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질환입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질병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적 질병입니다. 이 두 가지 질병이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어서 뭐가 뭔지 진맥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

 

자본주의적 질병의 원인은 우리가 정치적 경제적 질곡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서구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를 우리도 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야당에 투표하면 잡혀가는 줄 알던 시대에서 벗어나 우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표할 자유를 확보했고, 대다수 국민이 절대 빈곤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해방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외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치적 해방 또는 경제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느껴보기도 전에 우리에게 더 크고 무거운 족쇄가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족쇄는 인간의 내면에 채워져 있기 때문에 거추장스럽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그 무거운 내면적 짐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최동석, 똑똑한 자들의 멍청한 짓 한국관료조직의 개혁을 위한 진단과 처방, 비봉출판사 1998, 206~207)

 

이 글은 10여년 전에 쓴 글입니다. 인간의 정신적 내면에 채워진 쇠사슬! 그것은 탐욕의 족쇄였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메커니즘이 우리에게 선사한 괴물입니다. 동물원에 가끔 가서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우리의 잠재력을 적절히 발휘하게 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괴물때문이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욕구를 충족해야만 합니다. 욕구(need)를 충족하고 나면, 욕망(desire)이 끼어듭니다. 이 때 욕망의 확대재생산과정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탐욕(greed)으로 나아갑니다. 이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자본()이고, 이것이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확대재생산 됩니다. 탐욕이라는 족쇄, 탐욕이라는 괴물앞에 인간은 무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탐욕이라는 괴물을 다룰 수 있는 적절한 통제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한 적절한 시스템설계를 필요로 합니다. “자유로운 시장거래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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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기독교 사상이 오늘날과 같은 탐욕적인 자본주의 문명을 이룩하게 했느냐에 대한 논쟁은 많았습니다. 나는 기독교 사상이 자본주의 발흥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대체적인 중론은 그렇다에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기독교는 탐욕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이 명확한 기준이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인류의 정신적 안전망(mental safety net)이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Richard Henry Tawney, 1880~1962)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양심과 상업이 분리되었다는 점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물질적 부의 추구에 복종하는 세태로 변하게 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토니의 책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1983을 참고하세요.)

     

    기독교 사상에서 인류 최초의 탐욕 사건은 성경의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實果)를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욕망(desire)으로 이어지지만, 마음속에 있는 뱀의 유혹에 이끌리면 탐욕(greed)으로 넘어갑니다. 탐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인간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이 탐욕이 바로 인류를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하게 한 원죄(原罪)입니다. 여자는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밥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탐욕은 매우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점을 성경은 명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탐욕은 파멸할 때까지 스스로 증식해 갑니다.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어떤 사람은 탐욕을 인류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불황의 고통은 인간의 탐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탐욕을 다루는 방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는 그 자체로서 모순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탐욕을 제어해야 할 인간이 탐욕적이 되면 자기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제도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탐욕적 인간들이 그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탐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마음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도록 유도하는 길입니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욕망의 수준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서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를 어려서부터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의 훈련으로도 제어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해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욕망이 탐욕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투명성입니다. 사회적으로 하는 일들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제도화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정 금액 이상의 거래는 신용카드와 같은 방식으로 반드시 정보시스템을 거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돈세탁이나 뇌물 수수관행을 방지하고, 사업자의 수입과 소득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째로 언급한 제도적 장치의 설계가 아닙니다. 마음의 훈련을 통해 자신이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코람데오는 라틴어의 신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인류가 코람데오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욕망이 탐욕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코람데오의 사건은 성경의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라는 말이 거듭 강조되지만,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과 난관에 빠집니다. 그러나 요셉은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예를 들어, 애굽 왕의 신하인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여러 차례 동침하자는 유혹을 받지만, 다음과 같이 거절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전지전능한 신() 앞에서 일한다는 정신, 즉 코람데오 정신(coram deo spirit)이라면 제도적 장치가 다소 허술해도 탐욕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지만, 코람데오 정신이 없다면 아무리 정교한 장치를 한다 해도 탐욕의 폐해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엔론 사태 이후에 분식회계를 막는 강력한 제도인 사베인스-옥슬리 법(Sarbanes-Oxley Act)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했지만 6~7년이 지나자 그 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금융파생상품의 위험을, 설사 불법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엉터리로 계산함으로써 온 세계인이 막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은 인류의 발전에 좋은 것인데, 탐욕을 다루는 방식과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금융 붕괴현상이 나타났다는 견해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시스템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오로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코람데오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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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내가 인사실무를 하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은, 인간의 마음은 결코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조직구성원들을 숭고한 목적으로 향하여 이끌고 간다는 것은 경영자로서 보람이기도 하지만, 고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잘 하면 보람이지만, 잘못하면 고난이죠. 나는 언제부턴가 경영자가 잘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인간과 조직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없이는 제대로 경영하기 어려울 것이고, 인간들이 모인 조직의 특성과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욕구(needs)를 가지고 있습니다. 욕구를 분류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분류법이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 교수의 분류입니다. 그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안전 욕구(safety needs), 사회적 욕구(belonging needs), 존중의 욕구(esteem needs), 자기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에 이르기까지 소위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습니다.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 상위 욕구인 사회적 욕구의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에도 부합하는 개념체계입니다. (욕구5단계설에 대해서는 매슬로우가 1943년에 쓴 논문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4)(1943), 370~396쪽을 참조하세요.)

     

    그러나, 모든 경우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가끔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산악인들을 보면서 매슬로우가 뭐라고 생각할까 궁금해 합니다. 산악인들은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즉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가 충족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하위욕구의 충족 없이도 존중의 욕구와 자기실현의 욕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무도 히말라야로 가라고 강제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욕구와 비슷한 개념으로 동기(motive)에 대해 연구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의 데이비드 맥클렐란드(David McClelland, 1917~1998) 교수입니다. 그는 인간은 세 가지 주요 동기, 즉 성취동기(achievement motive), 친화동기(affiliation motive), 권력동기(power motive)에 의해 행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취동기는 더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밤잠을 설치는 학생들, 골프스코어를 좋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주말골퍼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취동기는 자신이 설정한 높은 목표를 위해 몰입하는 정도로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는 성취동기가 좋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큰 해를 끼칩니다. 물불을 안 가리고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붕괴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성취동기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인생사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아무리 좋은 동기라 해도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친화동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기인데,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함으로써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해도 거절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 대부분 친화동기에서 나옵니다. 친화동기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좋은 측면이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우유부단해져서 아무것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권력동기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권력동기가 큰 사람은 조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을 희생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의 간디는 물레질을 하면서 인도인들뿐만 아니라 영국인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경우도 권력동기가 매우 높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동기유형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행동은 반드시 여러 동기가 혼합되어 겉으로 드러납니다. 동일한 행동이라 해도 사람마다 다른 동기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어, 부하를 유능한 인재로 육성하려는 상사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하가 일을 잘하면 그만큼 비용이 절감될 것이다 (성취동기)

         내가 그를 육성시키면 그가 나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될 것이다 (친화동기)

         나는 부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 (권력동기)

     

    이렇게 하나의 행동에 서로 다른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동기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행동을 작동시키는 심리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매슬로우가 구분했던 욕구의 수준과 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또는 환경에 따라 욕구체계와 동기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유형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심리학자들이나 실무컨설턴트들이 여러 요소를 감안하여 심리유형을 분류하기도 합니다만, 주역이나 명리학에서 말하는 사주팔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이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 욕구와 동기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면 생리적 욕구를 충족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면 자기실현의 욕구가 충족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인 욕구(needs)가 욕망(desire)으로 빠져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욕과 관련하여 영양과 건강을 고려하여 적당한 음식을 먹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수준을 넘어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웨이터의 서브를 받아가면서 발음하기도 어려운 와인을 주문해서 즐기고 싶어집니다. 등산이면 충분한 것을 반드시 골프를 치고 싶어합니다. 그것도 비싼 골프클럽으로 치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골프코스를 섭렵하고 싶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돈 많고 유능하고, 게다가 잘 생긴 사람이라면 더 좋습니다. 사회에 공헌하여 자기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되, 자기 이름을 딴 건물과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이쯤 되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있겠지요. 욕구를 충족하려는 본능적 행동이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면 욕망(desire)으로 빠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이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되지 않으면, 지나친 성취동기와 지나친 권력동기를 자극함으로써 조직이나 사회 전체를 파국으로 이끌게 됩니다.

     

    욕망은 진보의 원동력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과학문명으로 진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짐승은 단순한 욕구충족으로 끝납니다. 밀림의 왕자인 사자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데 무슨 우아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욕구 충족을 넘어서는 욕망의 뜨거움이 있기에 일과 직업에 대한 강력한 몰입과 성취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통제를 자율적으로 또는 타율적으로 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은 탐욕(greed)으로 나아갑니다. 욕망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탐욕은 인류의 재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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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선 서양이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이 공간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인에게는 돈이 모든 것의 중심이자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하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미국인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미국인들이 그 어떤 나라도 따라 할 수 없는 소비주의(consumerism)에 몰입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청교도적 검약은 허울뿐입니다. 미국인들은 절약을 모릅니다. 독일 유학 중에 알게 된 몇몇 미국인 가정에 초대받아 가서 보면,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세게 해놓고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지냅니다. 독일인들이 보았을 때는 기겁을 할 일입니다. 유럽사람들은 대개 겨울에도 난방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실내에서는 두툼한 옷을 입고 지내는 검약의 정신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물신숭배(fetishism)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돈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안락함을 위해 돈을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평안을 위해 신에게 헌신하는 태도와 유사합니다.

     

    월 스트리트에서 헤지펀드를 운영했던 길버트에 관한 얘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다른 헤지펀드의 포트폴리오 운영자로 일하다가 1996년에 독립하여 자신의 헤지펀드를 차렸습니다. 1999년까지 약 5억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운영했습니다. 인터넷 붐을 타고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이것이 미국인과 다른 세계인들을 구분 짓는 기준입니다.

     

    그는 사무실을 헤지펀드 메카라 불리는 그리니치로 옮겼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환상적인 주택가에 있는 오래된 석조저택을 대략 1,000만 달러에 구입했습니다. 그의 아내 샤론도 적극적이고 야망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고집을 부려가면서까지 진짜 스코틀랜드출신 하녀를 고용했고, 개인트레이너도 고용했습니다. 또 항공사와는 자가용비행기 임대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 정성과 돈을 들인 것은 새로 구입한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현대의 모든 화려한 기술을 동원해서 이 집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우선 2층 높이의 영화감상실을 만들었고, 가족이 함께할 거실에는 거대한 벽난로를 설치하고 천장을 대성당처럼 돔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실에는 포도주 5,000병이 들어갈 포도주 저장실을 만들었습니다. 이 저장실은 12명이 앉을 수 있는 고가구 식탁을 갖춘 식당을 둘러싸도록 설계되어서 화려함이 돋보이도록 했습니다. 이 식당과 조리실 사이에는 음식을 나를 수 있는 소형 엘리베이터가 마련되었습니다. 차를 몰아 집 앞까지 들어올 때 가로수 길을 달리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 전나무 한 그루당 2만 달러를 들였습니다.

     

    이 사례가 특수한 어떤 인물을 가지고 미국인 전체를 과도하게 매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런 소비가 무슨 문제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탐욕적인 삶을 미국인들이 동경하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은 너도나도 월 스트리트로 향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길버트와 샤론처럼 소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사회적으로 매장되지는 않는다 해도 왕따될 가능성은 미국보다 높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문화가 낭비를 억제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도 길버트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구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겠습니다. 2000년 그의 펀드는 마이너스 15%를 기록했고, 2001년에는 기술주와 인터넷주가 큰 폭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30%이상 깎여나갔습니다. 투자자들은 대거 빠져 나갔고, 중과실 혐의로 소송까지 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집에 들어가는 돈, 사무실에서 지출해야 할 돈, 은행에서 빌린 돈, 갚아야 할 돈, 마이너스 수익률…… 이 모든 것들이 길버트를 괴롭혔습니다. 끝내 아무에게도 연락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한 채 일주일간을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침대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펀드를 청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들인 집도 처분했습니다. 갚아야 할 융자금만 남겨 놓은 채, 부부는 아예 아는 이가 없는 샌디에고로 떠났습니다. 그의 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좀더 상세한 이야기는 바턴 빅스의 투자전쟁을 참조하세요.)

     

    인간의 욕망이 통제되지 않으면, 탐욕이 분출합니다. 탐욕의 분출은 아무도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마비됩니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탐욕을 부추기고 그것을 맘껏 충족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탐욕이 그 시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주장과 행동이 탐욕을 부추김으로써 사회 전체를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탐욕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미국식 경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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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나는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무신은 쉬 떨어질 뿐 아니라 발이 시커멓게 되는 게 흠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비 오는 날에는 신을 벗고 다니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읍내에서 흰 고무신을 사 오셨는데, 나는 그 신을 신고 다닌 게 아니라 아끼느라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 내 신발은 신발장에 차고 넘칩니다. 여러 켤레의 구두는 물론, 조깅화, 등산화까지 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현대인은 생활필수품도 고장이 나거나 못쓰게 돼서 바꾸지 않습니다. 유행이 지나면 바꿉니다. 내가 쓰는 휴대폰이 6년 된 것을 알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공산품의 기능과 디자인을 바꾸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모델을 빠르게 바꾸면서 소비자를 현혹합니다. 새로 나온 휴대폰을 갖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광고선전을 해대고 있습니다.

     

    소비생활에도 유행을 탑니다. 욕망이 끼어듭니다. 명품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을 충족합니다. 비싼 명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과시욕이 작용합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 소비합니다. 그래서 경영학은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여기서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상품을 소비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순환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폐경제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로 진화된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때문이 아니라 타인과 차별화 하고 싶은 욕망이 상품을 소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품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생산되지도 않을 것이고,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자본도 축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비야말로 미덕입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행위는 사회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소비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투자의 기본원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라입니다. 경영의 기본원리는 욕망을 부추겨서 충족시켜라일 것입니다. 막스 베버와 동시대를 살았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이런 현상을 아주 잘 포착했습니다. 100년 전에 쓰여진 그의 책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에서 화폐경제는 봉건주의를 극복하고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발전하게끔 유도했지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자존감이나 삶의 태도가 돈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돈이 곧 신이다.”(Das Geld wird Gott.)

     

    은행이 교회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었고,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공동체적인 연대는 무너졌습니다. 예술가들조차 돈을 위해 예술활동을 합니다. 놀이로 하던 스포츠도 돈이 점령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재듯이, 돈이 세상을 재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식으로 얘기하면, 돈으로 세상은 더욱 촘촘히 합리화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짐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은 사회적 그물망을 짜는 거미이다.”(Das Geld ist die Spinne, die das gesellschaftliche Nets webt.)

     

    현대인은 지금 거미가 짜 놓은 그물에 걸렸고,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돈의 승리는 질(Quality)에 대한 양(Quantity)의 승리이고, 목적에 대한 수단의 승리입니다. 현대인은 돈을 버느라 삶의 질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 일하는지 그 목적도 잃어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삶도 불가능해졌고, 삶의 자유도 잃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구시대의 봉건영주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새로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속박입니다. 구시대에는 영주와 교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즉 타인과 차별화 되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ans)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차별화된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향유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더 큰 차, 더 큰 집, 더 비싼 장신구, 더 큰 요트와 더 비싼 자가용비행기를 요구합니다. 혹시 미국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가보셨나요? 마이애미 키 비스케인, 캘리포니아 서부해안 등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월 스트리트라는 도박판에 수많은 타짜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각종 수학적 모델을 가지고 도박판을 요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요리사들이 쓰고 있던 회칼이 어느 날 갑자기 무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여 수많은 요리사가 피흘리면서 퇴장 당했습니다. 도박판이 깨진 것입니다.

    자기들만 피해를 보면 좋은데, 전혀 관련없는 사람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수학모델에 의지한
    도박으로, 그리고 자기과시를 위한 지나친 소비로, 구원받으려던  자본주의와 그 추종자들이 구원은커녕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그토록 찬양했던 미국식 사회모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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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