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새로운 일에 집중하느라 블로그에 신경을 쓸 새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 블로그의 새로운 포스팅을 기다리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는데, 마침 런던에서 일하고 있는 딸이 편지를 보내왔네요.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지켜 본 바로는 딸과 아들이 매우 다른 성격적 특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인문학적 소양과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유학 중에 자신이 쓴 에세이를 가끔 보내옵니다. 나는 그 에세이를 읽고 감동하곤 했습니다. 영어로 쓴 문장이 그렇게 유려할 수가 없었어요. 글에서 영혼의 울림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딸은 문장력보다는 수학적 재능과 비즈니스 감각이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전공도 경영학(business)이었죠. 졸업한 후에도 런던에 있는 투자은행(Credit Suisse)의 파생상품을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로스쿨(law school)을 가겠다는 겁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모든 금융상품의 거래에는 반드시 변호사들의 사전 허락이 필요하답니다. 그들이 거래조건을 일일이 따져서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판단이 서야 거래가 성사되죠. 그래서 딸 아이 주변에는 여러 변호사들이 판을 치고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일하다 보니 변호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별 것도 아닌 일을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들이 소위 곤조를 부리는 사건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니꼽고 더러운 꼴을 몇 차례 겪었겠죠. 그래서 변호사 자격을 따야겠다고 맘먹은 모양입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함께 여행하면서 몇 군데 로스쿨에 합격을 해 놓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덧, 학교를 결정하고 회사와 협상해서 온갖 지원을 받아내 로스쿨에 등록을 한 모양입니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 다니는 코스여서 곱절은 힘든 과정이라고 합니다.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시집가는 게 효도하는 거라는 엄마의 강조는 뒷전으로 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향해 묵묵히 전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딸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길래 이 블로그를 사랑하는 분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딸이 써 보낸 그대로 옮겼습니다.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희망과 성취를 함께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엄마 그리고 아빠 그리고 한결,

 

예전에 친구들이랑 돌아가면서 쓰는 다이어리가 유행이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
좋아하는 운동: 수영
좋아하는 동물:
좋아하는 연예인: 송승헌 오라버니
장래희망: 프로골퍼, 모델 아니면 .....
...

 

이게 언제 쓴 글인지 아세요? 세상에! 깜짝 놀랐어요. 초등학교랑 중학교 다닐 때 뭘 안다고 국제변호사라고 썼을까? 소름이 돋아오면서, 역시 어딘가에 적어놓으면 꿈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지금은 꿈을 이루기 위한 현재진행형이지만). 

 

프로골퍼나 모델, 국제변호사는 너무나 다른 분야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가 했던 말이 내 장래희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아빠가 아마도 그 땐 골프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인 것 같아요. 아빠는 내가 골프채를 휘두르면 무조건 잘한다고 했고, 스윙이 시원하다고 하면서 칭찬을 해 주었어요. 나는 다리가 길어서 모델 해야 된다고 했던 말도 정말로 진지하게 들었나 봐요 ㅋㅋ. 모델로 빠지지 않길 천만다행이지요. 남들한테 폐 끼치는 일은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하니까 ㅎㅎ.

 

내 기억에는, 엄마 아빠는 내가 남의 일에 참견 잘한다고 해서 변호사해야 된다고 했던 것 같아요어렸을 때 남의 비즈니스에 참견하는 것을 야단치지 않고, 변호사가 될 아이라고 칭찬해 줘서 여기까지 왔나 싶어요. ^^  

 

지금 생각해보니 2009 9 26일은 내 인생을 길게 놓고 볼 때 의미 있는 하루가 될 것 같아요. 로스쿨에 등록하고 처음 등교했거든요. 학교에서 줄 책들이 많을 것을 대비해서 비행기 기내용 가방을 가져갔어요.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는지도 참 신기하고, 내가 힘겹게 진로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이런 기회가 내 앞에 놓이게 되는지그것도 회사에서 휴가와 학비를 받아가면서 말이예요. 참 감사할 일이죠.

 

공부하다 보면 직장에서는 정말 찬밥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궂은 일 해가면서 어쩌면 회사에서 내 능력이 이용 당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젠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을 활짝 열어 모든 사람들의 욕과 비난을 다 짊어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양인으로서, 여자로서그리고 영어가 외국어인 한국사람으로서 회사에서 인정받고 출세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소수와 약한 자의 위치에 있는 게 어떤 건지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는 단지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보다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 편견 없이 자기의 능력을 맘껏 개발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나의 욕심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은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미래는 교육밖에 없고,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해외 유학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가 주어진 나에게 사명이 무엇인지 요새 생각해보게 됐어요. 아빠 말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힘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할꺼예요. 사실 오늘도 강의 듣고, 읽을 법학 서적이 쌓여있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불끈불끈 힘이 나요. 나는 돈보다도 정말 나에게 주어진 능력 (그게 뭐가 됐든)을 최대한 발휘해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꺼예요.

 

아빠가 블로그를 잠시 쉬는 사이 박원순 변호사님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자기를 social designer라고 칭하며 희망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느꼈어요. 정부기관이 개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소식을 듣고, 사실 우리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타까웠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호사님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닌가 싶던데요. 오히려 인지도가 더 높아지는 결과로 나타났으니까. 사실 박원순 변호사님의 글을 읽다가, 자기가 스크랩한 것을 모아두면, 나중에 가서 의미 있는 글들을 많이 발견한다고 해서 나도 자료더미 속에 있던 수첩을 하나하나 꺼내서 만지작만지작 거리다 나온 게 초중 때 장래희망이 적힌 글이었어요. ㅋㅋ

 

특히 법학 공부하면서 느끼는 건데, 법학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평등한 사회, 정의가 살아있는 걸 보고 싶어하는 애들이 많이 온 것 같더라고요. 로스쿨 첫날은 좀 외로웠어요. 줄 서서 수업 등록하고, 책 받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무하고도 얘기도 안하고, 안티 쏘샬마냥 헤드폰 끼고 음악만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첫 수업 시간에 인상이 확 바뀌었어요. 학교의 튜터가 매우 친절했거든요. 더구나 다양한 사람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파트타임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있는 친구들 역시 재미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내 앞에 있었던 애는 KPMG라는 회계법인에 다니는 23살 정도 된 남자애인데, 왜 법을 공부하는지는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만 집안 내력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고백하더라고요. 아빠가 변호사고 엄마가 판사래요. 내 옆에 앉았던 애는 아무런 준비도 해오지 않고 수업 등록도 못했지만 블룸버그에 다니는 해맑은 친구였어요. 제약회사 다니는 사람, 현직교사인 사람, 법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는데도 영국 변호사로 인정되지 않아 다시 GDL을 하는 사람, 러시아 한인 3, 40살도 넘은 외국인 할아버지까지.... 배경이 가지각색이었어요. 이들 틈에서 공부하다 보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질 것 같아요.

 

앞으로의 수업이 기대돼요. 2년만 성실하게 코스 밟으면 나도 나름 Legal Mind를 갖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물론 이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수단으로 쓰여지겠지만.... 지금처럼 첫 마음을 가지고 2년 동안 열심히 하면 되겠지요.

 

첫 마음 하니 갑자기 생각나는 시가 있어요.

 

 

첫 마음 -정채봉-

 

1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
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 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행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글은 좀 횡설수설 했지만 그래도 요점은 뭔지 알겠죠? 엄마 아빠, 그리고 한결, 알라뷰 ^^


 

딸 아이에게서 받은 이 편지를 읽고, 단 두 줄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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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다음 날, 그러니까 2009년 8월 7일 투자은행인 Credit Suisse에 다니는 딸이 아내와 나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매년 겉에서 건물만 봤지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해서 늘 궁금했습니다. 딸이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일하기 때문에 사무실을 직접 구경시켜 줄 수는 없지만, 방문객이 볼 수 있는 곳을 안내하고 점심도 구내식당에서 같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심약속이 이미 잡혀 있어서 회사만 조금 보기로 약속하고 오전 10시까지 찾아 갔습니다. 남의 집에 가면 항상 조심스럽듯이 남의 사무공간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로비에 들어섰는데, 딸이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미국계 투자은행의 건물들은 주로 유리건물로 되어 있어서 경쾌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유럽계 기관들은 건물의 외벽이 돌로 되어 있어 그런지 육중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Credit Suisse London Office


우선 짐(gym)과 수영장을 봤습니다. 부대시설이 직원들 복지를 위해 중요하니까요. 일하는 시간인데도 간간이 운동도 하고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원들은 짐과 수영장 같은 시설을 이용할만큼 시간이 한가롭지 않답니다. 그런 부대 시설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건물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불만이 있답니다. 어쨌거나 내가 일했던 한국은행의 시설보다 더 좋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일개 투자은행에 불과한 기관이 한 나라의 통화관리의 상징인 중앙은행의 시설보다 더 좋게 꾸며 놓은 것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는 우체국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일상의 일을 위해 건물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는군요.

 

수영장에는 25m 레인이 세 개 있습니다.


몸을 데우는 보조 풀


짐(gym)




7층에 있는 식당에는 11시쯤 들렀는데, 온갖 음식이 차려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스시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잘 차려진 음식들도 정작 직원들은 일하느라 식당에 들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간편한 음식으로 때우기 일수랍니다. 

직원 식당. 스시가 마련되고 있습니다요!!!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먹을 것이 풍성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럽습니다. 내가 젊은 시절 처음으로 미국 출장을 갔을 때, 식당에서 주는 음식의 양이 푸짐해서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인들을 비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가난했던 시절의 배고픔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몰라도 풍성한 먹거리에 대한 탐욕이 나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식당에서는 템즈강과 North Dock뿐만 아니라 South Dock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은행 입행 후 1980년대 중반에 여의도의 유공빌딩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스팔트로 뒤덮힌 삭막한 516광장과 콘크리트 빌딩 숲만 있었습니다.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을 이용하여 수변공원을 조성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까지 뱃속의 물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물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 감정을 아주 평온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의도는 한강물을 끌어다 수변화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한강과 접한 용산의 철도청 부지를 개발한다니, 이번에는 수변화하는 작업을 하면 어떨까합니다. 높은 건물만 하늘로 올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른 쪽에 흐르는 강이 템즈강입니다. 나는 이 경치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Cabot Square


직원식당(7층)에서 바라 본 North Dock


Canary Wharf Tower. 가운데 둥그런 지붕은 DLR(Docklands Light Railway, 경전철) 정거장입니다. 이 경전철은 런던의 중심부 시티까지 약15분에 연결됩니다.


North Dock


어쨌거나 우리는 방문자들이 직원을 만나는 장소인 게스트룸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물이며 각종 음료와 읽을 거리를 충분히 비치해 두었습니다. 딸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커피를 만들어 먹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데서 내려 먹는 커피향은 좋아합니다.

방문객 응접실. 이런 응접실이 여러 개 있었는데, 우리는 동양화의 느낌이 나는 그림이 걸린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내가 커피향에 취한 듯, 커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딸이 아내에게 커피를 만들어 먹는 기계를 알려주고 있죠.



우리는 미리 약속이 있어서 점심을 같이 하진 못했지만 딸에게서 칙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직원들의 기도실과 24시간 개방되는 도서실, 은행, 우체국, 편의점 등 각종 부대시설을 둘러보고 이제 좀 쉬고 있습니다.

12시가 돼서 사무실을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밖에서 점심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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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84()~825() 3주간 출장 겸 휴가를 다녀오려고 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휴가로 영국엘 다녀왔는데, 금년에도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런던에서 일하는 딸아이가 초대해서 매년 가게 된 것이지요. 자식들이 떨어져 살면, 부모로서는 늘 보고 싶지요. 함께 사는 게 가족으로서는 제일 좋은데,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서 가끔 만나 그 동안 못다한 얘기도 하고, 함께 여행하면서 서로의 애정과 신뢰를 확인합니다. 가끔 전화와 메일로 사는 형편과 사정을 확인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는 못하지요. 아들은 최근에 제대하는 바람에 군생활모드에서 공부모드로 바꾸기 위해 이번 여름휴가에서 빠졌습니다.

 

휴가면 휴가지 왜 출장이라는 말을 곁다리로 붙였냐구요? 첫째 이유는, 우리나라 형편에 3주씩 휴가를 가는 것은 아직 부르주아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둘째 이유는, 실제로 몇몇 인사들에 대한 인터뷰를 기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프로젝트이기도 한데,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삶을 알아보고 어떤 역량(competency)이 크게 작용하는지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출장이라는 말을 살짝 끼워 넣었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노는 것인데, 미안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 기간 중에 88일(토)부터 18일(화)까지는 에딘버러를 비롯한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처남 부부, 그러니까 아내의 큰 오빠부부와 함께 갑니다. 큰 처남은 건축학과 교수로 근무하다 작년에 정년퇴직한 분인데, 특히 스코틀랜드를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도 잠시 영국에 들러 함께 도버, 스톤헨지, 세익스피어 생가 등을 여행했는데, 금년에도 역시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지금 "무쟈게"(윤여임 선생님으로부터 새롭게 배운 단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은 건축물을 만났을 때, 문외한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줍니다. 그래서 여행중에 건축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작년 여름 휴가까지만 해도 블로그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못해서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올해는 블로그를 위해서라도 사진을 좀 찍어볼까 합니다. 역시 자동모드로 말입니다.
여행 중에 여행기를 계속 올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s. “인재전쟁에 관한 인터뷰 내용은 시리즈로 계속 발행하도록 예약을 걸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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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오늘은 날씨가 흐리군요. 천둥번개도 치고 비바람이 칩니다. 이럴 땐 모차르트 음악이 제격입니다. 음악을 들으면 여행지가 떠오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영국여행 이야기나 계속해 보겠습니다.

2008
7월 31일 런던에 도착해서 보름 이상을 보냈으니, 어느 정도 시차도 적응되었습니다. 딸은 휴가를 끝내고 사무실에 복귀했습니다.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 아파트에 남았습니다. 나는 책을 보고 자료도 정리할 겸 오늘은 그냥 쉬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그럴 수 없답니다. 아까운 휴가시간 중 하루를 집에서 쉰다는 것은 아내에게는 정말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런던 시내로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여왕이 거닐었다는 산책로에 가면 혹시나 여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진짜 여왕이 걷기나 했는지, 그냥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무작정 걷기로 했습니다.


이 동판에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겠지요. 굵은 검은 선이 주빌리 산책로입니다. 197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은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런던 시내와 역사적 건물들을 지나가는 산책로를 만들었답니다. 총 길이 14마일(22.4km)입니다.

퀸즈 워크는 람베쓰 브릿지에서 타워 브릿지까지의 템즈강 남쪽 강변 산책로를 말합니다. 이 산책로는  그림에서 보듯이 강북에 있는 타워 오브 런던, 영란은행, 세인트 폴 대성당, 대영박물관, 코벤트 가든, 트라팔가 광장, 버킹검 궁전, 빅벤 등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강남의 런던 아이, 테이트 모던, 서덕 대성당, 시청사 등으로 이어지는 여왕의 산책로를 이으면 장장 22Km나 되는 거리입니다. 이것을 주빌리 산책로(Jubilee Walkway)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면서...

우리는 지하철 카나리 워프역을 떠나 시내에 있는 써덕역에서 내릴 참입니다.

써덕역에서 내려 템즈강쪽으로 가면 던전(London Dungeon)을 만납니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젊은이들은 던전에 들어가려고 줄을 섰네요.

거리의 예술가들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아케이드, 소비하라고 유혹하죠.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양식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을 미완성으로 남겼고, 보들레르는 자본의 참을 수 없는 유혹을 "악의 꽃"이라고 썼던가요.

자본주의의 유혹에 견뎌낼 인간은 그리 많지 않지요.

런던의 강북 시티지역의 상징인 30세인트 메리 액스 빌딩. 영국인은 "거킨"(ghirkin, 오이지)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총알모양의 건물이라서 "불렛"(bullet)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씨가 런던에는 여름 한 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퀸즈 워크(Queen's Walk)에 있습니다.

여왕의 산책길

무시무시한 군함이 아름다운 템즈강에 떠 있습니다. 더군다나 타워 브릿지 앞에 말이죠.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해군력의 위용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템즈강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 저 군함입니다. 아무리 봐도 으시시 합니다.

써덕 대성당(Southwark Cathedral)입니다. '사우스워크'가 아니고 왜 '써덕'이냐구요? 나도 모릅니다. 영국사람들은 사우스워크라고 하면 못알아 듣고, 써덕이라고 해야 알아들어요. 발음하는 걸 보면 영국물을 좀 먹은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답니다.

성당안이 멋있죠.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관리인이 와서 돈내는 사람만 찍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성당 사진 찍는데 돈 받는 곳은 처음 봤습니다.

성당이 치사하게 굴어서, 우리는 보로 마켓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시장은 언제나 생기가 돌죠.

시장을 지나니까 포도주 도매상이 나타났습니다. 포도주!!! 크....

유럽 전역에서 들어오는 포도주를 도매로 팝니다. 몇 천원짜리에서부터 몇 백만원짜리까지...

템즈강 남쪽에 있는 아파트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세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입니다. 들어가서 관림은 못하고 우리는 그냥 걸었습니다.

이제 겨우 밀레니엄 브릿지에 도착했습니다.

밀레니엄 브릿지 남단은 "테이트 모던"이라는 현대미술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술애호가들에게는 정말 죽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나는...

헨리 테이트(Hery Tate, 1819~1899)는 설탕을 만들어 팔아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자선단체에도 기부를 많이 했는데, 특히 자신이 수집한 현대적인 미술품들을 국가에 기증한 후 이를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재산의 상당부분을 기부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가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들러야 할 곳이죠. 일년에 500만 명이나 방문하는 곳이랍니다. 고전미술을 좋아하시면, 강북의 웨스트민스터쪽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 가시면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테이트 갤러리는 오늘날 대기업들의 기부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런 기부문화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밀레니엄 브릿지는 사람만 건너다니는 곳입니다. 강남으로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 강북으로는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 Cathedral)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테이트 모던은 화력발전소를 개조해서 만든 현대미술관입니다.

안에서 보면, 엄청 큽니다. 예전에 불 때고, 터빈 돌리던 곳이겠죠.

2,3층에 올라가면 강북을 내다 볼 수 있습니다. 화창하던 날씨가 약간 먹구름이 끼기 시작합니다.

미술관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애들이 태반은 놀고 있습니다.

낙서를 해 놓은 것인지 뭔지... 현대미술은 현대음악만큼이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감상하고 있습니다. 뭘 알고 보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은 이런 데 더 관심이 쏠립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어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술관에서 충분히 보지 못한 채 서둘러 빠져나왔더니, 아내는 뭔가 불만인 모양입니다.

밀레니엄 브릿지 위에서 테이트 모던을 배경으로

밀레니엄 브릿지를 건너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도착합니다.

워낙 커서 전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래 동영상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마침 저녁미사(Evensong)였습니다. 미사중이라서 사진을 못찍게 했습니다. 그래서 캠코더로 녹음을 했는데,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성당의 서쪽 입구입니다. 많은 런더너들이 석양을 보면서 휴식중입니다. 성당이 중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너무 걸어서 지쳤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런던증권거래소가 보였습니다. 런던의 시티지역은 다닥다닥 건물들이 붙어 있어서 건물전체 사진찍기가 불편합니다. 간판만 찍었습니다.

주빌리 산책로는커녕 여왕의 산책로를 반도 걷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니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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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아침을 먹고 나서 공동체 마을의 학교, 도서관, 회의실, 대형 세탁실, 가구공장, 화초를 기르는 곳, 농장, 수영장(큰 연못인데 다이빙대로 있어 수영도 함)을 둘러보았습니다. 가구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배려한 튼튼한, 그러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만듭니다. 장애인용 가구들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듭니다.


구글에서 본 다벨 브루더호프입니다. 마을이 아름답죠.

 

마을을 둘러보는 도중에 열 명쯤 되는 무리가 피크닉을 가는지, 조카 내외와 서로 인사를 하고는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으니, 공동체 멤버로 한 가족이랍니다. 아이들이 자그마치 7, 부부까지 합쳐서 9명입니다. 일요일이라 온 가족이 아침 먹고 등산 겸 산책을 떠나는 거라는군요. 나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자는 정부시책에 잘 따랐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 다 떠나고 나니 허전합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을 보면 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아이들이 일곱이라! 온 가족이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하나씩 메고 숲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피크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피크닉 준비를 하는 동안, 조카부부 이웃에 사는 독일인부부를 잠시 만났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80세는 족히 돼 보이는데, 겉으로 봐도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식은 다 장성해서 결혼했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대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영어를 잘했는데, 남편은 영어가 서툴고 독일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녹슨 독일어를 했습니다. 남편은 중남부 독일어 악센트로 말했습니다. 아들이 다 크고 나서 자신이 하던 사업체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집에서 굴리던 차 두 대를 처분해서 공동체로 왔노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의 브루더호프(브루더호프는 미국에도 6군데가 있음)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브루더호프로 온지는 몇 년 안 되는데, 미국에 있을 때 부인은 공동체 내에서 주로 영문출판관계 일을 했다고 하네요. 노부부는 나에게 자본주의적 삶의 정신적 황폐함을 얘기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빨리 가야 한다고 아이들이 졸랐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피크닉을 참을 수 없죠. 공동체에서 내준 봉고차를 몰고 남부해안도시 헤이스팅스(Hastings). 갔습니다. 인구만 명의 어촌입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카메라를 들고 제대로 서있기가 곤란했습니다.


파란색의 맑은 바다를 생각했다가 칙칙한 갈색이라서 다소 실망했습니다.

잉글랜드 남부해안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맛보는 바닷바람입니다.

소박한 해양박물관이지만, 역사교육의 현장입니다.

작은 마을이라도 박물관은 있지요. 어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박물관입니다.

아이들을 돌봐주는 간호사와 유치원 교사부부도 함께 갔습니다.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죠.

이런 시골에도 중국집은 어김없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한국음식 맛 내는 것을 시켰는데, 어떤 것은 성공했고 어떤 것은 실패했습니다. 오랜만의 나들이였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만, 바닷가는 바람이 세고 기온이 낮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보디엄 성(Bodiam Castle)

돌아오는 길에 공동체마을 근처에 있는 보디엄 캐슬(Bodiam Castle)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 성의 특징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성주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정사각형으로 지었는데, 주위에는 해자까지 있습니다.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이니까 약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같은 성이라고 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여러 차례 쓰였다고 합니다.


성에서는 중세의 무사들이 싸우는 장면을 연습해서 어린이들의 주목을 끌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른이고 애고 모두 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예 무릎꿇고 앉아서 듣고 보고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장면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정답을 외우고 시험보는 역사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수백년 된 성에 와서,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조카부부. 화려한 장신구는 없지만 삶의 순수함으로 오히려 빛나고 있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내가 할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곳에 가서 살아보는 것도 삶을 새롭게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지만, 제대로 된 삶이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사는 동안 잠시 빌려서 쓰는 것뿐이죠. 그리고는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겠지요.


이들의 삶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조카부부는 갓 결혼해서, 그러니까 
1997 2월경 다벨 브루더호프를 일주일 방문해서 살아보고 나서 몇 년 후에 다시 공동체로 들어와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인터넷에서 있는 것을 퍼온 것인데, 나의 짧은 방문에서도 여기에 소개된 삶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체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거의 만지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 신경 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면 그들은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섬길까를 생각하며 산다.

 

브루더호프가 우리나라에 알려지면서 무려 1,000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그 먼 곳까지 방문했다. 방문자들에게 그곳 사람들은 처음엔 "왜 왔느냐, 이곳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굉장히 힘들다"는 말을 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지기까지 사랑과 섬김은 보지 못하고, 환상만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잉글리쉬(영어)로 얘기하지 말고, 허티쉬(마음의 언어)로 얘기하라고 말한다. 언제나 조용 조용하게 얘기하며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이부자리에서 조차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암시를 주는 말조차도 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에게 직접 솔직히 얘기한다. 19살 먹은 청년도 80살 할아버지에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혼

 

대부분이 공동체 식구끼리 결혼하고, 혼전 순결을 철저히 지키는 이 공동체에선, 한 청년이 한 공동체의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할 때, 성직자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고, 그 성직자는 여자 쪽의 부모와 의논한다. 그리고 그 여자의 부모가 자녀와 의논해 남자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면, 공동체에선 비밀리에 둘만이 교제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령 공동체 밖으로 둘을 장기간 함께 파견한다거나, 공동체 안의 한 일터-학교나 출판사,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대에 대해 충분히 알며, 결혼할 마음을 갖추도록 도와준다.

 

약한 자를 위한 배려

 

아이를 낳으면 6주 후부턴 베이비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 전에도 산후 조리를 도와준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친정 집에서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편하고 더 좋았을 만큼 배려를 해주었다. 먹을 것도 굉장히 배려했다. 자녀를 낳아 그리스도의 자녀로 양육하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겨 많은 아이를 낳긴 하지만, 산후조리 때 이렇게 대우받으니, 아이를 더 많이 낳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들은 약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병자와 노인들에게 배려한다.

 

일터

 

공동체 마을의 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오후에는 진찰실을 떠나 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그래서 왜 의사가 공장에서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계속 지시하는 일만 하면,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때문에, 남의 지시를 받는 일을 함께 한다"고 했다.

 

이들을 자신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내려놓는다. 그러니 공동체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는) 인간의 본능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각기 일터를 배정받아 일을 했는데, 이들을 어찌나 일을 열심히 하는 지 일이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일이 힘들다고 하면, 마치 도청장치가 돼 있는 것처럼 이들은 다음날 일을 더 줄여주고, 다른 일을 맡기곤 했다. (그 정도로 상대가 고충은 없는 지, 일을 힘들어하지 않는 지 살피고 있다는 의미다)

 

한번은 일이 힘들어 그곳의 한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천국에 가면, 이렇게 일할 일 없겠지요"하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가 말씀 하기를 "섬기는 삶이 없이 어떻게 천국이 이루어지겠느냐" "내게 만약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일이 전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토의

 

브루더호프엔 텔레비전도 없다. 그러나 도서관은 세계적인 수준. 밤이면 영성 깊은 부모와 순수한 아이들이 조용하고 깊은 대화를 한다. 토요일엔 문화의 날로 정해 아이들과 함께 여러 문화도 즐긴다. 한번은 프랑스의 재즈댄스팀이 방문했다. 그들은 옷차림이나 춤 모양새가 매우 야했다. 그들이 춤추는 사이 이를 보다 못한 한 어른이 춤 도중에 일어서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댄스는 중단됐는데, 재즈팀은 그렇게 다른 문화에 대해 닫혀있는 줄 몰랐다며, 실망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공동체는 이 문제의 토의로 시끄러웠다. 그 다음날 모임의 토의에서 댄스를 중단한 사람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그 춤이 야하다거나 야하지 않다거나 -아무런 분별없이 그냥 즐기는데, 왜 춤에 대해 야하다는 해석을 붙여 분별하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재즈팀에게 사과를 해야한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댄스를 중단시킨 사람도 이에 공감해 사과하러 프랑스로 떠났다. 그들은 세속과 충돌하지 않는 방법으로 `어린아이처럼 즐기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우리를 돌봐주던 분이 부활절 예배 준비를 맡았는데, 그 분은 온 성심을 다해 부활절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굉장히 화려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분은 공동체가족들의 이의에 봉착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냐,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하느냐"는 물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부활절을 준비한 것을 알고, 스스로 징계를 받아 공동체와 상당히 떨어진 외딴 곳으로 떠나 회개의 기간을 가졌다. 그 때 그는 공동체에 편지도 보내지 못하지만 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그가 자신의 영광이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돌아오도록 도왔다.

 

신앙

 

이들은 성경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물어보면 어느 신학자보다 성경에 대해 박식했다. 그들은 기도는 남이 보지 않는 다락방에서 해야한다는 말씀을 따르는 듯 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는 신앙을 하지 않고, 삶 자체가 신앙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복음주의적 신앙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이제 이들의 삶을 조금 상상하실 수 있나요? 소위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이죠.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이겠죠. 사는 동안 끊임없이 신뢰와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곳 공동체에서 무소유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욕망의 때와 자본의 때를 벗은 사람들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을 보면서,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껨(Emile Durkheim, 1858~1917)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회의 기초는 성스러움이다.” 그런, 우리 사회는 지금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온통 기독교로 채색되어 가고 있지만,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점점 상스러움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브루더호프에서의 성스러운 만남을 아쉬워하며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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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주말을 이용해서 기독교 생활공동체인 브루더호프(Bruderhof)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런던에서 동남쪽으로 약 1시간30분 정도 떨어진 이스트 석세스(East Sussex)주의 로버츠브릿지(Robertsbridge)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약속을 해두었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내 누이의 딸 부부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전화를 했더니 주말을 이용해서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공동체에 손님으로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함께 생활해보려면 일단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에 대해 한번도 배우지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에 그들이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로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봐도 있을 것은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겁니다. 한인 가게에 가서 깻잎 통조림과 아이들이 간식으로 먹을 것을 간단히 준비해서 트렁크에 넣고 떠났습니다.

 

찾아가는 내내 공동체의 생활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조사한 것도 전혀 없었던 터라 어떤 정보도 없었습니다. 누님을 통해 잘 살고 있더라. 한번 찾아가 봐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무엇으로 돈을 벌어 어떻게 먹고 사는지가 가장 알고 싶었습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궁금증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수백 명이 가족단위로 모여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공산주의 방식인가? 공산주의는 다 망해서 북한을 빼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데? 아니면 사회주의적 공동체 운영? 혹시 사교에 빠진 집단은 아닌가? 얘기를 들어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고대 원시부족사회처럼 사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로버츠브릿지에 도착했습니다. 철길을 넘어 한참을 들어가니까 입구에 사인이 보였습니다.

 


브루더호프에 관한 책을 이미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참고하세요.


2008/12/03
꿈꾸는 인생_사랑의 꼬뮨을 실현하다
 

도착한 날이 토요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연장을 들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주말에도 일을 하나? 그 동안 온수와 난방용으로 쓰던 화석연료를 천연연료로 바꾸느라 교체작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같이 일해야 하는 데 손님이 온다고 해서 조카부부는 빠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브루더호프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거실에서 작은 외할아버지가 왔다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조카부부와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고 씩씩해 보였습니다. 애들이 올망졸망 넷이나 됩니다. 이곳에서는 생기는 대로 낳는 모양입니다. 알고 보니 애 낳는 것을 장려한다고 합니다. 굶주려 북한 사람들처럼 핼쑥한 모습은 아닐까 약간 걱정했는데, 일단 안도했습니다. 먹기는 잘 먹는 모양입니다. 


작은 외할아버지가 온다고 환영포스터까지!! 



그런데 남자 애들은 주로 맨발입니다. 여기서는 그냥 맨발로 뛰어다녀도 내버려 둔답니다. 아이들이 흙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랍니다.

손님이 온다고 케익을 준비했더군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공동체 식구들 전체가 저녁식사를 함께 합니다. 아침은 각자 자기집에서 먹고, 토요일 저녁은 이웃마을 사람들이나 친척을 초대해서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에도 우리가 초대된 셈입니다. 300명도 너끈히 식사할 수 있는 큰 식당입니다. 놀랍게도 카페테리아식이 아니고 식사당번이 서브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충분히 좋은 식사였습니다.

 

소박한 게스트룸


저녁식사는 좋았는데, 게스트 룸은 정말 소박했습니다. 순수한 하룻밤을 소박하게 지냈습니다.

우리는 과도하게 치장된 아파트에서 삽니다. 그것이 풍족인 줄 알고 말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실용적이지 않은 치장된 것이 있는지 색다른 기준으로 다시 한번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브루더호프의 공동체 식구들은 외면을 꾸미기보다 마음을 깨끗이 정돈하며 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스트룸에 거울이 없다!


우선 거울이 없습니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거나 치장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딸은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거울이 없다니! 이건 너무 한 거 아냐?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해결했습니다.



 
내 누이의 딸입니다.




내 조카는 어려서부터 수녀 같은 마음씨였습니다. 여기 와서 보니 수녀와 신부가 만나서 애 낳고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동안,  거의 10년을 거울 없이 살았는데도 이렇게 예쁘잖아요.

 

출처 : 브루더호프 공식홈페이지(www.churchcommunities.org)에서


우리는 아침을 먹고 일요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공동체 마을의 중앙공원에 둥그렇게 모였습니다. 잔디 위에 그냥 앉은 사람도 있고, 방석을 깔고 앉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기도 합니다. 나는 그곳에 있는 정원용 탁자에 딸린 의자에 앉았습니다. 예배 내내 찬송을 부릅니다. 누군가 성경을 읽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춘 얘기도 했는데, 설교인지 아닌지가 헷갈렸습니다. 때때로 웃기도 하고 ……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워낙 조용조용 이야기합니다. 내가 예상했던 설교, 찬송, 예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설교(?)가 간단하게 끝나고는 또 다시 찬송을 불렀습니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다같이 부르는 방식입니다. 미리 정해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힐 정도로 화음이 좋습니다. 나는 한 소절도 따라 하지 못했지만, 그 아름다운 화음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출처 : 브루더호프 공식홈페이지(www.churchcommunities.org)에서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공동체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마을 안에는 초등학교와 도서관, 그리고 공장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학습하는 장소도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게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외부의 학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곳에 공동체의 멤버들이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가르칩니다. 만약 상급학교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헤이스팅스(Hastings)라는 남부해안도시의 외부 학교로 진학한답니다.


출처 : 브루더호프 공식홈페이지(www.churchcommunities.org)에서

공장시설을 보고 나서야, 이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Community Playthings"라는 상표의 어린이 가구를 만들어서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브루더호프 공식홈페이지(www.churchcommunities.org)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양질의 가구들입니다. 특히 유치원과 학교에서 쓰는 모든 가구를 만듭니다. 수요가 많아서 요즘은 공장을 풀가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외부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데, 지금까지는 어려움 없이 수지를 맞춰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벨 브루더호프는 재원이 부족한 다른 공동체를 돕고 있다고 합니다.



조카의 남편 케빈(Kevin)이 애기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군요.



이들은 철저하게 무소유의 원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브루더호프를 찾아오면서 생긴 온갖 의문들이 상당부분 해소되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로 아무 것도 갖지 않기로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요.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노동 없이 빈둥거릴 낭만적 삶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삶의 본질적 투쟁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의 생활에 대해 일일이 사진을 찍어 소개하려고 했었는데, 조카부부의 말에 의하면, 외부인들에게 노출되는 경우 좋은 면도 있지만, 공동체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많아서 가족끼리 찍은 사진 이외에는 허락 없이 노출되는 것을 금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세운 원칙을 존중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찍은 사진은 최소화하고,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들을 활용했습니다. 이점을 양해해 주시구요.

이들의 삶은 분명히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들의 얼굴에는 그것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물든 내 눈에는 이들의 삶이 거룩해 보였습니다.

다벨 브루더호프 방문기는 계속됩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은 www.churchcommunities.org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소개하는 동영상은 <여기>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공동체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출판물들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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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는 컴브리아(Cumbria)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지방 출신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를 찾았습니다. 워즈워스는 호수지방의 가장 북쪽 도시인 코커머스(Cockermouth)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지는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그라스미어(Grasmere) 호수 근처의 조그마한 도브 코티지(Dove Cottage)에서 중년을 지냈습니다. 이곳에서 8년간 살았는데 그라스미어 호수와 산책길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한 시작(詩作)활동을 했습니다. 1813년부터 죽을 때까지 삶의 후반기를 라이달 호수 근처의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에서 보냈습니다. 세 곳 다 기념관으로 개조하여 관람객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 군데 다 가볼 정도로 시간 여유는 없었습니다. 한 곳에만 가기로 했습니다. 도브 코티지보다 지명도가 낮지만 노년의 원숙한 시기를 보냈던 라이달 마운트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2백년도 더 된 집입니다. 첫 인상은 '시인인데 가난하지 않았구나'였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시인은 늘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대부분 가난하죠. 그래야 시가 써지는 줄 알았습니다.

라이달 마운트의 집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산책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큰 정원과 작은 오솔길이 잘 꾸며져 있습니다.

결혼하여 젊은 시절 살았던 조그마한 도브 코티지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작은 저택수준이었습니다.

언덕 위에서 멀리 라이달 호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 왼쪽에 있는 흰색 텐트에는 관람객을 위해 차와 케익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큼지막한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간단한 산책도 할 수 있습니다
.

 

1층 거실에는 200년 전의 살림살이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가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시 백작의 법률대리인이었기 때문에 큰 저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3살 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다른 법률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서재에서 자녀들에게 밀턴, 세익스피어, 스펜서의 저작들을 포함한 시를 가르쳤습니다.

부친의 사후에는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났지만, 워즈워스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그들과 불화했습니다. 18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자연과 친척들에 대한 적의가 그의 시상에 어떤 형식으로든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시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그리고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사랑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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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을 둘러보고 난 딸의 소감은 간단했습니다. 얻은 교훈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은 절대로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때가 묻으면 모든 것이 보물로 변한다나 어쩐다나이제부터는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그가 썼던 연애편지들이 있습니다. 출판된 것인데,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Wordsworth and Mary's Love Letters

시인의 삶이라고 해서 남다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대륙에서 프랑스혁명(1789년)이 일어나자 워즈워스는 21(1791)의 나이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직접 프랑스를 여행합니다. 그곳에서 아네트 발롱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사랑에 빠져 이듬해 캐롤린이라는 딸을 낳습니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돈이 부족한 상태여서, 혼자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살짝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네트와 캐롤린에 대한 그리움은 크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시에도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프랑스에 남은 피붙이들을 끝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이런 얘기는 당시에는 쉬쉬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층에서 정원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이날도 여지없이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많은 관람객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워즈워스는 유산을 물려 받고 
32(1802)가 되어 어릴 때 친구였던 메리 허친슨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네 자녀를 두지만, 그 중 둘은 어린 시절에 죽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됩니다. 한 때의 불장난이 더욱 원숙한 시를 쓰게 했을까요?


시에 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정원으로 나와 산책을 하기로 했습니다.

산책하다 꽃을 보더니 찍어달라는군요. 예전에는 아내가 꽃만 보면 옆에 서서 찍어달라고 하더니 요즘은 딸이 똑같이 그럽니다. 꽃 옆에 서면 시가 저절로 나온다나 어쩐다나...


지금까지 살면서 시와 관련하여 나는 몇 차례 가벼운 홍역을 치렀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학생 때 시를 써보고 싶어서 끄적거렸었는데, 시인으로 사는 게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으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곤란했습니다. 시를 쓰는 재주가 없으니 시에 관한 글을 쓰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현대시(現代詩)의 난해성(難解性)에 관한 일 연구( 硏究)>라는 멋드러진 제목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이승훈 교수님(시인,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정년퇴임)을 찾아가 보여드렸습니다. 잘 썼으니 잡지에 내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잘 썼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좌우간 용기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xx에 관한 일 연구와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라서 나도 폼 나게 그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현대시가 어려운 이유또는 현대시의 어려움에 대하여라고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수님의 잡지에 내도 되겠다는 충고가 도대체 어떤 잡지인지를 알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학보사에 보내서 교내잡지에 실리고 말았습니다.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워즈워스는 20대 초반부터 자연과 인생에 대해 시를 썼습니다. 세계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이 시를 쓰는 모양입니다.

시에 대해서는 인연을 끊고 있다가 80년대 들어서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를 읽었습니다. 시인들은 시대변화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몇몇 시집을 사서 읽곤 했는데, 머리에 담아 두진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학창시절 두툼한 Norton Anthology를 들고 다녀서 영시를 가끔 훔쳐 보긴 했지만, 더구나 영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구요? 경영학에서는 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 쓰는 마음도 필요 없습니다. 시집을 마케팅하거나 판매하면 얼마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지를 가르칩니다. 계산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시 쓰는 행위는 가장 비효율적인 것으로 암암리에 간주합니다. 시와 시인은 원가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21세기 들어서 안도현 시인의 세 줄짜리 시 <너에게 묻는다>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내가 그동안 수없이 연탄재를 발로 찼거든요. 결혼해서 삼선교 산꼭대기에 어느 집 문간방에다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하루에 두번 19공탄을 갈아야 했습니다. 꺼뜨리면 번개탄으로 다시 피워야 했죠. 추운 겨울에는 하루에 세 번도 갈아야 했습니다. 하얗게 된 연탄재를 빼서 쌓아 놓는 게 아주 귀찮은 일이었죠. 이 시를 읽으면 충격받을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이런 시를 쓸 재주는 없다 해도 읽을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몇 권의 시집을 사서 가끔 읽지만 여전히 경영학이 머리 위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윌리엄 워즈워스 얘기를 하다가 샛길로 빠졌네요.

이층에 복도와 계단 사이에 붙어 있는 시 한편을 보았습니다
. “무지개라는 시였습니다. 아내 얘기는 이 시가 무지하게 유명한 시라네요.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정말 유명하긴 한 모양입니다.





여기에 다시 옮겨 보겠습니다.

The Rainbow                                                                                       무지개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하늘에 있는 무지개를 보면

A Rainbow in the sky:                                                  내 가슴이 뜁니다.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내 어릴 적에도 그랬고,

So is it now I am a man;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습니다.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나이 들어서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Or let me die!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좋겠지요!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내 삶이 자연의 겸허한 마음으로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하루하루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번역은 이것 저것 참조해서 내 멋대로 한 것입니다. 나 역시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뛸 정도로 세상에 민감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이웃에서 벌어지는, 무지개보다 더 한 화염의 충격에도 무덤덤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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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이번 여름휴가에서 백미는 영국 컴브리아(Cumbria) 지방의 국립공원인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에서 영국의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속도로 M6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영국에서 차를 모는 것은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어서 헷갈리기 쉽습니다.

운전경력이 짧은 딸이 그래도 고속도로와 좁은 길을 두루 잘 운전했습니다.


런던을 떠나 약 450Km를 달려 저녁 어스름할 때 국립공원의 관문도시인 윈더미어(Windermere)에 도착했습니다. 옆에 있는 호수로 나가 장시간 운전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처음에는 웨일즈 지방에 가서 자그마한 고성들을 둘러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딸 아이가 사무실 동료에게 추천을 받은 곳이라서 컴브리아 지방으로 바꿨습니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즐비한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높지 않은 야산들 중간 중간에 여러 호수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자연보호단체들이 오래 전부터 활동하던 곳이라 자연보호가 잘 된 곳이라고 합니다.

 


B & B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가 살았던 니어써리(Near Sawrey)의 힐탑(Hill Top)으로 향했습니다. 힐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길쭉한 윈더미어 호수를 아래로 삥 돌거나 아니면 페리로 건너야 합니다. 우리는 삥 돌기로 했습니다. 국립공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강원도 설악산 국립공원과 같은 곳입니다.



호수를 끼고 차를 몰아 힐탑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쉬었습니다. 쉬면서 딸이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 하길래, 나는 열심히 따라 했는데 아내는 싫다는군요.

스위스에 가면 어디를 대고 찍어도 그림엽서가 되는데, 이곳도 만만찮은 곳입니다.

 

포터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미스 포터(Miss Potter)>라는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Peter Rabbit이라는 캐랙터와 스토리를 만들어서 동화작가로도 유명해졌고, 컴브리아 지방의 자연환경을 부동산업자들의 탐욕적 개발로부터 막아내기 위해 애썼던 사람입니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자연보호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곳입니다.

왼쪽 사진은 포터가 직접 그려낸 피터 래빗의 토끼입니다. 내가 그곳에서 토끼를 보지는 못했지만, 포터는 실제 토끼를 모델로 그림을 그려 동화책을 출판하여 성공했습니다. 그 돈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땅을 샀습니다.



그림에는 포터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쥐, 토끼, 돼지, 닭 등이 특징적으로 그려져있습니다.

살던 집은
옛집 그대로라서 그런지 아주 작은 집인데다 관광객이 들끓어서 내부를 자세히 보거나 사진을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포터가 살던 집을 구경하려면, 표를 사서 한 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관리인은 포터가 매일 산책하던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말 아름답죠.

남는 시간을 포터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포터의 동화책 몇 권을 사가지고 다시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이 지방은 아직도 100년 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인공을 최대한 배제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입니다. 니어써리는 분명히 포터가 먹여 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고향 강원도는 개발을 못해 안달을 합니다. 개발은 후손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을 가지급해서 흥청망청 쓰는 행위입니다. 강원도는 개발되지 않은 청정한 곳으로 그냥 놔뒀으면 좋겠습니다. 돈벌이가 안 된다구요? 개발하지 않고 자연환경을 잘 보호하면, 개발에 지친 사람들이 와서 돈을 쓰고 갑니다. 개발하기 전에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인과 철학자,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스토리를 구성해야 합니다. 영국의 오지마을인 니어써리에 사람들이 평일에도 바글바글합니다. 입장료가 얼만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에는 바가지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쌌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안면도의 어느 리조트에서 개최된 워크숍에 강연하러 갔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큰 리조트로 인해 해안의 모래벌판이 콘크리트와 맞닿아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환경파괴가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근시안적인 개발로 인한 폐해는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심대한 영향을 줍니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간 날은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거의 반이어서, 관리자에게 물어봤더니 일본인들은 미스 포터를 좋아한다는군요. 우리는 그곳에서 한국인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시골구석까지 신경 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영국여행이 런던과 그 주변을 휙 둘러 사진찍고 가는 정도인가 봅니다.






우리는 니어써리의 정취를 더 느끼고 싶었지만, 너무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 느낌을 오래 간직하려고 책을 샀습니다. 오늘 책을 다시 훑어보니 호수와 들판, 구릉과 안개와 농부들, 그리고 목장의 동물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짓던 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포터가 살던 힐탑을 뒤로 하고 영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살던 곳을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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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아침에 일어나니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군요. 이럴 땐, 바하 또는 모짜르트를 틀어놓고 커피향을 실내에 가득 채우면 아주 제격이지요. 그러면 멀리 떠난 아이들이 더욱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국이야기라기보다는 딸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나에게 영국은 딸 아이 때문에 인연이 된 나라입니다. 딸 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취직을 하는 바람에 영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독일 유학시절에 유럽의 대부분 나라를 여행했음에도 영국은 가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왠지 영미계통에 대한 약간의 혐오감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영미계 국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미계통의 사람들은 대개 일은 하지 않으면서 돈 계산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힘의 세니까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 하지만, 특히 미국인의 문화적 저질성에 대해 독일인들은 혀를 내두릅니다. 그래서 안 좋은 것은 다 미국애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긴 독일도 아직 우리나라처럼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여서, 군사지도에는 독일이 미군 점령지로 표시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는 없겠지요.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영국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습니다. 딸 아이가 대학을 마치고 2007년 여름에 스위스계 투자은행인 크레딧 스위스(Credit Suisse)의 런던오피스에 Business Analyst로 취직해서 일하다가 지난해 말 휴가 겸 노동비자취득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갔습니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경제가 워낙 안 좋아서 외국인 취업을 적극 억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비자가 선뜻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노동허가비자가 나왔다고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계뿐만 아니라 유럽계 투자은행들도 만신창이가 돼서 모두들 수천 명씩 구조조정 하는 마당에, 회사에서 변호사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비자발급을 종용했다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딸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면 지금까지 딸이 노동비자도 없이 어떤 상태로 일했냐고? 영국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적어도 1년간은 노동비자 없이 취업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외국인 졸업생 중에서 소위 high skilled people을 영국 내로 유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서 이제는 정식노동비자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에 와서는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서울에서 저녁 6시에 로그인해서 새벽 3시까지 런던의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온라인으로 일 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당초 대략 2주 정도,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예상과 달리 두 달도 더 걸린 셈이다. 그렇게 길게 걸린 이유는 아마도 그간에 영국에서 했던 딸 아이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하느라 그랬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내와 나는 딸 덕분에 여름휴가를 2년 연속 영국에서 보냈습니다. <영국여행 이야기>시리즈는 그 연유로 쓰게 되었습니다. 딸 아이가 런던에서 일하면서 국제금융을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족이 떨어져 살면 늘 그리움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잘 먹는지, 운동과 휴식은 충분한지 늘 걱정이죠. 그리고 투자은행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도 불분명해서 가급적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내 생각일 뿐이고

 

딸 아이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나의 삶이 아내와 결혼 후에도 줄곧 공부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아이들을 잘 보살피지도 못했는데, 벌써 훌쩍 커버렸습니다. 지들 맘대로 커버린 것이죠.

영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 데려다 주면서 카메라를 들고 갔습니다. 몇 장 찍었습니다. 딸 아이가 보면 아주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주 예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아이들이 더욱 보고 싶어지는군요.

 

나는 사진 찍는 일에는 서투릅니다. 잘 찍지 못하고, 어떻게 찍는 줄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완전 자동모드로 찍습니다. 내겐 그게 편하기 때문이지요.

한시간 일찍 도착해 짐을 부치고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와 콜라를 마셨습니다. 어제 파마를 해서 추레하니 찍지 말라고 난리를 쳤는데, 찍사 맘이라고 그냥 찍었습니다.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인데 가까이서는 절대 찍지 말라고 하는 걸 냅다 찍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일해라. 몸을 튼튼히 해라" 정도였습니다.


평소에 생머리던 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출국 하루 전에 머리를 했습니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딸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습니다.


출국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짐을 부쳤는데도 보따리가 많군요. 내가 들어다 주고 싶은데...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 작별인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딸이 편지를 써놓고 갔습니다. 쓰다 남은 한국돈도 남겨놓았습니다. 열어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삶에 있어 최상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군요. 그리고는 엄마 아빠가 건강에 시간투자하는 것 잊지 마시고 항상 좋은 생각과 재미있는 일들로 '뇌'를 꽉 채우라고 충고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는군요. 내 고향 강원도의 극심한 겨울 가뭄이 이 비로 다 해소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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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나는 딸아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템즈강을 건넜더니 수 마일을 걸은 발걸음은 더 떨어지지 않았고, 배는 출출해졌습니다. 중국집이 눈에 들어왔고 의자에 앉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시원하게 맥주도 한 잔 마시고 짜장면 비슷한 것을 시켜 먹었습니다.

 




힘을 내 음식점을 나와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을 걸었더니 그리니치 공원이 나왔습니다.

선진국은 도회지에 있는 공원의 넓이와 질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가 봅니다. 런던은 조금만 걸어도 드넓은 공원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방치된 것이 아니라 잘 조성된 공원, 그래서 아무런 통제 없이도 아이들이 맘대로 뛰어 놀 수 있는 공원, 이런 공원을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아직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공원을 빼놓고서 런던을 논하지 말라고 충고한 책을 보았습니다. 전원경의 『런던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서』라는 책에서는 런던에서 좋은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이층버스, 공원, 극장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내가 런던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공원이었습니다. 이층버스와 극장은 돈 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공원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공원은 역사이자 정신이자 문화입니다.

 

하이드 파크

런던은 세계의 도시 중에서 가장 넓은 녹지 면적을 공원의 형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런던의 3분의 1이 녹지인 공원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켄싱턴 가든, 세인트 제임스 파크 등 크고 작은 공원이 8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Primrose언덕에서 내려다 본 리젠트 파크


켄싱턴 궁 앞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


세인트 제임스 파크 건너편에 있는 그린 파크


동네에 있는 작은 공원


그런데, 이 공원의 풍경이 대개 비슷합니다. 한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엄청 넓고, 시원한 잔디밭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길과 벤치, 그리고 동상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연못에서는 대개 백조와 오리들이 노닐고 있습니다. 그곳은 한마디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안식처입니다. 디즈니랜드식의 놀이동산이 아닙니다. 음식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거의 쾌적함을 넘어서는 도시의 쾌적함입니다. 서울은, 아니 우리나라의 대도시들은 지금 콘크리트 숲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이 땅이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하는 이 시대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야 제모습을 찾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런던너(Londoner)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원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옹졸한 이 시대정신을 사회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유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정신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대운하가 아닌 공원의 형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공원을 부러워하면서 천문대를 향해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느닷없이 딸은 나에게 약속 하나 하자고 했습니다. 내가 딸아이와 못할 약속이 어디 있으랴!

 

아빠, 절대 뒤를 돌아다 보면 안 돼! 알았지!”

오냐, 그렇게 하마.”

 

중턱쯤 올라갔을 때, 나는 뒤를 돌아다 보고 싶어졌습니다.

 

뒤를 보면 안 될까?

안 돼, 지금은 안 돼!”

 

딸은 한사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지금 뒤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된다나 어짼다나아무튼 나는 수 마일을 걸은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왕립천문대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딸이 부리는 마술을 기대하면서

 

아빠, 됐어. 뒤돌아 봐도 돼!”

 

우리가 걸어온 언덕 아래에는 이렇게 찬란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마천루가 카나리 워프(Canary Wharf)입니다.


 





왕립천문대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2008 7 31 18시 28분이었습니다.










서울이 동경 127도라는 표지판도 발 밑에 보였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인들이 만든 세계의 표준을 봤습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어야 할 세계의 표준은 뭘까요?

 




대운하와 몰입교육으로 세계표준을 만들 수 있을까요? IT, NT, GT, ET 등과 같이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21세기를 만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청소년들이 시험점수가 아니라 사고력과 상상력을 기른다면 우리는 충분히 첨단분야의 세계표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17세기 크로스토퍼 렌이 설계했다는 왕립천문대의 겉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소박하기 짝이 없는 건물입니다.


천문대 입구



천문대 뒤뜰


천문대 앞뜰


우리는 이 여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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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