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두 명과 함께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장면이 성경에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로마 병사 둘이서 예수가 걸쳤던 옷을 제비뽑기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가 죽었는지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보았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곤란을 겪은 가장 힘든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모르고 범한 죄는 용서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르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왜 예수는 자기를 죽인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했을까?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예수의 뜻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정말 그렇게 살아가는가?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 누가의 기록(누가복음 2334)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을 갖게 되고, 그 다음부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람 지나가는 것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신기해 합니다. 매일 보던 풀 한 포기가 새롭게 보입니다. 이마에 스치는 바람결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 없어집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부활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관심사는 인간의 정신이 역사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하이데거에게로 이어졌고, 노동의 문제는 마르크스(Karl Marx)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나는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매 순간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현재화함으로써 매 순간의 삶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아름다운 영혼의 변증법이 주는 교훈이 있다. “아름다운 영혼은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자로 내몬 가혹한 세상의 조건들, 즉 자신의 선한 의도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비탄해 하지 않는다. …… 나는 져야 하되 호된 시련에 부딪쳐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적을 고발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240~241)

 

그렇습니다. 노무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패배시키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스스로 패배하는 길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활용했던 최후의 수단도 자기 자신을 패배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방식으로 궁극적 승리를 쟁취한 수많은 인물들을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도 그랬습니다. 임금의 칼에 죽느니 적장의 칼에 죽겠다던 이순신이 그랬고, 무장해제한 채 영국군에 맞섰던 간디도 그랬습니다. 비열하고도 폭압적인 권력 앞에 구차한 변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삶은 인류의 정신 속에 부활했습니다. 노무현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그렇게 부활할 것입니다.

 

 

p.s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개명한 세상에 이토록 비열하고도 폭압적인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런 권력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책을 온전히 읽을 수도, 글을 제대로 쓸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잡을 수 없군요. 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서럽지 않았는데, …… 오늘은 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군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과 손익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은 의사결정의 기준이 손익보다는 옳고 그름에 있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부류입니다. 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합니다. 옳다고 믿기 때문에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믿는 진리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죄책감이 중요한 행동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손익지향적인 사람은 행동의 동기가 선악보다는 손익에 있습니다. 그것도 이기적인 손익에 의사결정이 좌우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공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인 손익이 우선입니다. 이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먹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상도(商道)를 지키는 존경 받을만한 상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일본이나 유럽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우리사회가 선악중심의 사회에서 손익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상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독일유학시절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바가지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불한 가격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불을 켜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상거래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선악이 손익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기업인들과 지도자들에게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 중에서 가장 수치심과 죄책감을 많이 가지고 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지향적인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옥양목에 풀 먹인 듯 뻣뻣했던 대통령이라는 권위주의의 상징을 유럽의 정치인들만큼이나 부들부들하게 풀끼를 빼버렸습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손익중심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뻔뻔한 인물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손해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묵묵히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손익중심의 인물들이 그 동안 저지른 추악한 비리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명예가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의문입니다.

 

그래서, 『국화와 칼』을 떠올렸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에게 연구를 부탁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지 꽤 됐지만, 일본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이 일본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그렇게도 잘 짚어낼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인들을 잘 모릅니다. 하긴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판에 바다 건너 섬사람들의 특성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겠지요.

 

그녀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소가 수치심(shame)이라고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을 크나큰 불명예로 생각합니다. 모욕하는 것도 모욕당하는 것도 매우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일본말에는 상대방을 비하하는 욕설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수치심을 건드리는 일은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모욕을 받은 경우, 상대에게 반드시 복수를 감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법률체계가 완비되면서 상대에 대한 물리적인 복수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 즉 자살을 시도하곤 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래서 불명예스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는 할복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서양에는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 따라 수치심보다는 죄책감(guilty)이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사회적 행동이 좌우됩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옳고 그름, 즉 선악시비의 마음을 말하며, 이것이 행동을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중세에는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성경에 대한 해석권한을 독점했던 교회의 가르침에 의지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선악을 판별하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유대기독교의 기본사상이었습니다.

 

양심의 빛은 희미해지고, 선악은 손익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대적인 이성 중심의 계약사회에서는 양심의 소리보다는 법률에 저촉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약, 법률, 합리성 등과 같은 근대적 이상(理想)은 인간에게서 죄책감이 점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계약과 법률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정한 것이고, 그것조차도 힘있는 자들의 농간으로 만신창이가 되곤 합니다. 계약과 법률이 주로 가진 자의 자기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현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도적으로 양심의 빛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법률이 복잡해질수록 인간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지고 죄책감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사상이 전지구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부터 옳고 그름에 대한 양심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경제문제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익이 되면 옳은 것이고 손해가 나면 틀린 것이 됩니다. 이익과 손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손익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손익은 영원하고 선악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익이란 사회적 손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손익은 공익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악의 판단에 포함됩니다.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사회적 이익을 선악의 문제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이익이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굶주린 자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장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성향과 상관없이 오늘날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사회를 비교해 보았을 때, 미국에는 손익지향적인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유럽사회에는 아직도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북구의 여러 나라들은 유대기독교적 사상에 근거한 죄책감이 지도층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적인 사회규범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가요?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현지도층의 행태에서 늘 보듯이,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손해를 보는 것은 악이고, 이익이 곧 선이라는 등식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정책적 의사결정을 보면, 사회적인 손익이라는 빌미를 끌어다 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계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일을 하고자 했던 노무현은, 기업인들에게 돈이나 갈취하고 부정부패에 찌든 인간으로 비춰진, 저 모욕적이고도 불명예스런 사건들에 직면했을 때,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 오늘은 정말 슬픈 날입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그는 분명 손익을 따지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덕인 법률조차 어기면서까지 오로지 손익만 따지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슬픈 날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이번 장례식을 통해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생물학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분의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장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함께 산 분들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나의 삶에서 부활하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산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나에게 끼친 심리학적인 부활이 있습니다. 체스터 바나드, 피터 드러커와 같은 경영학자들, 칼 로저스, 칼 융, 아브라함 매슬로우, 밀턴 에릭슨 등과 같은 심리학자들, 죄렌 키에르케고르, 마틴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엠마누엘 레비나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내 머리 속에서 살아 있는 듯 합니다. 그들이 내 속에서 부활한 것일까요?

인간에게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죽음은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끔찍하지 않을까요? 삶은 죽음의 반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삶도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가능한지도 모릅니다.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Irvin D. Yalom, 1931~)은 아예 삶이 죽음의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빈 얄롬, 임경수 옮김, 실존주의 심리치료, 학지사 2007, 50쪽 참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행복도 역시 불행의 피조물입니다. 건강도 질병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질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의 축복을 이해할 수 없겠지요. 자유는 속박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불행, 질병, 속박과 같은 것은 일상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체험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다른 그 어떤 체험적 속성과 다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말하고, 죽음을 상상할 수 있지만, 죽음은 결코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실존적 체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치명적 질병이나 사건을 겪으면서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을 통해 어느 정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큰 사건이나 질병을 통해 그 동안의 삶의 자세를 진지하게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읽은 자료와 문헌들을 정리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ü  삶의 우선순위를 바꾼다: 가치 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한다.

  ü 선택에 대한 자유를 느낀다: 가치 없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다.

  ü 만물에 대해 생동감을 느낀다: 계절의 변화, 풀잎, 바람, 낙엽 등에 의미를 부여한다.

  ü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 깊은 대화를        한다.

우리는 가끔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태도를 180도 바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라고 부릅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인간적으로 크게 성숙해지는 현상입니다. 죽음이 삶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뒤따르는 부활의 기적입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통해 성숙해지는 현상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나는 지금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섰습니다. 지금 남은 생애가 매일 부활의 삶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확고히 세우지 못하고, 때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나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안에서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로마서 7 21~25)

나도 내 속에는 두 개의 법이 있음을 늘 봅니다.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그렇지만, 내 생애의 끝에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삶에서 바울의 신앙이 부활할 수 있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7) 



p.s.
나의 장모상에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최동석
拜上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엄혹했던 일제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의 생각보다 일제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또다시 독재체제에 항거했던 자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90년을 사셨습니다.

 

막내 사위인 나는 항상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맛깔스런 음식과 그 분위기를 영원히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잠든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나사로처럼 불현듯 죽음이 닥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모님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자연스레 잠이라는 휴식에 들어가는 것처럼, 천수를 누리고 2009. 5. 15(금) 오후 고이 잠드셨습니다. 그 흔들림 없는 삶의 자세는 자식들에게 이어져 이 우주에 영원할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