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영학의 기초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여 합리화하고자 했던 <테일러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테일러보다 계량화에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인물이 <맥나마라>였습니다. 그는 자동차회사의 경영진으로, 국방장관으로, 세계은행총재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이상을 데이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합리적 사고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과지표(performance indicator)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를 통해 관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숫자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항상 의미가 붙어있다

 

성과지표를 스코어로 매길 수 있도록 숫자화하는 데에는, 숫자가 주는 강력한 힘에 대한 믿음과 지표의 객관성을 높여준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숫자가 주는 마력에 빠집니다. 그리고 숫자는 객관성을 갖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있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숫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똑 같은 숫자라도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냉장고를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과 똑 같은 냉장고로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이 있다고 칩시다. 숫자로 보면, 똑 같습니다. 둘 다 똑 같은 성과를 올렸으므로 회사입장에서는 똑 같이 취급해야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에는 결코 똑 같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 있습니다. 만약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은 강남의 압구정동에서 올린 매출이고,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은 달동네에서 올린 매출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똑 같이 취급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단순화시킨 사례지만, 어떤 경우에도 숫자에는 무수히 많은 가치와 의미들이 붙어 있습니다.

 

시험 성적이 95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잘 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모든 학생들이 100점을 맞았는데, 95점을 맞은 것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평균점수가 70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의미일까요? 평균점수가 98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뜻일까요? 헷갈리죠?

 

전교 석차 3등은 또 무슨 뜻일까요? 잘 한 것일까요? 못한 것일까요? 10명중에서 3등과, 100중에서 3등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다른 학교학생까지 합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전국적인 석차로는 어떨까요? 아니면 다른 나라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어떻게 될까요? 부자촌 학교의 3등과 농어촌 학교의 3등은 어떨까요? 족집게 과외로 무장한 학생의 3등과 소녀가장의 3등을 비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헷갈리죠?

 

그래서 통계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통계학은 사물을 숫자로 전환하여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거꾸로 통계학은 숫자에 붙어있는 각종 의미를 떼어내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은 통계학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학문이 되었습니다. 고객만족도, 투표성향, 직원충성도, 환자의 완치율 등과 같은 것은 모두 통계학에 의존하는 지표들입니다.

 

그런데, 통계학은 어떤 대상이 숫자로 전환되지 않으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숫자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때 몇 가지 사항을 가정합니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 보죠. 운동장에 모인 사람 수를 세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가정이 필요합니다. 모두 300명이라고 한다면, 남자만 그렇다는 얘긴지? 성인만 그렇다는 얘긴지? 아니면 어린이도 포함된 것인지? 어린이를 포함한다면 몇 살까지 포함시킬 것인지? 임신중인 태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경제조회사 직원은 안경 쓴 사람만을 셀 것이고, 산부인과 의사는 가임 여성만을 셀지도 모릅니다. 계산하는 목적에 따라 숫자는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통계학자 데밍(W. Edwards Deming, 1900~1993)은 이 세상에 참값(true value)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험적 관찰에 의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측정절차나 관찰의도에 따라 새로운 숫자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숫자로 전환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미가 삭제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그 숫자를 나타나게 한 가치기준 이외의 모든 가치를 생략해 버립니다. 오로지 그 가치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좌우간 숫자로 전환해서 통계학의 기법들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통계학을 필수로 공부해야 하며, 통계수치를 통해 사회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통계학적 기법을 통해 처리된 모든 숫자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

 

그래서 경영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슈들을 숫자로 전환하여 통계적인 처리를 거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온 숫자라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근대계몽주의가 뿌린 사상적 전통입니다. 오늘날 합리화의 전제는 모든 사태와 현상과 사물을 계량화를 통해 숫자로 표현해야 하고, 그 숫자를 통계적 기법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BSC는 매우 합리적인 수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BSC수단의 합리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을 세밀히 관찰했던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합리화(rational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합리화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입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이것을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구분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BSC는 수단의 합리화 장치입니다. 따라서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수단이 목적을 바꾸어서는 안 되며,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BSC라는 수단이 워낙 경영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다 보니(다른 말로 하면 컨설턴트에게는 돈벌이가 되다 보니), 목적을 잃어버린 채 BSC 자체의 정교화에 노력을 치중해 왔습니다.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는 1996년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된 『BSC: Measures that drive performance』에서부터 2006년의 『Alignment』에 이르기까지 목적합리성보다는 수단합리성을 정치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BSC개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 것이죠. 1990년대 초반에 개념화된 BSC는 이제 기업의 목적과 이념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하면서 숫자로 목적과 수단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노력과 투자에 비해 그 효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BSC에서는 목적의 합리성을 명확하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더 물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정직하게 제기해야 할 때입니다.

 

BSC가 수단의 합리화 장치라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BSC에는 그것이 재무적 이익임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무적 이익을 위해 고객, 내부프로세스, 구성원의 학습과 성장을 고려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묻겠습니다.

 

기업에서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 인간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물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연료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는 연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재무적 이익이 없으면 생존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닙니다.(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기업을 세운 것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한 투자자들의 몫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누가 기업을 하겠는가? 반론의 소리가 내 귀에 쟁쟁거립니다. 그런 목적으로 기업을 세웠다 해도 일단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은 사회적 현상입니다. 바로 여기서 피터 드러커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드러커는 이익의 지평을 넓힌 사람입니다. 기업의 이익이란 투자자의 위험프리미엄, 진부화에 대한 재투자비용, 사회적 공헌 등과 같은 협동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기업에서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후일 상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재무적 이익, 연료, 물은 모두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BSC는 기업의 존재목적이 재무적 이익인 것으로 가정하여 고안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BSC의 개념을 그대로 밀어붙이면 기업의 재무적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처럼 구조화되었습니다. 재무적 이익을 위해 구성원을 쥐어짜는 방식의 경영은 결국 구성원의 능력과 행복을 감퇴시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재무적 이익에 몰입하는 것은 곧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리는 셈이 됩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소수의 빗나간 행복추구를 위해 다수의 불행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재무적 이익을 추구할수록 재무적 이익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월 스트리트가 온갖 계량화된 기법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결국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재무적 이익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성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BSC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재무적 이익을 얻으려는 수단의 합리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박사는 이것을 의도의 역설”(paradoxical intention)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의도는 그 의도를 강렬하게 드러낼수록 그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프랭클 박사가 나치시절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존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떨립니다. 면접시험을 잘 보려고 애쓸수록 정작 인터뷰할 때는 머리가 하얗게 바뀝니다. 주식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돈을 잃습니다.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회장을 역임하셨던 윤병철 회장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네발 가진 짐승과 같아서 두발 가진 사람이 좇아갈 수 없다.” 오랜 기간 금융인으로 존경 받는 삶을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되새겨봐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그 결과로 돈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나는 BSC를 도입한 기업과 관료조직에서 소위 마음의 2중 장부가 쓰이고 있는 상황을 자주 보았습니다. BSC의 성공여부는 최고경영층의 이해와 관심에 달려있다고 했기 때문에(하기야 어떤 일이 최고경영자의 이해와 관심이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 BSC도입을 담당하는 혁신담당자들은 윗선의 힘을 빌어 현업부서를 BSC형식에 맞추어 숫자를 보고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면 현업부서에서는 형식에 맞는, 그러나 큰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정도의 숫자를 꿰 맞추어 보고합니다.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도덕적 감정이 굳어버립니다. 세상은 다 이런 거야! 다른 방도가 없잖아! 해달라는 대로 해줘! 스스럼없이 자포자기 하고 제도에 순응하여 살아갑니다. 점점 영혼의 능력을 잃어갑니다.

 

숫자는 스스로 만들어 냈을 때 의미를 갖습니다. 외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의해 만들어진 숫자는 마음에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숫자 자체가 발산하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영혼과 실존을 통해 발산되도록 해야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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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