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영상은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MBA과정 2009학년도 가을학기 리더십개발론강의 중 중요개념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내용의 보완이나 다른 견해가 있으면 댓글로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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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과는 관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문헌들이 몇 권 있습니다. 관리에 대한 패러다임을 다르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문헌들이죠.

그 중에서 오늘은 『성과관리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꿔라』(Catalytic Coaching, 개롤드 마클 지음, 갈렙앤컴퍼니 옮김, 교보문고 2007)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했던 이용석 상무(현재는 삼천리 그룹의 기획담당)가 번역 출판했습니다.

 

『성과관리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꿔라』(Catalytic Coaching, 개롤드 마클 지음, 갈렙앤컴퍼니 옮김, 교보문고 2007)

 

지식사회가 되면서, 성과에 대한 객관적 측정과 평가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계량화할 수 있는 성과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성과일수록 오히려 계량화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성과측정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성과평가방식은 외려 점점 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뚜렷한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사학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과를 관리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도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개롤드 마클(Garold L. Markle)이라는 컨설턴트입니다. 인사부문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지금은 코칭, 교육, 컨설팅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다면, 우리의 성과관리방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내가 경영대학원의 MBA 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교재로 읽힌 적이 있는 데, 당시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였던 학생은 이 책을 읽고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죠. 그는 기존의 성과관리방식이 회사에 너무나 견고하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성과관리를 코칭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에 큰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죠.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같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인사관리가 바뀐다는 것은 인간관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성과관리가 바뀌려면 성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번역도 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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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1)_인간을 보는 눈
          인간이란 무엇인가(2)_경영학의 인간관 문제
 

이제 이데올로기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이데올로기란 문자 그대로 아이디어의 학문입니다. 아이디어의 논리, 즉 관념의 학(
)이라는 말입니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은 관념을 중시해왔습니다. 신이나 이성의 작용은 다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이 존재합니다. 중세에는 신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했고, 오늘날에는 실증적 이성 또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자본()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의 지배적 관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잘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화 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지배적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학문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6)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헤겔(Georg W. F. Hegel, 1770~1831)의 철학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정신 또는 이성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절대정신을 이루고 그 정신의 현현이 국가체계를 형성한다는 헤겔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해나갔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삶의 물적 토대와 그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헤겔 철학은 본말을 전도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전도된 현상 또는 전도시키는 힘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도 본말이 전도된 현상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관념입니다. 백성 에 주인 니까 어떤 경우에도 백성이 주인이 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죠.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백성이 주인이 되지 못하지요.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들이 주인이 되고 백성들은 한낱 머슴으로 전락해 있는데도 그것을 잘 모르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지배적 관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숭고한 대상

 

따라서 어떠한 지배적 관념이라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경쟁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온 국민과 기업을 시장경쟁체제에 적합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관념은 신자유주의적 발상인데,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을 볼 때, 그 명분은 나쁠 것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면 본말이 전도되어 남미와 같이 극심한 빈부격차로 경제와 사회질서가 오히려 후퇴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관념이 좋으냐 나쁘냐도 중요하지만, 그 관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TV광고에 일등 하는 자만이 기억된다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광고를 보는 백성들은 , 우리가 일등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등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온 국민이 그 광고를 보고 그래 맞다. 일등 하는 사람만 역사에서 기록됐구나. 우리도 일등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자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대우신화가 생겨났고, 후회 없는 한판의 대박 인생을 그린 재벌회장들의 자서전이 대거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념들이 이데올로기화되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즉 재벌회장들처럼 열심히 살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전도된 힘에 의지하고 있을 때,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품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터질 때까지 자기증식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거품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시에 주저앉았습니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뿌리가 100년이 넘는 시중은행들(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신탁 등)이 지금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외국계로 팔리거나 중소은행들에 합병되었지요. 내가 한국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참했어요. 당시 제일은행의 어느 퇴직직원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는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적인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고, 그러면 본말이 전도되는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중세에는 신에 대한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신앙의 이름으로 부패와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자본에 대한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이것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자본, 즉 돈이란 교환과 지불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도록 도와주는 수단입니다. 이 수단이 숭고한 대상으로 변화되었고, 본말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물고 늘어진 사람이 바로 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입니다. (그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을 참고하세요.)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프랑스에 유학해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사유에 많은 영향을 받은 학자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이자 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상가입니다. 그의 책은 어느 것이라도 붙들고 정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과거 유고연방의 일원이었다가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에 연방에서 독립한 아주 작은 국가입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잠시 들린 적이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알프스의 동남쪽 발등상에 위치한 국가로 국민소득이 약2만불 정도 되니까, 평균적인 가계경제수준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편이지요. 그런데 시골 구석구석이 잘 살더군요. 나는 그렇게 깨끗하게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시골마을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평범한 아주머니와 할머니를 만났는데 아시아에도 관심이 많고 영어는 못해도 기본적으로 독일어를 할 줄 알더군요. 슬로베니아어는 독일어와 다른 언어체계인데도 이웃나라의 언어를 시골아낙네들이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매우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어를 일상에서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그 동안 국가운영시스템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고 걱정했습니다.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진다면서 한국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를 수십 년간 해왔던 나라가 오스트리아나 독일에 버금가는 생활수준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그 만큼 적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인구가 200만 명 정도 되지만, 자신의 고유한 언어인 슬로베니아어를 씁니다. 이런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인 사상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화

 

이제 다시 이데올로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지배적 관념입니다. 여기에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이기 때문에 돈, 즉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대접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시민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 , 돈 하면서 돈에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화폐로 표상되는 돈이 인간과 사회에 얼마나 파괴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회학적 분석은 고병권 박사가 쓴 책,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2005)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이러한 지배적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합니다. 시골에서 사이 좋게 잘 살던 친척들이 재개발토지보상금을 받고 나서는 서로 반목하거나 법정다툼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고, 혈육간에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다가 돈이 생기자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회사의 경영권을 두고 형제간에는 물론 부자간에도 싸움을 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것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의 와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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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1)_인간을 보는 눈


경영학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인간관에 관한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성립된 학문입니다. 경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경영자나 경영학자들은 사람을 기계론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보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테일러리즘(Taylorism)이었습니다.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는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했습니다. 노동자의 근육을 기계장치와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동작과 시간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훈련시켰습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것이 당시 노동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테일러 자신도 과학적인 관리방식이야말로 노동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생산성을 높여서 임금을 더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뉴턴이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믿음입니다. 경영에서 모든 것을 계량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계량화의 문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계량화는 사물의 탈가치화 현상을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생수 한 병을 450원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이 PC 한 대가 45만원이라고 칩시다. PC는 생수의 1,000배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생수 1,000병을 가져가면 PC 한 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물은 다른 사물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갖습니다. 그것은 PC도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눈 앞에 있는 생수 한 병의 가치가 PC 한 대의 가치보다 훨씬 크지만, 계량화된 화폐가치로 보면 PC 1,0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히게 되면 각각의 사물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됩니다.

 

화폐경제하에서는 물물교환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유하려면 돈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원됩니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는 삭제됩니다.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만이 유일한 가치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량화는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삭제하는 특징을 갖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계량화는 삶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지극히 왜곡된 현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수학이나 공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수학이나 공학의 기초 위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활용하는 모든 장치와 시설물들은 수학과 공학의 덕택입니다. 나는 수학적 사고야말로 이성적 활동의 가장 아름다운 영역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계량화 또는 수학화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소금을 염소와 나트륨으로 분해해서 그 본질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소금이 인류에게 주는 은유와 상징,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가치는 계량화 또는 수학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의 대부분은 이런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계량적 인간관으로 돌아오죠.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로부터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1947~)의 경쟁전략론에 이르는 20세기 경영학의 흐름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감정을 가진 부품’, ‘생각하는 부품’,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부품’, ‘경쟁할 줄 아는 부품등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계량화의 맹점을 계량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간관은 우리에게 심대한 폐해를 남겨놓았습니다. 가치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이윤을 남기는 데 필요한 효율성과 생산성이 되었고,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해 당근과 채찍에 의해 통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실증주의 또는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뢰와 우정, 사랑과 몰입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측정하기 어려운 항목들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재무제표에 이윤을 확대하는 항목들만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조직은 자본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숭고한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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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경영학은 인간을 무엇으로 보는가? 지난 100년간 경영학은, 특히 미국경영학은 인간을 자원(resource)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자원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이라고 부릅니다. 인적자원에 투자된 돈은 철저하게 비용으로 처리됩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가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긴장과 불안, 스트레스와 우울증, 부정적 정서와 제한적 신념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사인간(corporate human)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재무제표의 비용계정을 구성하는 부품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생산성을 구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생산성은커녕 온 인류를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지도록 했습니다.

 

나는 이제 대전환의 계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인사조직 최근 주제연구 마음을 사로잡는 경영은 가능한가라는 과목으로 강의한 것을 녹취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명령과 통제를 통한 쥐어짜는 방식의 경영관행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래서 경영과 경영학에 대한 사유의 틀을 좀더 확장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인간을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탈레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 보려고 노력해 왔었기 때문에 그 많은 성과물들을 다 들여다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내가 즐겨 쓰는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개관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인류가 인간에 대한 관점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계기를 철학적 논쟁에서 찾습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크게 세 번 정도 바꾸었습니다. 

 

펠라기우스 논쟁

 

그 첫 번째가 펠라기우스 논쟁이었습니다. A.D. 400년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펠라기우스(Pelagius, 대략 354~440?)가 기독교 세계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으나 나중에는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 심취했고, 밀라노의 주교에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고백록』은 자서전 문학의 백미일 뿐 아니라 서구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으며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는 해박한 도덕주의자로서 당시 로마 시민들과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고 원죄개념을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완전성에의 자연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부여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신의 주권적 은혜만이 완전히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러한 두 주장 사이에 논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431년에 에베소라는 곳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구의 고대사회가 막을 내리고, 신에 대한 신앙과 거룩함이 충만한 중세가 시작됩니다. 적어도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라는 걸출한 신학자가 나타나기까지 이성의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고대 로마제국이 쇠망하자 교회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은 약해지면서 반대로 교회의 세속적 권위는 점차 높아졌습니다. 제국이 건설한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 질서를 통해 교회는 유럽사회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명실상부한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극심한 가뭄, 전염병, 천재지변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서민들의 평균수명이라야 30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과 죽음은 정상적인 것이었죠.

 

전쟁이 일상사였고, 어떤 때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십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식량부족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혹서나 혹한으로 죽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은 수도원을 통해 교리로 정교화되어 갔습니다.

 

두 종류의 진리

 

하지만, 이런 상황은 13세기가 되면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된다는 사실은 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에 의해 얻는 진리도 있지만, 이성적 판단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그 둘은 변증법적 작용을 통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아퀴나스까지 약 800년간의 중세는 신앙이 이성을 압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 이후에는 신앙과 이성이 비등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성의 힘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됩니다. 그 하나가 문예부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납니다.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예부흥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신앙에 억눌려 왔던 이성이 자유를 만끽하면서 표출된, 억압되지 않은 인간의 자연스런 활동의 결과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버린 교회에 대한 이성적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나아가 이성의 힘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들을 안겨 주었습니다.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이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이 말한 대로 기독교인들이 1400년간이나 굳게 믿어왔던 것들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짓이었지만, 교회는 가혹하게 과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인식의 확실한 근거

 

이성의 힘은 수학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풍조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의해 더욱 풍부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인식은 인간 자신의 인식주체와 외부세계인 객체와의 교섭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 유명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의 철저한 회의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식의 확실성이란 내가 아는 것이 어디까지가 진실한 것인지를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유하는 한 개인의 중요성이 이 세상에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인식주체가 절대화 되지 않으면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의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존재가 절대화되기 시작합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쳤던 공동체적 이상과 가치는 사라지고, 나의 인식이 확실하다는 믿음에 기초한 진리의 추구만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성이 신앙을 완전히 압도하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서양세계에서 신앙을 완전히 떼어내고 이성만으로도 존재와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셈입니다. 이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후에 성립된 철학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성찰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패배한 펠라기우스가 1,200년도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명예를 회복하게 된 셈입니다. 

 

이렇게 이성이 신앙을 압도해 가는 사상적 흐름 속에서 인류가 경험한 핵폭탄과 같은 충격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충격

 

첫 번째 충격은 아퀴나스가 이룩한 신앙과 이성의 통합작업 후에 나타났어요. 그게 바로 앞서 언급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얘기지만, 그에 따른 교회의 핍박도 대단해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그런 주장을 하려면 목숨을 걸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힘이 아무리 커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나타나서 우주의 중력체계를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우주가 거대한 정밀시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대한 해석체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충격

 

두 번째 충격은 데카르트의 이성혁명 이후에 있었던 일인데,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지동설의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려는 순간에 떨어진 핵폭탄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파충류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아직 많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야훼의 신이 천지를 창조한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교회는 창세기의 과학적 설명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동설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진화론도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설사 인류가 파충류에서 진화되었다고 해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를 거대한 정밀시계처럼 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우주의 운행원리를 파악해서 만물의 영장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과학적 사실과 그 발견과정에 두려워하거나 당황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건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개념적 실체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에 물리학적 지식과 분석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과학이 창조에 관하여 실증적으로 어떤 결과를 내더라도 불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영혼과 그 능력의 문제가 출발합니다. 이 문제는 좀더 깊이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

 

세 번째 충격

 

그런데, 지난 20세기 초에 세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의해 인간의 행동은 이성의 확실한 근거와 상관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심연에 잠재된 무의식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은 무의식적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의실에 오는 것은 물론 의식적으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심리학적 결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나도 모르는 것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모르는 심연의 그 무엇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의 힘을 압도한 이성의 힘으로 인류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자신의 행동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인 행동만이 전부가 아니며, 행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무의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다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심연을 향하여 이성의 날을 세우고 분석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성의 힘이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지배력을 확장하게 되자, 학문방법론은 거의 완벽하게 요소환원주의(elemental reductionism)로 바뀌었습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되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상태까지 분해하여 그 개체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갖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이성중심적인 발상이고, 데카르트-뉴턴식 해결책(Cartesian-Newtonian View)입니다. 전체는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요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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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