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관리유형입니다.

 

인간을 관리하는 이런 방식은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어서 도대체 이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현대적 경영관리는 행동주의 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짐승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그 이면을 까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경영학에서 다루는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는 모두 이런 행동주의 심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영혼, 실존, 사랑, 의무, 신뢰, 책임, 배려, 도덕과 같은 숭고한 낱말은 경영학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이익, 판매, 투자, 승리, 시장, 보상, 광고, 전략 등과 같은 살벌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을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다룰 때, 짐승처럼 다룹니다. 용산 제4지구 철거민의 저항을 진압한 방식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해고노동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 짐승을 다루는 방식과 거의 유사합니다. 영혼, 실존, 사랑, 배려, 도덕과 같은 용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정글입니다. 여기에선 아무도 보호하고 의지할 언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알아서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시비를 붙고 싶은 것은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8번입니다. 이용자의 만족도를 조사한다면 모집단과 표본집단의 문제, 설문지 설계, 설문시기와 해석의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상에 연결시키는 문제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조차 화장실의 청결도와 같이 너무나 뻔한 것을 만족도 조사라는 예산과 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냅니다. 이런 수준의 것을 이용자의 만족도 조사로 해결하려는 발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대부분은 만족도 조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화장실보다 더 큰 문제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더 방대한 양의 만족도를 조사하는 방식의 해결책을 낼 것입니다. 대부분 대기업에서 고객만족도를 조사합니다. 그것을 그 기업의 평판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만족도 조사가 우리나라에서는 큰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협회마다 만족도를 조사해서 상을 주고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컨설팅 회사에서도 꽤 장사가 되는 아이템입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만족도가 중요하다고 떠듭니다. 학생들이 화장실의 청결도를 이용자의 만족도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통계학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계는 통계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고객만족도 같은 수치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경영진을 만족시켜 드릴까요, 아니면 긴장시켜 드릴까요? 조사를 담당한 컨설턴트는 사전에 그렇게 묻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다고 생각되면 분위기를 파악해서 적당한 수치조정을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조사결과는 고객의 만족을 사실대로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족도 조사를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만족도 조사는 매우 비생산적인 행태입니다. 이것이 다 상업화된 수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족도 조사와 같은 설문지 뿌리는 것이 거의 산업화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설문의 대상이 됩니다. 나도 수없이 설문조사에 답했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질문에 엉터리 같은 답을 수없이 골랐습니다.

 

둘째, 만족도를 아무리 조사해도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인적 물적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만족도를 조사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가의 경영철학 결핍이 고객만족도에 나타나지만, 그것이 원인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고객접점에 있는 세일즈맨들만 죽어나는 것이지요.

 

셋째, 만족도는 조사과정에 쉽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조작하는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모집단과 표본 설계, 설문지 설계와 조사시점 등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의도한 대로 통계를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만족도를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부하들의 상사경영에 관한 만족도 또는 조직풍토(organizational climate) 등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조사입니다. 부하들이 상사의 무엇에 불만이 있고, 그것이 조직풍토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상세히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이제 화장실 청소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직도 화장실의 청결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 많은 비용을 들여 이용자의 만족도를 조사하시겠습니까? 청소원은 누구라도 화장실에 일단 들어가보면 깨끗한지 지저분한지 금방 압니다. 만족도를 조사해야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상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청소원도 알고, 관리자도 압니다. 고객만족도를 높여 더 많은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청소하는 사람과 그냥 더러우니까 참을 수 없어서 청소하는 사람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 같으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 청소원이 화장실 청소에 대한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 화장실 청소에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을 배치할 것입니다.

 

청소원이 화장실을 보고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럴 마음이 없는 청소원에게 만족도 조사결과와 성과급을 들이대도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에 돈의 액수를 보고 청결도를 결정하는 청소원이라면, 나중에는 아마도 돈의 액수를 한없이 올려주어야 깨끗한 화장실을 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청소원에게까지 신자유주의적 자본개념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짐승같은 경영진들처럼 말입니다. 돈을 보고 하는 일이라면, 화장실 청소든 월 스트리트의 투자은행 일이든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화장실 청소에서 상품판매로 확장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객이 만족해하는지 아닌지는 누가 가장 잘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일즈맨입니다. 자신의 판매행위에 자부심을 가지고 고객과의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세일즈맨이라면, 고객이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일즈에 재능을 보이는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세일즈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일즈가 아주 고통스런 일입니다. 세일즈맨의 역량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세일즈에 배치해 놓고, 고객만족도를 조사해서 관리하겠다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외부기업체에서 내 강의를 들은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도서관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화장실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수님께서 강연 중에 던지신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해답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추상적이었다. 속으로는 모두 간단하고 직설적인 답을 내놓고 싶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있고, 두 번째로는 뭔가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대답보다는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대답을 내놓는 것이 있어 보인다는 오래된 관습 같은 것에 굴복했으리라. 아니면 회사에서 항상 깔끔한 프리젠테이션만 듣고 보다 보니, 간단하고 원초적인 해결방법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의심하는 병이 생겼을 수도 있다.

 

화장실이 더러운 것은 들어가서 눈으로 보면 알고, 냄새를 맡아보면 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화장실에 시간 별로 체크리스트를 붙이고, 복잡한 의사전달체계와 확인시스템을 만들어야 화장실이 깨끗해지는 건 아니다. 화장실이 더러운 것을 보고 손을 걷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을 뽑아 놓으면 화장실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도서관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도서관계의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해마다 사서 자격증을 가진 문헌정보학과 졸업생들이 수천 명씩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사서로 채용해 줄 도서관과 정규직 사서자리는 터무니 없이 모자란다. 공공도서관 자체의 숫자도 모자랄 뿐 아니라, 공공도서관 한해 도서구입예산금액도 부족하다.

 

그런데 서울시 도서관경영은 이제 직접 관리체제가 아니라 대개 위탁경영으로 바뀌고 있다. 구립도서관에 취직해도 공무원이 아니라 위탁업체직원일 뿐이고, 정권이 바뀐 이후부터는 밤11시까지 공공도서관을 개관하라는 지시가 있어 연장근무를 하게 된다. 연장근무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연장근무를 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밤에만 근무하는 비정규직을 뽑아서 충당하고 있다. 밤에만 근무하는 직원의 사기가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된다.

 

도서관에 처음 취직하고 나서 업계세미나에 참석할 때는 도서관학계의 일원이 된 듯 기쁜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해보고 우리나라 도서관계가 왜 이리 발전이 더디고 어려운지 알 것 같았다. 화장실이 더러운데도 사람들은 화장실을 치울 생각은 하지 않고, 허울좋은 청소체크 리스트 만드는 방법, 리스트를 잘 만드는 방법 등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도서관계와 청년 문헌정보학도들의 미래는 어둡고학자들의 관심사는 현장과 괴리된 이론세계에 있다. 사서들은 복지부동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는 되도록 눈을 돌리려 한다. 이 부분은 나로선 참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 이용객들의 만족도를 조사하면 도서관이 좋아질까요? 우리나라 도서관계의 가장 큰 문제는 도서관을 짓고 운영할 예산을 터무니 없이 적게 배정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력 10~13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국민을 무지몽매한 상태로 묵어 놓으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근본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피상적으로 만족도를 조사하는 터무니 없는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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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1962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자유경제에서 기업이 지는 사회적 책임은 오로지 하나뿐인데, 이는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한에서 기업이익 극대화를 위하여 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위한 활동에 매진하는 것, 즉 속임수와 기망행위 없이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에 전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사회적 책임은 조합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의 책임은 법의 틀을 확립하는 것인 것, 이러한 법은 다시 한번 애덤 스미스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법이 되어야 한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고양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항상 사회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자기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공익추구의 의도를 가졌던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익을 위하게 된다. 나는 공익을 위한다는 사람들치고 실제로 공익에 많은 도움이 된 예를 알지 못한다.’

 

기업의 임직원들이 주주를 위해 되도록 돈을 많이 버는 것 말고 다른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현상보다 자유사회의 근간을 근본적으로 허무는 경향은 드물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체제전복적인 교리다. 만일 기업인들이 주주들을 위해 최대 이익을 실현하는 것 말로 달리 사회적 책임을 진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들이 알 수 있는가?”

(밀턴 프리드먼, 심준보 외 옮김, 『자본주의와 자유』, 청어람미디어 2007, 214~215)


프리드먼의 글은 기업의 목적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논쟁은 오래 가지 않았고, 신자유주의 이념이 승리했습니다. 기업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영리추구로 귀결되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기업은 영리추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즉 신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이 정립되었습니다.

 

1.     민영화

2.     자유로운 시장과 교역

3.     정부 재정지출의 최소화

 

이런 신자유주의적 지도이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상세히 살핀 사람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1970~)이었습니다. 그녀는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 살림Biz 2008)을 썼습니다. 특히 남미의 국가들이 어떻게 경제성장 과정에서 좌절을 겪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살피고 있습니다.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하에 있던 칠레의 개혁과 카를로스 메넴의 지도하에 있던 아르헨티나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거의 재난의 상태로 끝났습니다. 남미 국가들은 민영화와 자유시장 정책을 통해 물가의 폭등과 양극화의 심화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말하긴 어렵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에 근거한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했던 러시아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던 멕시코도 남미와 거의 같은 상태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의 세 가지 기본정책, 민영화, 자유시장, 감세조치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명박 정부의 지도이념이기도 합니다. MB정부가 구성되자마자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비롯한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먹는 물까지 민영화하겠다고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를 거의 규제 없이 수입하겠다고 했고, 용산 제4구역 철거민들의 저항을 일거에 쓸어버림으로써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에는 항상 속임수가 있고, 그 속임수를 사회적 약자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이 심화됩니다. 또한 부자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감면해 줌으로써 확실한 감세조치를 취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한결같이 피도 눈물도 없이 사익(私益)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는 실용이란 존재할 수 없는 허구입니다. 인간은 이념적 바탕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의 성공과 행복은 어떤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우리나라에 강력하게 적용될 경우 과연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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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질문이 있어서, 성경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뿌리 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한 시간 일한 근로자나 뙤약볕에서 10시간 일한 근로자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어떤 식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오늘날의 지성과 합리성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죠..

 

혹시 일용근로자들의 새벽 인력시장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적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일해서 일당으로 사는 분들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입니다. 남대문 근처를 비롯한 서울 전역에 여러 군데서 새벽마다 노동시장이 섭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 작업장에서 봉고차를 몰고 와서 필요한 인원수만큼 데려갑니다. 뽑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건장하고 힘 잘 쓸 수 있고 숙련된 것처럼 보이는 순서대로 뽑힙니다. 이 인력시장에서 뽑히지 못한 사람은 그날 하루는 공치는 겁니다.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일당을 벌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에도 이런 인력시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포도원 일꾼>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인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가서 필요한 만큼 데려왔는데, 오후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녁에도 나가 보았더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운이 없거나 무능해서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한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그날 일당을 똑같이 지불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절 참조)

 

예수가 들었던 이 비유의 맥락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술 더 떴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때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마태복음 1916~30절 참조)

 

일부 신학자들은 이 비유를 교회에 한정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세상 사람들을, 포도원은 교회를, 관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천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협의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일관된 가르침은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부의 탐욕적 추구가 악한 것이고,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뛰어난 지식과 고도의 합리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한 방에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이 인간의 뛰어난 지식인지 생각해볼까요? 대단히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는, 최근에 유행하는 이론 중에 보상(칭찬)을 통해 코끼리를 춤추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에 근거한 것인데, 보상에 따른 강화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의 보상제도가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확장하면 당근과 채찍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기업의 보상제도, 성과와 역량의 문제는 나의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인 포스팅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주 방문하셔서 읽고 함께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여느 짐승과 동일하게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을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의 거래적 존재(transactional being)으로 인식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따위 이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계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아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existential being)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인간의 뛰어난 지식 중에 형평성 이론(equity theory)이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하는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론입니다. 적어도 10배는 아니더라도 보상의 상당한 차이가 노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뛰어난 지혜입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계산적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뛰어난 지혜를 성경은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대학에서 현대적인 경영이론을 배울 때, 나는 그 이론의 정교함과 합리성, 그리고 실증가능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이론들이 현실에 잘 적용되기만 한다면, 훌륭한 경영성과와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거쳤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고 온갖 문제상황에 직면해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영이론들을 적용하면 할수록, 조직문화는 점점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시간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을 10:1로 결정해서 지급한다면 일단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계산합니다. 보상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더 이상 일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손익을 철저히 계산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될만한 것에는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조직문화가 어떻게 될까요? 이런 조직에는 공동체 정신은 사라지고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위한 계산만 남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아우를 대하듯, 사랑과 온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지름길입니다. 조금 못난 자식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듯이, 포도원에 제때 불려가지 못한 사람, 즉 사회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회에는 서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손익을 넘어선 사랑이 오히려 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하고, 그런 부의 향유가 사회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드는 선순환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북유럽의 사회모델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형평성을 따지는 계산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예수의 형상을 닮았고,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포도원 주인 같은 사람들이 꾸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스스로 그리스도(메시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Christian이란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기독교인들 스스로 자신을 작은 그리스도라고 인식한다는 것이죠. 독일어에서는 기독교인을 아예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도 그리스도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이 곧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겁니다. 놀랍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그러므로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생생한 가르침이 있을까요? 포도원 비유는 뒤늦게 포도원에 왔거나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 일꾼들에게, 그래서 생계가 막막해진 사회적 약자인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아니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예수의 명백한 가르침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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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외된 백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줄여서, 그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부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부자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재정이 힘들어졌습니다.
    세금을 어디선가 더 걷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농어촌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각종 세금감면을 폐지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농어촌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통계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더 가고 덜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니까요.

     

    부자들의 세금부담이 이토록 적은 나라에서 부자들에게 매기는 종부세마저 징벌적 조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영혼이 있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할 때의 자본과 재무제표상 자본계정의 자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무제표상의 자본을 추구하는 이념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란 자본계정을 무한히 확대시켜 가는 이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는 자본 그 자체가 끝없이 증식하도록 돕습니다. 자기증식을 끝없이 반복하는 세포를 의학적으로는 암세포라고 합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암세포처럼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 암세포에 의해 인간의 공동체 정신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명박 정부에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일까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기 때문도 아니고 마음씨가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신교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의 제자인가요, 아니면 예수의 제자인가요? 예수를 팽개치고 자본을 따르기로 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의향이 있다면 다음의 가르침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 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 1~16)


     

    예수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포도원에 일하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지를 받은 근로자들, 택배운송기사 등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예 노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도 바로 우리 이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불려오지도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들에도 똑 같은 몫을 주라는 가르침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바로 이 비유를 가슴에 담고, 애정이 없는 경제학은 인류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능력이 뿜어내는 힘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우주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위대하면서도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포도원의 주인처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007) 똑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는 러스킨의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로 변했습니다. 위대한 영혼이 된 것이죠. 러스킨의 이 책을 읽고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자 놓을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을 그 책의 이상에 따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 내 생애에 즉각적이고도 실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

     

    그래서, 간디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간디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개신교 장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러스킨은 묻습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똑 같은 품삯을 주어서 과연 포도원이 망했을까요? 오히려 더 흥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미국식 경영이 세상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이런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거부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히려 이 위기의 시대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복음 835)

     

    이 위대한 가르침을 받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어떤 조직이든지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 조직의 지도자가 매일 죽어야 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 날마다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살아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여러분은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복음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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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명>을 보면, 사회적 통념과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신선하긴 하지만, 그런 계명들이 실제로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 듣기 십상입니다

    모세의 10계명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무엇무엇을 하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윤리규범이자 행동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창고의 직업선택 10계명은 오늘날의 상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은 본능에 따라 행동합니다. 자신의 즉각적인 쾌락을 향해 움직이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능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본능에만 충실하면, 양육강식의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이 됩니다.

     

    근대 학문은 인간의 이러한 본능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이성작용과 감정작용을 바탕으로 하는 행동메커니즘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이 그 대표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합리모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심리적 효용(psychological utility)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주류경제학과 경영학이 욕망과 탐욕의 고삐를 풀어놓아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것을 잘 고안하면 노벨 경제학상을 받습니다.

     

    욕망과 탐욕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잘 활용하여 부를 쌓은 사람들을 우러러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인간에게 짐승과 같은 이런 본능적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본능의 폐쇄된 틀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짐승들과 다른, 이성과 감정을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합니다. 인간은 영혼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단순히 이성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짐승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면서,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신뢰와 평화를 쌓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게 합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습니다. 미세한 음성입니다. 이것을 흔히 양심의 소리라고도 합니다. 양심에 민감해야 이 세미한 울림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팔 소리처럼 아주 크게 들립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위한 인수위 시절에 인수위원들로부터 닦달 당한 어느 공무원이 관료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관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국민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일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기도 합니다. 권력 앞에서 양심이 숨을 죽인 것이죠.

     

    영혼이 없는 인간! 영혼의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인간! 이것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돈을 추구하고, 그 돈으로 쾌락을 쫓고,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하여 먼저 승진하고, 앞다투어 비단길 깔린 곳을 찾고,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곳으로 달려가고, 권력과 명예와 존경과 권위를 빼앗으려 합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련된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배웁니다. 23일짜리 리더십 코스에 참가합니다. 그리고는 윈윈하는 방법과 다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것이 짐승과는 다른,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 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으로 영혼의 능력이 발휘되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모세의 10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구체적인 행동강령의 형식으로 내려준 지침입니다.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전성은 선생님 역시 오늘날 이웃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준 것이지요. 이것은 어둠과 탐욕의 정글 같은 세상에서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내린 계시입니다. 이 계명은 패역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입니다. 영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제대로 실력을 쌓고, 이 지침대로 행동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외국에 유학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특혜를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요즘은 어떻게 하면 군대에 가지 않을까 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면제받기 어려우면 카투사나 통역병으로 지원합니다. 장차 이 사회를 이끌 젊은이들이 어떻게든지 편한 길을 택합니다. 여자 애들은 연예인처럼 성형으로 몸값을 올리려고 합니다. 짧은 치마로 남학생들의 시선을 끌기에 여념이 없고, 대학 캠퍼스는 화장품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자랑거리입니다. 점점 즉흥적인 욕망충족과 탐욕의 과시가 미덕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전성은 교장선생님의 직업선택 10계명은, 욕망과 탐욕의 자유로운 분출을 장려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리와 그 정신의 황폐함에 과감히 맞서서 거꾸로 가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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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신뢰와 평안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상업화와 경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적 유대감(solidarity)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겁나는 화두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서로 도와주는 것은 그들의 자활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가난은 자조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가 도와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정말 맞을까요?

     

    이런 발상은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복지수준이 높은 북구의 여러 나라,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 이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은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 국가들은 건재합니다. 이들 국가는 국민의 세금부담율이 평균 70%를 넘습니다. 소득의 70%를 세금과 보험료의 명목으로 정부가 거두어 간다는 말입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자가 볼 때, 전체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수탈한다고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갹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의 완벽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합니다. 이러한 국가운영시스템과 정부에 대해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앞서 얘기한 공정성과 투명성에서 나옵니다.

     

    국가운영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하다면, 신뢰가 생기고 공동체 운영에 대해 안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악을 쓰거나 속임수를 쓰면서까지 영악스럽게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사회안전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배려하게 됩니다. 만약 두터운 사회안전망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번 실패하면 쪽박을 차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하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긴장하면 자신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재기할 기회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사회안전망은 설사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쿠션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합니다.

     

    덴마크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높은 경쟁력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유럽은 세금 많이 내기로 유명한 지역. 높은 세금은 일하려는 인센티브를 감소시키므로 노동 공급을 줄이고 성장에도 부정적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북유럽의 노동 시간은 짧다. 그런데 왜 이들 나라의 경쟁력과 생산성은 높을까?

     

    코롬자이 전 국장은 높은 세금에 기반한 탄탄한 사회안전망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사회안전망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으므로, 구성원들이 유연한 노동시장 같은 개혁을 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덴마크는 사회안전망이 물 흐르듯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어낸 환상적 사례라며 미국의 자동차 노조와는 확연하게 대비된다고 평했다."

    (발 코롬자이 OECD 국가연구국장와의 대담, 조선일보 2009.6.13일자 C2)

     

    이런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은 의심할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의 표면에는 성공한 사람이 보상받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를 하며, 또한 수많은 좌절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성공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될만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을 위해 다수의 시민들이 고통 받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조치된 근로자들과 택배운송노조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시위하는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일부 좌빨 극렬분자들의 선동으로 보아선 안 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습니다.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잘라내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폭력성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북구모델은 꿈 같은 이야기일 뿐 우리나라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퍼주기식 복지를 실현하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들이 생겨나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얼핏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놀고 먹는 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맨날 놀고만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나카타니 이와오(
    中谷巖) 교수의 견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기업이 언제나 간단한 잉여인원을 해고할 수 있다.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고되어도 실업보험이 넉넉히 지급되므로 생활의 불안이 없다.

     

    이와 동시에 덴마크에서는 임금은 철저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한, 같은 회사에서 몇 년씩 근무한다고 해도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기술 승급인데, 실업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전국적으로 훌륭한 직업훈련소가 정비되어 있어서, 해고되면 무료로 즉시 직업훈련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끔 해고되는 것이 오히려 기능훈련을 할 수 있어 미래가 열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이점은 노동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크로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동성이 확보된다는 이점도 있다. 이것은 기업에게도 대단히 고마운 것이다. 왜냐하면, 과잉고용으로 골치를 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인원이 과잉되면 즉시 해고하면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노동비용은 당시의 경제정세에 맞추어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비용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국가 수준에서 보아도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산업구조의 전환이 용이해진다. 경쟁력이 없어진 산업에서 고용조정이 실시되면 해고된 노동자는 직업훈련학교에서 장래에 유망한 산업에 적합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기업은 새로운 산업을 시작해도 기술을 가진 노동자를 즉시 조달할 수 있으므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원활해진다.”

    (나타카니 이와오(中谷巖), 이남규 옮김,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기파랑 2009, 351~352)

     

    우리도 이런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이 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적 연대(solidarity)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잘 알다시피,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들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에는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장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국가를 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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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가 이제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내가 독일의 교육시스템을 부러워하는 것은 부모의 경제능력이 아니라, 개인의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의 박사과정까지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다소 영향을 받아서 대학에서 등록금을 조금 받고 있습니다만, 영미계통의 대학등록금에 비하면 껌 값에 불과합니다.)



    2011. 8.7.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경영학부, 20여년만에 여름휴가 중에 잠시 찾아갔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독일대학에 진학하거나 졸업하는 것은 경제능력이 아닌 학습능력을 공식적으로 보여주어야 가능합니다. 초중등 교육의 목표 역시 학생들에게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에 사교육시장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파악하여 학생의 진로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것인지를 감안하여 지도합니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의 진로지도에 크게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직업학교로 갈 것인지, 대학을 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교사의 추천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경제능력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 http://pssyyt.tistory.com/[독일교육 이야기]는 박성숙님이 독일현지에 살면서 싱싱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많이 방문해서 살아있는 교육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도 교수는 학생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교수의 강의를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학업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교수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수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합니다. 학생들은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대학을 떠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대학을 떠납니다. 독일 대학생들에게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처럼 입학하면 적당히 공부해도 졸업하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학과마다 중도 탈락비율이 조금 다르지만, 인기가 있는 학과의 탈락비율은 매우 높습니다.

     

    최근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1980년대만하더라도 경영대학의 경우에는 입학생 중에서 약 3/4이 중도에 그만 둘 정도였습니다. 대략 75%가 탈락한다는 말입니다! 상상이 되나요? 대학은, 학생들에게 자상하게 대하지만,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학생들이 대학에 등록금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수의 강의와 세미나는 학생이라는 고객에게 파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교수는 학생을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받기 위해 학생을 학교에 붙잡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학생들도 다른 학생과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상대평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공부할 때, 독일친구들은 나의 공부를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세미나 논문도 여러 차례 함께 토론하면서 교정해주었고, 내 성적이 그들보다 더 좋았는데도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어서 독일대학 사회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제의 와 오늘의 가 경쟁하고, 미래의 는 오늘의 와 서로 경쟁할 뿐입니다.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절대적 경쟁입니다. 이런 교육철학과 사회운영시스템은 유럽의 대륙국가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2011. 8.7.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경영학부, 20여년만에 여름휴가 중에 잠시 찾아갔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교사나 교수는 학생들에게 공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경쟁하지 않는 체제 속에 있는 학교와 학생들이 경쟁력이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쟁하지 않고도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바로 정부의 올바른 교육철학과 정책에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는 교육기회의 균등한 배분이야말로 경쟁력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31) 정신이고, 정부에게 의무 지운 요구사항이기도 합니다.

     

    만약 등록금을 받고 그 등록금으로 대학이 운영된다면, 학생들에게 그렇게 엄격하게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지요. 학생들을 가급적 많이 끌어 모아 적당히 학점 주고 졸업시키겠지요.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끌어들여 학교 이미지를 높이려고 하겠지요. 이런 정신 나간 대학이 우리 사회에서 세칭 일류대학이라는 겁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립대학들은 학점 또는 학위증의 상업화에 심각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돈으로 거래될 수도 없고, 또한 거래되어서도 안 되는 가치(학력 또는 학문적 수준의 인정)를 시장경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업화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학교육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뇌된 것이죠.

     

    이런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실력보다는 스펙으로, 본질과 내용의 질적 수준보다는 포장의 화려함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무의미한 경쟁과 스트레스. 불신과 불안을 선물했습니다. 공동체적 연대감의 해체와 극단적인 이기심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적 표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황폐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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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불공정한 게임은 구성원간의 갈등과 폭력을 강요한다고 했습니다. 공정한 게임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공정하게 경쟁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불공정성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ic)에 기인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거래당사자 둘 다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속일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책당국자와 시민, 정치가와 유권자, 상인과 고객, 상사와 부하,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대기업과 하청업체, 경영진과 종업원, 검찰과 피의자 등등

     

    대개의 경우, 어느 한 쪽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여서라도 더 많은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몇 차례 터무니 없이 속는 거래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처음에 서울에서의 삶은 참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독일에서 하던 대로 중고차를 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세요. 그 후로 다시는 중고차를 사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시장경제에서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자동차와 같이 물질적인 것들은 정보비대칭성에 의한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정보 차이에서 오는 불이익을 사후에라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속은 다음에는 또다시 속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물질적인 대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물질적인 대상이 시장경제에서 반복적으로 거래되는 경우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폐해를 입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폐해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교육과 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이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우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교육을 과연 상품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은,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었듯이, 그 자체로서 공공재이기 때문에 상품화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교육이 상품화되어 시장경제에 편입됨으로써 사교육시장이 발달했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국민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대 정부가 국가의 마땅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사이, 사교육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정부가 조금만 소홀히 해도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시장경제의 품으로 포섭해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교육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교사와 학생 사이에 엄청난 정보비대칭성이 발생합니다.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은, 교사와 학생들은 실질적인 인격도야와 잠재력의 계발보다는 점수위주의 공부를 통해 소위 일류학교 진학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등록금을 매개로 학생은 고객이 되고 교수는 상인이 되기 때문에 정보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자동차를 사고파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보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브랜드이미지가 낮은 대학에서는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광고선전을 해대고 있고, 심지어 교수들은 연구보다 대학 세일즈와 학생유치에 더 바쁩니다. 어떤 대학에는 직업사관학교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습니다. 대학인지, 직업훈련원인지, 아니면 영리기업인지 그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업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 폐해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상업화되면, 그 자체로서 존립하기 위해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대학은 많은 학생을 끌어 모아 등록금 받는 수준에서 적당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적당한 수준에서 학점 받고 졸업합니다. 부족한 것은 또 다른 사교육시장에서 때우면 됩니다. 교육이 시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부유층과 저소득층 사이의 정보비대칭성이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교육처럼 상품화될 수 없는 영역까지 상품화하여 시장경제에 편입시키려는 자본주의 이념의 탐욕적 속임수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첫째, 교육과 같이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은 과감히 공적 영역으로 원위치 시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모든 정보의 처리와 유통이 공정하고 투명해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이 음침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아, 정보의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햇볕 아래로 끌어내야 합니다.

     

    일부 상품화된 시장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회복하라

     

    우선, 첫 번째부터 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상업화의 논리가 심각할 정도로 팽배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택공사와 토지공사 같은 공기업을 세운 것인데, 이들이 자신의 존재목적을 잃고 집장사, 땅장사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은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은 원가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서 가격구조를 시민들이 완전히 알 수 있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당시 참모들 중에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꾐에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고급주택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것은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민주택은 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공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택공사와 같은 곳에서 원가를 공개한 후, 회사의 존속을 위한 일정한 마진을 붙여서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공급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민간 건설업자들의 터무니 없이 높은 분양가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주택공사의 원가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볼펜 한 자루의 원가를 공개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시장경제를 거부하는 공산당식 발상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시장기능으로 포섭시켜야 사회가 균형을 잡는다는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볼펜과 서민주택을 같은 차원에서 보는 사람이 제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볼펜은 없어도 대체가 무한정으로 가능한 상품이지만, 그래서 가격을 통제할 필요가 없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든 보이는 주먹에 맡기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민은 집이 없으면 판자촌이나 쪽방 신세가 됩니다. 아니면 노숙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은 집 없는 설움을 경험해 보았나요? … 그러므로 서민주택은 서민생활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에 공급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라

     

    그 다음, 두 번째 이슈를 보겠습니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이 성립하려면, 경쟁질서가 매우 공정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가 완전하고 투명하게 유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정보는 결코 완전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정보비대칭성이 시장의 불공정성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불공정한 경쟁의 원인이 되고, 결국은 기득권층의 속임수 게임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정부는 이러한 속임수 게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처리하고 유통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가치, 공정성과 투명성의 가치를 실천하면 됩니다. 공정성과 투명성은 그 자체로서 매우 높은 사회적 가치입니다. 공정성은 정의로운 사회와 관련하여 철학적 논의가 가능하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매우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운영메커니즘이 초등학교 운동회와 같이 공정하고도 투명한 게임이 되도록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갈등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정보처리와 유통에 있어 공정성과 투명성으로도 구분됩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진실한 정보의 처리와 유통을 부담스러워 하고, 가급적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해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가급적 공개하지 않습니다. 뭔가 속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린 데가 있어서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보수진영에서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 부인하다가 진실이 밝혀지면 그건 오해였다고 잡아 뗍니다. 최근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소리죠. 보수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특히 사학비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육과 학문이 상업화되면서 생긴 치욕적인 일인데, 사학비리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시장경제의 탐욕성과 그 폭력성을 사학비리에서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교육을 상업화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키워온 역대 정권의 업보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학의 투명한 운영을 위해서 법을 개정하자고 하면 엄청난 저항에 시달릴 것입니다. 사학의 온갖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학을 운영하는 기득권층에서는 정보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무서운 겁니다.

     

    그러므로 사회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정성과 투명성입니다. 이 두 개의 덕목은 상호보완적입니다. 공정해야 투명하게 될 수 있으며, 투명해야 공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무에 있을 때 활용했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서가 내 방에 수시로 들어오지만, 그 때마다 반드시 문을 열어놓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투명성 때문입니다. 만약 문이 닫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와 비서 사이에 아무런 이상한 거래가 없었지만, 투명성의 결여로 공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문을 열어 놓은 채 불공정한 또는 부적절한 거래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정했다면 투명한 조치에 승복해야 하고, 투명하고자 한다면 공정한 조치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덕목, 즉 공정성과 투명성은 사회운영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에 근거하지 않은 경쟁력이란, 월 스트리트의 붕괴에서 보았듯이,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사회와 조직이 이렇게 설계되고 운영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며, 삶에 대한 안정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보적인 입장은 항상 공정한 정보의 투명한 유통을 중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보처리와 유통은 신체의 혈류와 같습니다. 이것이 완전하고 투명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정보에 특정계급을 위한 속임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선진사회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덴마크를 포함한 북구의 여러 나라는 완벽한 정보의 투명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북구 여러 나라처럼 풍요로우면서도 공정하고 투명한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경영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덕목입니다.

     

    간단한 사례를 들어볼까요?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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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15 신자유주의 시장경제(6)_불공정한 경쟁은 갈등과 폭력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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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07 신자유주의 시장경제(1)_미국이 신봉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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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노상에서 강도가 옆구리에 칼을 대고 돈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른 꺼내주겠죠.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면 됩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겠지만, 오늘 하루 일진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면 그뿐입니다. 앞으로 조심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리에 온통 강도와 절도범이 우글거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심각한 문제가 생기겠죠. 부자들은 사설경비원을 고용하거나 부자들만 사는 동네를 따로 조성해서 살면 됩니다. 하지만, 서민들은 어떻게 될까요?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부자동네로 이사 가서 부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상강도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중간지대는 없어집니다.

     

    실제로 남미국가들은 상당부분 이렇게 변했습니다. 미국사회도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른 경제정책의 결과로 빈부의 차가 심해져서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도 경제개발에 따른 빈부의 차이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공무원들의 부패가 겹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명박 정부는 지난 좌파 정권 10년의 결과라고 비난하고, 진보진영에서는 우파 정권의 부자들을 위한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양극화를 초래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경제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공정한 경쟁

    어쨌거나 부유층과 강대국은 악마의 맷돌을 계속 돌림으로써 서민들과 가난한 나라로부터 돈을 빨아냅니다. 그 메커니즘은 복잡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노상강도질보다 더 무자비하지만 스마트한 방법이 있습니다. “자유경쟁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노상강도처럼 무식하게 돈을 빼앗아가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경쟁을 시키면 됩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해봤을 겁니다.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합니다. 1,2,3등을 뽑아 시상대에서 상을 주고 칭찬합니다. 등수에 들면 그래서 어깨가 으쓱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뜀박질을 잘 한다고 인정해줍니다. 여기서 주는 상은 사용가치보다 뜀박질에 대한 사회적 인정(recognition)입니다. “자유경쟁이라면 우리는 보통 이런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유경쟁은 매우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자유경쟁의 원리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자유경쟁이 선하고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초등학교 운동회는 눈에 보이는 게임이므로 속임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초라한 운동회지만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한다는 규칙 말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서 기회도 균등합니다. 이 규칙을 어기면 그 동네에서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규칙을 통과하여 1등을 한 사람도 전부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뿐입니다. 물질적 보상은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시장경제에서 경쟁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우선 시장경제는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세계라는 점이 운동회와 다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속임수가 횡행하지만 잘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속임수가 워낙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속임수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우리의 정신 속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예를 들어볼까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 아이의 타고난 재능과는 상관없이, 학업기회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출신배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의 자유경쟁원리가 적용된 이후, 지난 수십 년간 부유층 자녀들의 일류대학 합격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교육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돈이 없는 집안에서는 일류대학을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헌법 제31조 제1)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학습능력이 아니라 집안의 경제능력에 따라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시장경제에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현실은 지금 어떤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은행융자를 알선하면서 직장인 신용대출금리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학자금융자 제도야말로 기득권층이 정부를 끼고 벼룩의 간을 빼먹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대학마다 매학기 등록금인상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심지어 여학생들이 삭발투쟁을 하는 장면을 볼 때 가슴이 무너집니다. 기성세대와 정책당국자들은 젊은이들의 이런 절규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 저 비정함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대학생들의 등록금은 정말이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입니다.

     

    내 얘기의 핵심은 우리 사회는 매우 불공정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공정한 사회가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유경쟁의 전제는 동일한 출발선이어야 하는데, 그 전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 아닙니다. 현실의 불공정성을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포장으로 살짝 바꿔서 속임수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임의 이면에는 부유층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불공정한 게임은 이긴 자에 대한 인정과 존경보다는 불신과 질투심을 유발합니다. 심지어 적개심을 품게 합니다. 제도적으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공정성이 이면에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겉에 드러난 현상만을 보면서도 불안을 느낍니다. 불안을 느낀 사람은 그 원인을 모를 때, 자기보호를 위한 폭력적 방법을 구사하게 됩니다. 사회적 불안과 갈등은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타짜>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김혜수의 ,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가 압권인 영화입니다. 바로 그 영화에서 타짜가 타짜인 것은 속임수에 능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게임이라면 노름판에서 승률이 통계학적 범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속임수를 쓰면 늘 이길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기득권층은 늘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폭력성이 있습니다.

     

    노상강도질과 타짜의 속임수는 범법행위로 처벌 받지만,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그러나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속임수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게임은 처벌은커녕 더욱 장려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경쟁은 심지어 민주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장경제에서 취업시장은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상거래는 누구도 강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잘살고 못사는 것 역시 자기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장메커니즘은 겉으로는 매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기득권층에 유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영화 <타짜>에서처럼 불공정한 게임이 된다는 말입니다.

     

    , 공정한 게임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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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한나라당 소속 나경원 의원이 엘르라는 잡지의 모델이 되어 화보를 찍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모델료는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국회의원이 잡지모델이 되어 화보사진을 찍을 수 있다 없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업적이지 않은 공익잡지에는 얼마든지 모델이 될 수도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홍보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상업화될 수 있는 영역과 상업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계가 모호하지 않습니다. 공적 영역은 어떤 경우에도 상업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상업화 현상은 항상 인간의 정신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경원 의원은 자본주의적 이념이 갖고 있는 무차별적 상업화의 위험성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상업화 논리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나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를 객관적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할 국회의원이 상업적인 일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는 것은 이미 그 정신이 상업화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 역시 아리송합니다. 모델료는 기부했다 어쨌다, 요즘 찍은 게 아니고 4월에 찍었다, 등등모델료와 촬영시기는 사태의 본질이 아닙니다. 상업적인 잡지에 몸을 맡긴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경원 의원은 자신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됐다는 얘긴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은 억울하다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인간의 정신에 파고드는 집요한 상업화 또는 자본화 현상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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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