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1.04 인간이란 무엇인가(6)_인간의 실존성 (1)
  2. 2008.10.28 인간은 실존한다 (4)

지난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1)_인간을 보는 눈
          인간이란 무엇인가(2)_경영학의 인간관 문제
          인간이란 무엇인가(3)_이데올로기의 문제
          인간이란 무엇인가(4)_이데올로기와 이성적 판단능력
          인간이란 무엇인가(5)_존재와 실존


실존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해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나는 실존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만약 내가 이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머리에 떠올리면서 강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내 수업에 들어온 학생일반일 뿐입니다. 과외학원에서 시험 잘 보려고 수강하는 학생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수강생 개개인에게 내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그냥 인간일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의 실존적 관계가 아니라, ‘그것의 대상적 관계일 뿐입니다. 클래스의 사이즈에 관계없이 그렇습니다. 물론 사이즈가 크면 더 불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10명 내외의 클래스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수강생 개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게 되니까요.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펜이 있습니다. 이 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아니, 좀더 심오하게 펜의 존재목적은 뭔가요? 글씨를 쓰는데 있습니다. 만약 망가져서 더 이상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면 그 펜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우리는 그 펜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별로 비싸지도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사서 쓰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요? 인간의 본질은 뭔가요? 인간의 존재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소크라테스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유해 왔지만, 결국은 인간의 본질, 즉 그 속성과 존재목적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펜처럼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만 유독 다른 사물과는 차별화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체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의미들의 총체가 인간의 본질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나의 삶의 일상적 의미가 인간일반의 본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얼굴에 난 뾰루지가 이라크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병사들보다 더 신경 쓰인다는 말입니다. 뾰루지는 지금 삶의 일상적 의미로 연결되지만, 병사들의 죽음은 그냥 나의 삶과 상관없는 인간일반들의 사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뾰루지보다 더 병사들의 안전을 생각하면서 미국의 전쟁유발 원인을 찾아보고 평화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이 어떤 것이냐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접하는 정보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다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인간의 모든 상황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실존은 영혼의 능력이 발휘되는 가장 좋은 방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보편적 경험과 일치합니다.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법률로 정해놓지 않더라도 마땅한 인륜적 지식이자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 중의 고급관료와 지식인들은 곤경에 처한 동족을 모른 체하고 지나갔지만, 그들이 천하게 여기던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그 유대인을 데려다 극진히 간호했다는 얘기입니다. 유대인이든 누구든 인간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본질에 대한 죽은 지식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살아있는 실천을 감행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영혼의 능력이며, 이렇게 영혼의 능력이 발휘되는 현상을 나는 실존적 상황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학사 2008.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45년 파리에서 강연한 내용을 텍스트로 만든 것이라서 아주 얇은 문고본입니다. 천천히 읽어내려 가면서 사유의 깊이를 음미하면 오늘날에도 동일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대변했던 일련의 철학적 사조를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앞서 언급한 키에르케고르였고, 독일어 권에서는 니체, 하이데거, 카프카와 같은 사람들이, 불어 권에서는 사르트르, 카뮈 같은 사람들이 실존주의 철학적 사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고민했던 문제의 공통점은 그 당시에 본말을 전도시키는 지배적 관념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실존의 문제와 그 성찰은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는 철학사조가 아니라, 인류에게 끊임없이 창조적 삶을 영위하도록 용기를 불어 넣은 사상적 기반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실존적 상황입니다. 인간을 실제로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실존적 상황을 가능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나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정우 교수의 『개념-뿌리들 02(철학아카데미 2004)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영혼이라는 말보다는 마음 또는 의식 또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실존을 가능케 하는 영혼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줍니다. 영혼은 인간을 살아 숨쉬게 만듭니다. 영혼은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영혼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물의 간격에 창조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은 그러므로 영혼이 부여한 풍부한 의미로 외부세계와 연결되어(connected)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실존적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고, 인간의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다고 생각해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인간이란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다.”

  

여기서 영혼의 능력이란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에너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혼의 능력은 그러한 잠재력을 찾아내어 의미 있게 활용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자기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미래를 향하여 성장하도록 추동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여러 해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젊은 병사들 수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수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시는 미국의 병사들과 이라크 국민들을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하는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그 일파들의 탐욕을 위해 그냥 인간일반의 무리들이라고 간주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명분도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살육되도록 만들었던 겁니다. 만약 부시에게 미국시민 개개인을 영혼이 있는 실존적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미국에 아무런 위협도 없었던 이라크와 전쟁을 치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료들은 영혼이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권력에 따라 줄을 대는 모습을 빙자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지 않고 시키는 대로 그냥 처리한다는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치지도자들은 관료체계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관료들을 영혼이 없는 로보트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 거듭나게 해 줘야 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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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다고 칩시다. 왼손에 사과가 있다면, 오른손의 칼이 무엇을 뜻할지는 뻔합니다. 누구나 내가 과일을 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왼팔로 한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면 오른손의 칼은 무엇이 될까요? 살인무기가 됩니다. 이렇듯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관계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칼은 장인(匠人)의 영감에 의해 종이나 과일을 자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직접 말했듯이, 칼에 있어서는 본질(라틴어로 essentia), 즉 과일 깎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가 실존(라틴어로 existentia)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고유한 특성, 즉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실존에 앞섭니다.

 

사실 서양철학사에서 본질과 실존의 문제는 고대그리스철학에서부터 내려온 존재론과 인식론의 긴 여정의 산물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항상 본질(essentia)과 그 본질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존재(existentia)의 문제로 나뉘어서 사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 또는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칼이 장인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2,500년간을 철학자들이 사유해봤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알 수 없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existence)를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존재를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실존(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존재에 부합하는 이 실존(實存)이라는 용어를 좋아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물들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존재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만 실존한다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인간은 영혼을 가진 실존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명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존한다는 말은 사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PC에 글쓰기와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가 PC와의 풍요로운 관계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이러한 관계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성(實存性)이란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과의 관계설정은 실존하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사는 부하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경영자가 구성원을 한낱 조직목표달성의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인간의 실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직생활의 고단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을 한낱 욕망의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마음과 마음은 단절되어 갈등이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모든 인간을 실존적 존재로 평등하게 인정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을 실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수천 명의 미군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부시의 눈에는 미군병사들과 이라크 시민들이 존재를 위한 존재’, 즉 실존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말하는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나’(Ich)와 ‘그것’(Es)의 관계로 바뀝니다. 인간사회의 불행은 대부분 상대방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 즉 ‘그것’(Es)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존에는 타인의 실존이 필수적입니다. 나의 실존성을 보장하는 것은 타인과의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부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단절되어 있는 착취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 철학이 한 때 유행하는 철학적 사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는 영원한 사유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만 인간의 실존성이 문제되진 않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다 실존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상사는 그의 부하들의 실존성을 존중해 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하들도 상사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당장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업가들은 사업파트너들을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간에도 그랬을지 모르고,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강의를 듣는 기업체의 간부들을 오로지 내 수입을 늘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영혼에 진정으로 보약이 되는 내용을 포기하고 당장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과 마음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효율성(efficiency)이 가장 높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단점이나 취약점이 드러나더라도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과감한 시도를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은 신뢰의 표상이며, 신뢰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반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옆에 있을 때, 넘어지더라도 과감히 걸음마를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타인을 실존적 존재로 인식하여 그와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에 있었을까? 우선 나의 아내와는? 부모형제와는? 아이들과는? 내가 사업상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그들이 나를 실존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내가 상사였을 때 부하들에게 그들의 실존성(자유, 선책, 책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나와 나의 상사는 어땠을까? 뒤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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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