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조직이란 무엇인가(5)_제3세대 경영학(Wholism)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적 합리성 너머에 비합리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제3세대 경영학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조직이론에 연결시키면, 조직구성원들간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연결되어 있음의 원리(principle of connectedness)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평안과 행복을 느낍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긴장과 불안이 엄습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부하들이 상사나 동료들과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평소의 행동패턴을 바꿉니다.

 

오래 전부터 조기유학 붐이 일고 있는데, 조기유학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입니다. 조기유학은 아니지만, 나도 유학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학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유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국어 문제도, 돈 문제도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인간에게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못된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하는 부모의 대부분은 아이들을 자신의 욕구에 부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아이들과의 연결상태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설계할 때는 어떻게 하면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이란 조직구성원들을 항시 일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휴대전화나 블랙베리(Blackberry)와 같은 물리적 연결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간의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의 연결입니다.

 

조직의 정의

 

이런 입장에서 조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조직은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어 발휘하도록 돕는 삶의 수단이다.

 

이제 제3세대의 경영학으로서의 조직이론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이유는 명백해졌습니다. 아직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1, 2세대의 경영학에서 보면 공동의 목표도 없고, 협동도 없는 조직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운영의 현실을 보면, 오히려 이러한 정의가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

 

첫째, 구성원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의 느낌(feeling of connectedness)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관심을 갖게 되는 첫 출발이자 신뢰로 나가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둘째,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도록 서로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이 그 정보와 에너지를 조화시켜서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셋째, 조직이 구성원의 삶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은 목적이 될 수 없고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삶의 풍요로운 수단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또 다른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직접적으로는 조직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이 창발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는 조직의 목적은 결코 이윤추구에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대차대조표에 나타나는 이윤은 인간의 잠재력이 발현된 결과이지 이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경영한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2세대 경영학과 완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기업의 존재목적이 이윤추구에 있다는 가정은 매우 편협한 가르침이며, 인간의 삶을 오도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최근에는 이윤보다는 조직의 이해관계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점을 흐리는 효과밖에는 없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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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중앙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습니다. 어느 현직 교사가 교권이 무너진 초등학교 교실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그것이 신문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나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런 현상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권이 무너진 초등학교 교실의 실상을 폭로하며 '체벌 허용'을 주장한 현직 교사의 책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서래초 영어교과 전담교사 김영화(55)씨가 쓴  『지금 6학년 교실에서는...』이다. 야단치는 교사에게 아이들이 욕하고 대들면서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현실이 소설형식으로 묘사돼 있다.

 

보도가 나간 뒤 기사와 관련된 e-메일과 전화, 인터넷 댓글 등이 쏟아졌다. “잘못하면 때려야 한다” “교권은 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는 등 체벌을 둘러싼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초등교사 경력 34년째라는 정모씨는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와기사 내용이 바로 내 얘기라면서정말 울고 싶고 하루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이달 초 2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2학년인 딸과 함께 귀국했다는 이은주씨도 메일을 보냈다. “며칠 학교에 다녀 보더니 아이가 수업시간에 떠들고 자는 학생이 너무 많아 놀랐다고 말한다. 야단친 교사 뒤에서 교사가 들을 만한 큰 소리로 욕을 계속하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안에서 생활 태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Back to the basic! (기본으로 돌아가라!)

교육은 학생들의 태도와 행동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어떤 경우에도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교육의 목적이 옳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주장은 오죽 했으면 그러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정도로 한국의 교육상황은 참담한 형편입니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면 체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벌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체벌은 비인격적이고 수치심을 유발하며 정신의학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학교와 사회의 경쟁지향적인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경쟁적인 상태가 되면, 이기심이 발동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줄어듭니다. 공감능력이 줄어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을 못할 뿐 아니라 전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터득하여, 자연스럽게 공격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협동하며 함께 일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합니다.

 

학생들의 공격성은 경쟁지향적 교육행정과 사회풍토가 만들어낸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적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 인간으로 대접 받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험성적으로 경쟁심을 유발하게 하면, 시험성적 이외의 가치에 대해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성(integrity)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며, 그 위에 사고력(thinking power)과 실행력(execution power)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기본을 잃어버렸습니다. 교사 한두 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선진교육을 실행한다고 인정되는 국가에서 시험성적순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서열을 매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교육의 목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육현장의 모든 초점은 시험성적이 아니라 독특하게 타고난 각자의 재능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항상 협력과 상생의 정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면서 교직사회에도 경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행태는 교육의 기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교육행정입니다. 교육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교사들에게 돈으로 차별화함으로써 교육행위의 동기부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교육행정에서 나는 매춘의 냄새를 느낍니다. 나에게 이것을 해주면 나는 너에게 저것을 주겠다는, 마치 매춘부에게나 강요하는 듯한 정책으로 피폐해진 교육현장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에 돈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개입하면 그 상황의 본질이 왜곡됩니다. 그러므로 교육에는 어떤 경우에도 돈이 개입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사들을 돈으로 경쟁시킨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은 교육자료와 교수방법을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돈으로 교사들의 교육행위를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치졸하고도 비효과적인 발상입니다. 교사들이 학생지도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할 일이 서로 경쟁해야 할 일보다 더 많고 더 중요하고 더 결정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훌륭한 교사들이 발휘하고 있는 역량을 추출하여 역량모형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교사들을 선발하여 배치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면, 교육계는 변화될 것입니다. 훌륭한 교사들이 많은데 어찌 교육계가 피폐해지겠습니까? 반복하거니와 돈으로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돈이 개입되면 돈 이외의 가치는 모두 사장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이념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교훈입니다.

훌륭한 교사를 선발하는 것도 시험성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과급을 내걸고 우수교사를 뽑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학생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피드백하는 역량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량의 전문용어로는 타인육성(Developing Others)이라고 합니다.

글쓰기에 곤란을 겪고 있는 학생에 대한 태도와 피드백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 지 보겠습니다. 그 학생의 숙제는 3 페이지를 채워야 했지만, 겨우 한 문단만을, 그것도 기한을 넘겨 늦게 제출했습니다.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출된 것은 겨우 한 문단이었어요. 하지만 문장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저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참 짧구나. 하지만 좋은 문장이야." 그 애가 써온 문장은 통일성이 있고, 앞뒤가 잘 맞는 글이었거든요. 문법이나 문형의 문제도 없었구요.


아이들을 무조건 칭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재력과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어 발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교사와 학생들간의 <연결되어 있는 마음(connectedness)>과 교사의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결된 마음상태는 아이들에게 매우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깨어있는 마음상태가 중요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관적인 기대를 표시하며, 자신의 불충분한 피드백 노력을 변명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그 애는 구제 불능이었죠. 그렇게 형편없는 애는 처음 봤어요. 문제해결능력이 전혀 없는, 산만하기 짝이 없는 애였어요. 번번이 저를 속이려고만 들었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같은 수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시험성적이나 성과급의 차이로 변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재의 선발에는 <역량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훌륭한 교사를 선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근무하는 조건을 잘 정비해야 합니다. 학생과 교사의 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게 한다든지, 교사에게 적정한 자율성을 교권으로 부여한다든지, 행정 잡무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든지, 교육행정을 보다 효율화한다든지 하는 교육환경의 시스템적 정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혁적 조치들이 우리나라 공교육을 살릴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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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달 Johnson & Johnson Medical Korea(JJMK)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조촐한 특강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존슨앤존슨은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그런 기업에 초대되어 강의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최대한 간단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경영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습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요즘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경제적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임직원들을 대거 잘라냄으로써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가는 방법에서부터 서로 마음을 연결함으로써 상한 영혼을 위로하고 서로서로 깨어있도록 독려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변화는 점진적 변화(incremental change)와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로 구분됩니다. 일상적으로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위기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 즉 불타는 갑판 위에서 꾸물거릴 것이 아니라 물 속으로 뛰어드는 변화를 감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를 일으키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불필요하게 보이는 임직원을 내보내는 구조조정? 복사지와 이면지도 아껴 쓰고 출장비를 깎는 자린고비?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임직원을 더욱 쥐어짜기? 새로운 사업에의 진출? 신성장동력의 발굴? 가능성 없는 사업의 정비?

 

만약 이런 조치가 불가피하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조직구성원들간에 마음과 마음의 연결 없이 이런 조치를 취하면 오히려 위기를 극복한 후에 더 큰 문제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구성원들이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를 일으킬 수 있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을 강조합니다.

 

위기극복을 위한 마음경영 - Johnson & Johnson Medical Korea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 변화의 피라미드를 구축해야 합니다. 양자적 변화는 마음의 상태를 바꿔주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면 그의 마음과 몸을 이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심신이완은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신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기업의 임원들이 제기한 질문을 여기에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직원들이 영혼의 능력을 어느 정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인간은 항상 완벽한 선택을 하고, 필요로 하는 자원을 무한히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래서 그런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직원들의 사고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의한 내용대로 또는 그런 수준으로 노력하면서 경영하는 기업은 어디인가? 또는 벤치마킹의 대상은 있는가?

     고객에게 납품해야 하는 기간이 주어져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리고 고객서비스와 고객만족도를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직원들과의 연결을 시도할 만큼의 여유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끝으로 존슨앤존슨의 『우리의 신조』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회사의 브로슈어에 나온 『our credo』를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신조에 따라 명실상부하게 사업이 이루어지는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OUR CREDO

 

We believe our first responsibility is to the doctors, nurses and patients, to mothers and fathers and all others who use our products and services. In meeting their needs, everything we do must be of high quality. We must constantly strive to reduce our costs in order to maintain reasonable prices. Customers’ orders must be serviced promptly and accurately. Our suppliers and distributors must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fair profit.

 

We are responsible to our employees, the men and women who work with us throughout the world. Everyone must be considered as an individual. We must respect their dignity and recognize their merit. They must have a sense of security in their jobs. Compensation must be fair and adequate, and working conditions clean, orderly and safe. We must be mindful of ways to help our employees fulfill their family responsibilities. Employees must feel free to make suggestions and complaints. There must be equal opportunity for employment, development and advancement for those qualified. We must provide competent management, and their actions must be just and ethical.

 

We are responsible to the communities in which we live and work and to the world community as well. We must be good citizens—support good works and charities and bear our fair share of taxes. We must encourage civic improvements and better health and education. We must maintain in good order the property we are privileged to use, protecting the environment and natural resources.

 

Our final responsibility is to our stockholders. Business must make a sound profit. We must experiment with new ideas. Research must be carried on, innovative programs developed and mistakes paid for. New equipment must be purchased, new facilities provided and new products launched. Reserves must be created to provide for adverse times. When we operate according to these principles, the stockholders should realize a fair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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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질문내용>

교수님... 강의록까지 올려주시니 대단한 정성이시라고 생각됩니다. (거의 한 권의 책을 읽는 듯하네요.) 올려주신 워렌 버핏의 자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요즘처럼 모두에게 용기가 필요한 시절에 다시금 되새길만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한 분이 질의해주신 궁극적인 인간의 선함에 대하여... 저 역시도 자주 같은 질문을 던져 보고는 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 궁극의 이데아를 머릿속으로 알고 있더라도 이를 삶에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마키아밸리적인 게임의 정치학, 표피의 정치학이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지 누구나 한번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융의 원형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원형적인 진리의 코드가 공유되어 있다는 실체는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더 나가 아이 같은 소박한 마음으로 인지의 지시에 앞서서 본연의 모습으로 선을 행하는 분들도 자주 봅니다.

 

그럼에도 내 자신의 현실 속에서 연결되기 위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갈 때마다, 궁극의 선함을 믿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때로는 고도의 게임을 수행하듯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배제하고 정치 게임의 논리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돈을 느끼곤 합니다.

 

지난 시간에 교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을 스스로 내면화해 본다면... 결국 하나의 명제나 의식 속에 떠오른 논리의 천명과도 같이, 모든 문제를 한 괘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Universe한 언명의 존재를 전제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실체적인 대가를 치러 하나하나 현실 속에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의 선택 속에서 답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Be가 아니라 Become의 지향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역시 아직도 수행이 부족한지라 몸따로 마음따로... 쉽지 않은 길이라 생각됩니다.

 

PS. 교수님, 한가지 부탁 말씀은... 부족한 내공으로는 객관식 문제... 어려웠습니다. 명확한 논점이 연상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는데요.(물론 공부도 부족했지만요.^^) 혹시 해설을 간단히 부탁드려도 될지요. 간단한 것들도 있었지만 좀 복잡해 보이는 것들은 답지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답변내용>

 

내가 지난 주에는 감기기운이 있어서 사이버캠퍼스에 들리지 못했었는데, 좋은 질문이 올라왔군요. 답변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질문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질문을 요약해보지요.

 

우선, 일과 관련하여 부하직원들이나 동료와 때로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도록 노력하지만, 때로는 상황에 따라 쥐어짜는 방식으로 태도를 바꾼다는 말이지요. 현실적으로 부하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물은 것이지요?

 

다음, 중간시험이 객관식이었는데도 생각보다 어려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문제풀이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지요?

 

질문에 대한 나의 이해가 맞다면 대답해보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직장생활에서 고민하는 대부분은 인간관계의 갈등과 스트레스입니다. 조직이 원하는 성과나 실적을 위해서 쥐어짜는 조직문화에서는 더욱 심한 불안과 초조, 좌절과 낭패를 느낍니다. 여기서 조직이란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상사와 그를 둘러싼 분위기입니다. 이렇게 상사와 분위기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문화적 세팅에서는 관리자들이 자기 혼자서 인간을 “영혼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실존적 존재”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전제에 직면합니다. 굳건히 그런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상사, 동료, 부하들이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본다면, 그 신념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신념에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당장은 편안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살벌한 상황에서 아귀다툼을 해야 하고,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여러분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문이야말로 여러분을 성공과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는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깨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이것을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마음챙김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특정한 범주 또는 시각에서만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그것에 몸과 마음이 얽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거나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 못합니다. 문제가 생길수록 더욱 문제에 집착하면서 문제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닫힌 마음 상태가 더욱 공고해집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에서 떨어져서 문제를 완전히 다른 범주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깨어있는 마음이라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매우 섬세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또한 완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때도 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한결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을 다 볼 수 있는 마음을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범주와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선하고 원래부터 악한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 의해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선과 악은 그래서 시대와 장소, 그리고 문화적 습속에 따라 다릅니다. 인간의 영혼이 선한 것은 그것에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영혼의 울림을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고정된 관점과 범주의 틀이 자리잡고 있어서 항상 그 틀로 사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굳어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아무쪼록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신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엄청난 고난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어있는 마음을 갖는 것은 마음의 프로그램을 바꾸는 훈련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물이 다시 보이게 되고, 늘 보던 풀 한 포기도 새롭게 보입니다. 내 폐부로 들어나는 공기도 새로워집니다.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인간관계도 새롭게 변화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사상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문헌을 소개합니다. 강의에서도 소개했는데, 다시 한번 더 소개하니 꼭 읽고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로,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성공적이고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의 과학적 검증을 거친 것이므로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처드 보이애치스/애니 맥키, 정준희 옮김, 『공감리더십』, 에코의서재 2007

엘렌 랑어, 이양원 옮김, 『마음챙김』, 동인 2008

존 카밧진, 장현갑 김교현 옮김, 『명상과 자기치유 상, 하』, 학지사 1998

장현갑, 『마음챙김』, 미다스북스, 2007

 

끝으로 중간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도 있고, 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험에는 객관식이지만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시험문제가 유출되면, 문제의 정답을 외우려 할 뿐 책을 더 찾아서 읽고 공부하거나 사고력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험성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정답이 무엇인지 알려주거나 공개적으로 해설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험성적을 알고 싶으면, 조교인 정종훈 선생(010-4920-6576)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런 성적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까지 알고 싶은 사람은 나에게 직접 개별적으로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질문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혹시 추가적인 의문이 있으면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최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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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 대한 시각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1961~)라는 무명의 흑인 상원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두고 여러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조지 부시(George W. Bush, 1946~) 대통령의 정책실패가 그 원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부시는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세계인들이 서로 유지하고 있던 연결고리마저 끊어지게 했습니다. 나아가 전세계인이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황폐해졌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시가 자신에게 붙어있던 권력의 참을 수 없는 유혹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숙주에 붙어 있는 기생충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은 아주 미묘해서 인간이 권력의 맛을 한번 보면, 그 맛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 권력을 사용하고 싶어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권력에 의지하게 됩니다. 권력에 서서히 중독되는 것입니다.

 

부시는 권력의 맛을 알았고, 그 맛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권력의 불장난이 주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권력의 사용이 반드시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버스가 지나간 다음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기생충은 숙주를 버리고 다시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납니다. 이번 미국의 대선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알아보겠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권력을 사회적 관계에서 저항을 누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모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힘을 권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저항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마음에서 순복하는 경우에는 권력이 필요 없게 됩니다. 권력이란 폭력 또는 물리적 강제력(Gewalt)과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사악합니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반드시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고, 그 사람은 그 권력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그 화려했던 왕조들의 멸망을 보면, 절대권력을 누렸던 왕들이 나타난 후에는 반드시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권력은 사악한 유혹인데, 이 유혹에 넘어가면 절대로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권력의 사악한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

 

봉건사회를 넘어 근대로 들어오면서도 권력의 사악한 유혹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입니다. 그리고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과 그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부시와 그의 추종자들인 네오콘도 자신들에게 붙어있던 권력을 사용함으로써 패배의 운명을 재촉했습니다. 뭔가 잘못됐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선택에 대해서는 인륜적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본인뿐만 아니라 불특정다수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러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먼저, 조직이 나아갈 목적지(end state)와 원하는 상태(desired state)를 비전/목적/방향으로 합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구성원들과 마음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전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마음(connectedness), 이것이 조직을 리드하는 기본 바탕입니다. 일단 연결되고 나면, 구성원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선택하고 협력해 나가도록 이끄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야 가능합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훈련을 거치면 자연스럽게 되지만, 우리 교육현실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성인이 돼서야 겨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합니다. 성인이 됐다 하더라도 훈련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설사 느끼더라도 훈련이 귀찮거나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의구심 때문에 훈련 받기를 포기하고, 가장 손쉬운 권력을 사용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하들이 하도록 명령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뭔가 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권력을 사용해서는 조직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위대한 인물들

 

위대한 지도자들은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을 보세요.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 1869~1948)는 권력사용 대신 물레질을 했습니다. 물레질이라는 상징을 통해 수억의 인도인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가 발휘한 영혼의 능력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간디를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Mahatma)라고 부릅니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옥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화해와 진실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포용했습니다. 포용하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영혼의 울림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바마가, 그럴 리 없겠지만, 부시처럼 권력을 휘두른다면, 미국은 더 큰 재앙에 직면할 것으로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 동안 권력의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행사할수록 저항이 심해진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성공여부는 권력의 맛을 빼느냐 못 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기업경영에서도 가능하다

 

이제 기업경영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권력사용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권력사용의 폐해가 극심합니다. 도산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경영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맘껏 사용했던 기업들입니다. 어렵게 기업을 일으켰던 기업가들이 나중에는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기업을 도산시킨 예는 한둘이 아닙니다. 관련된 분들의 명예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조직구성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기생충처럼 붙어있는 권력을 의지했습니다. 경영자들은 권력의 사악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이라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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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다고 칩시다. 왼손에 사과가 있다면, 오른손의 칼이 무엇을 뜻할지는 뻔합니다. 누구나 내가 과일을 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왼팔로 한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면 오른손의 칼은 무엇이 될까요? 살인무기가 됩니다. 이렇듯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관계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칼은 장인(匠人)의 영감에 의해 종이나 과일을 자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직접 말했듯이, 칼에 있어서는 본질(라틴어로 essentia), 즉 과일 깎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가 실존(라틴어로 existentia)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고유한 특성, 즉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실존에 앞섭니다.

 

사실 서양철학사에서 본질과 실존의 문제는 고대그리스철학에서부터 내려온 존재론과 인식론의 긴 여정의 산물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항상 본질(essentia)과 그 본질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존재(existentia)의 문제로 나뉘어서 사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 또는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칼이 장인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2,500년간을 철학자들이 사유해봤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알 수 없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existence)를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존재를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실존(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존재에 부합하는 이 실존(實存)이라는 용어를 좋아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물들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존재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만 실존한다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인간은 영혼을 가진 실존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명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존한다는 말은 사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PC에 글쓰기와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가 PC와의 풍요로운 관계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이러한 관계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성(實存性)이란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과의 관계설정은 실존하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사는 부하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경영자가 구성원을 한낱 조직목표달성의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인간의 실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직생활의 고단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을 한낱 욕망의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마음과 마음은 단절되어 갈등이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모든 인간을 실존적 존재로 평등하게 인정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을 실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수천 명의 미군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부시의 눈에는 미군병사들과 이라크 시민들이 존재를 위한 존재’, 즉 실존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말하는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나’(Ich)와 ‘그것’(Es)의 관계로 바뀝니다. 인간사회의 불행은 대부분 상대방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 즉 ‘그것’(Es)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존에는 타인의 실존이 필수적입니다. 나의 실존성을 보장하는 것은 타인과의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부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단절되어 있는 착취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 철학이 한 때 유행하는 철학적 사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는 영원한 사유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만 인간의 실존성이 문제되진 않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다 실존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상사는 그의 부하들의 실존성을 존중해 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하들도 상사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당장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업가들은 사업파트너들을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간에도 그랬을지 모르고,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강의를 듣는 기업체의 간부들을 오로지 내 수입을 늘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영혼에 진정으로 보약이 되는 내용을 포기하고 당장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과 마음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효율성(efficiency)이 가장 높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단점이나 취약점이 드러나더라도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과감한 시도를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은 신뢰의 표상이며, 신뢰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반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옆에 있을 때, 넘어지더라도 과감히 걸음마를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타인을 실존적 존재로 인식하여 그와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에 있었을까? 우선 나의 아내와는? 부모형제와는? 아이들과는? 내가 사업상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그들이 나를 실존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내가 상사였을 때 부하들에게 그들의 실존성(자유, 선책, 책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나와 나의 상사는 어땠을까? 뒤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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