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에 이재철 목사님 같은 분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 봅니다. 개신교에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치리하는 자로서 장로, 권사, 집사 등과 같은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세속적인 권세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의 직분을 맡으려면 어떤 사람이 유리하겠습니까? 뻔한 일이지요. 그래서 개신교는 항상 문제에 휩싸입니다.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소리(www.cry.or.kr) 기사

 

이재철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을 탈퇴했다.

이재철 목사는 대표적인 기독교 출판사인홍성사의 설립자이며 주님의 교회를 거쳐 현재 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양화진 외국인 묘지 관리를 위해 설립한 백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해 왔다
.

탈퇴서에서 이재철 목사는 "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초교파적 독립교회로 설립한 백주년기념교회를 목회함으로 인해 본의와 달리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치게 돼 송구스럽다"면서 "6 26일부로 교단을 탈퇴한다"고 밝혔다
.

그러나 이재철 목사의 탈퇴 의사가 이것만이 아니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재철 목사가 60세 이상 신도들에게 장로와 권사 호칭을 부여한 것을 두고, 예장통합 총회 서울서노회가 지난 4월 정기노회에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하기로 결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다음은 이재철 목사의 이 사안에 관한 언급 내용이다.


 

이재철 목사 설교(2008. 12. 30 주일예배)

 

우리 신앙의 본질은 변할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 되지만 본질을 담는 형식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합니다. 본질은 언제나 절대적이지만 본질을 담는 형식은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직후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드리던 예배의 형식과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대박해 시절에 지하묘소 카타콤배에서 드리던 예배형식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드리던 예배형식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드리던 예배형식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한국 개신교인들이 드리던 예배형식이 동일할 수도 없고 실제로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

그런데 그 상대적인 형식가운데 하나의 형식을 절대화하면 절대화 된 형식이 본질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은 고수하되 본질을 담는 형식에 대해서는 항상 열려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본질은 본질로 지켜지고 보호될 수 있습니다
.

벌써 120년의 역사를 훌쩍 넘은 한국 개신교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할 형식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직분제도일 것입니다. 2000년 교회 역사상 한국교회 밖에 없는 권사직을 포함해서 집사 장로직은 본래 봉사의 직분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인적 제도적 형식입니다. 그리고 지난 120년 동안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봉사의 직분자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서 한국개신교회가 사상 유례없는 대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

그와 동시에 이 직분 제도의 형식이 한국개신교회 초기부터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유교의 가부장제도와 결합하여 마치 직분이 계급인 것처럼 그릇인식 되기 시작하면서 이직분제도가 한국교회에 큰 병폐를 끼쳐왔던 것도 또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장로투표에 당선되기 위해서 선거운동을 하거나 혹은 투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는 등 많은 교회들이 투표를 치른 뒤에 그 후유증과 잡음으로 진통을 앓는 것은 바로 이 직분을 계급과 명예로 그릇 오해하고 있는 이유 때문입니다
.

실제로 한국 어느 교회든 그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고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교인이 있다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 교회 교인들 가운데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학력이 낮고 세상 적으로 내세울만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것 역시도 직분을 계급으로 오인한 결과입니다
.

2000
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명망가들을 다 제쳐놓으시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식하고 가장 비천하던 갈릴리 빈민 열두 명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던 복음의 본질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직분제도가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져 있는지 잘 알게 됩니다
.

그래서 1980년대 말부터 뜻있는 교회들에 의해서 한국교회의 직분제도의 병폐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직분자의 임기를 제정한다든가 일정한 기간마다 신임투표를 한다던가 하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도와 움직임이 직분을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는 한국교인들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미흡하다는 평가입니다
.

이에 우리 교회는 2005 7 10일 창립직후부터 구역을 통해서 전 교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당시 운영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집사 권사 장로의 호칭이 갖고 있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버리면서 집사 권사 장로를 직분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할 것을 결의 했습니다
.

다시 말씀드리면 누구든지 최소한의 자격만 갖추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회적 환경 경력 제력을 뛰어 넘어 그 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삶의 경륜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

그래서 우리 교회 정관 제 5장에 이렇게 규약을 만들었습니다
.

30세 이상으로 세례받은지 1년 그리고 백주년기념교회에 등록한지 1년 이상 된 자는 집사로 부른다
.
만 오십세 이상의 여자로서 집사에 임명된 지 5년 이상 백주년기념교회에 등록한지 2년을 초과한자 가운데 교구 교역자와 구역장이 추천한 자는 권사로 부른다
.
60세 이상의 남자로서 집사에 임명된 지 5년 이상 백주년기념교회에 등록한지 2년을 초과한자 가운데 교구 교역자와 구역장이 추천한 자는 장로로 부른다
.

여기에서 교구 교역자와 구역장이 추천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조건을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이름만 걸어둔 명목상의 교인인지 아니면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인지 구역장과 교구 교역자들을 통해서 확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진 집사 권사 장로 호칭자 명단을 오늘 여러분들께 나누어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그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삶의 경륜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분들의 호칭을 불러 드리십시다. 그리고 호칭을 받는 분들은 그 호칭을 더욱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

이전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로 임직된 분들 가운데에 우리 교회에 등록한지 일 년 이상은 되었지만 2년을 초과하지 못한 분들 혹은 2년은 초과했지만 우리교회가 정한 연령에 미달하는 분들의 명단은 집사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교회에서든 장로와 권사로 임직되면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옮겨도 장로와 권사로 호칭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역시 그분들을 장로와 권사로 호칭한다할지라도 백주년 기념교회 공식적인 서류상으로는 원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무쪼록 한국 개신교회에서 최초로 시행하는 집사 권사 호칭제 시행이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병폐를 개선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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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외된 백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줄여서, 그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부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부자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재정이 힘들어졌습니다.
    세금을 어디선가 더 걷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농어촌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각종 세금감면을 폐지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농어촌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통계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더 가고 덜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니까요.

     

    부자들의 세금부담이 이토록 적은 나라에서 부자들에게 매기는 종부세마저 징벌적 조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영혼이 있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할 때의 자본과 재무제표상 자본계정의 자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무제표상의 자본을 추구하는 이념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란 자본계정을 무한히 확대시켜 가는 이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는 자본 그 자체가 끝없이 증식하도록 돕습니다. 자기증식을 끝없이 반복하는 세포를 의학적으로는 암세포라고 합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암세포처럼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 암세포에 의해 인간의 공동체 정신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명박 정부에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일까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기 때문도 아니고 마음씨가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신교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의 제자인가요, 아니면 예수의 제자인가요? 예수를 팽개치고 자본을 따르기로 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의향이 있다면 다음의 가르침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 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 1~16)


     

    예수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포도원에 일하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지를 받은 근로자들, 택배운송기사 등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예 노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도 바로 우리 이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불려오지도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들에도 똑 같은 몫을 주라는 가르침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바로 이 비유를 가슴에 담고, 애정이 없는 경제학은 인류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능력이 뿜어내는 힘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우주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위대하면서도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포도원의 주인처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007) 똑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는 러스킨의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로 변했습니다. 위대한 영혼이 된 것이죠. 러스킨의 이 책을 읽고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자 놓을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을 그 책의 이상에 따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 내 생애에 즉각적이고도 실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

     

    그래서, 간디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간디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개신교 장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러스킨은 묻습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똑 같은 품삯을 주어서 과연 포도원이 망했을까요? 오히려 더 흥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미국식 경영이 세상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이런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거부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히려 이 위기의 시대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복음 835)

     

    이 위대한 가르침을 받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어떤 조직이든지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 조직의 지도자가 매일 죽어야 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 날마다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살아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여러분은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복음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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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