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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2 치료란 무엇인가(2)_가다머의 경우 (4)
  2. 2009.04.20 치료란 무엇인가(1)_칼 야스퍼스의 경우 (2)

오늘날 암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암환자보다 더 많은데도, 암환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치료는 의사의 전유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의사의 치료행위에 의해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실존적 이해는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스퍼스의 사유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환자의 병력기록도 중요하지만, 그가 살아온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의사의 치료행위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야스퍼스의 사유는 의사가 환자를 여전히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상을 본다는 것은 인간을, 무엇을 위한 존재로 수단화하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맹장염에 걸린 환자는 맹장수술의 대상이 됩니다. 맹장수술이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맹장염환자는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논리가 확장되면, 모든 인간은 질병이라는 못된 것을 가지고 있는 치료대상으로 전락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병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질병에서 오는 고통보다, 인간이 단순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관점을 바꿔서 인간을 대상이 아닌 목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질병과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설사 질병이 있더라도 그 질병을 가진 인간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 가능성을 우리는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의 해석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놀이(Spiel)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하는 데에 전적으로 몰두할 때에만, 놀이함은 그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놀이가 전적으로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은 놀이로부터 벗어나 있는 진지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놀이에서의 진지성이다.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놀이를 망치는 사람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를 대상처럼 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가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행하는 것이 다만 놀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단지 표현될 뿐이다.”
(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이길우 외 옮김,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2000, 190-191)

 

도대체 놀이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는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제3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놀이가 성립되지만, 놀이는 놀이로서 독립된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이는 참여자의 진지한 몰입을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놀이의 하나로서 고스톱을 예로 들어보죠. 고스톱에 참여하는 사람이 고스톱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놀이로서의 고스톱은 망치는 것이 됩니다. 사방치기, 바둑, 테니스 등 모든 놀이가 동일합니다. 놀이에서는 어떤 위계구조도 거부합니다. 놀이 참여자는 동등합니다. 그래야 놀이가 놀이로서 성립합니다. 나는 가다머의 이런 통찰을 위대한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놀이의 개념을 치료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라는 제3의 중립영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환자도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치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는 함께 치료에 참여함으로써 동등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의사는 자신의 전문성을 진지하게 치료의 중립지대에 내어놓고, 환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질병을 진지하게 치료의 장에 내어 놓음으로써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의사와 환자가 치료에 몰입할 때, 온전한 치료가 됩니다. 치료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환자와 의사는 치료의 영역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만납니다. 치료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의사는 환자가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온전함을 얻게 되고, 환자 역시 의사가 진지하게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치유(healing)의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의사와 환자는 치료를 통해 온전함에 이릅니다.

 

이렇게 대등한 입장에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을 통해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온전한 치료가 가능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힘의 격차로 불균형하게 찌그러진 관계가 지속된다면 오히려 치료를 망치게 됩니다.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닌 경우에 놀이가 망가지듯이 말입니다.

 

치료에서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모든 인간은 야스퍼스가 말한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Ganzwerdenwollen)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함 또는 온전성(Ganzheit)를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온전함"으로 번역된 간츠하이트(Ganzheit)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독일어의 독특한 용법입니다. 온전함은 완전성이나 완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딘가에도 상처가 없는(unverletzt) 또는 상해되지 않은 전체라고나 할까요.

 

이 개념을 경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리더십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존적으로 평등합니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상태에 시달립니다. 모든 인간은 힘의 격차에 의해 고통 당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온전함은 훼손됩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상사와 부하는 결코 대등하지 않습니다. 부하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상사는 그것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부하는 성과를 내는 자원 또는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향해 부하를 끌든 밀든 앞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아 고통을 제거하듯이 말입니다.

 

리더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30년 직장생활을 통해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리더십 훈련뿐만 아니라 코칭과 같은 유사 리더십훈련과정에도 참가해 보았습니다. 자격증이나 수료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의 리더십이 좋아지거나 바뀌었을까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물론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별로 큰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리더십에 관한 지식을 조금 더 쌓았을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리더십훈련과정에 참여해 본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얻는 지식은 실존적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리더십을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그 영향력을 좋게 생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면에서 끌어 오르는 힘에 의해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 자발성이라고 볼 수 없겠죠. 어떻게든 강제된 것이니까요. 강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상사와 부하가 '리더십'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내어 놓고 대화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사와 부하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의 장, 리더십의 장을 통해 부하는 물론 상사도 자신의 영혼을 일깨워,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생기를 찾게 됩니다. 대화가 우리를 살립니다. 대화를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치료'가 가능하듯이, '리더십'도 대화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이란 리더십의 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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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질병에 대한 치료행위는 의사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환자는 자신의 고통을 치료해줄 의사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의사의 일방적 처방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의사와 환자는 결코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질병에 대한 전문가지만, 환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정보와 지식의 차이는 힘의 격차로 작용합니다. 정책입안자와 수혜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실존적 사유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의사로서의 경력과 그 경력에서 오는 철학적 사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정신병리학 전문가로서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주목하게 했고, 철학적 문제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치료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환자의 실존적 체험을 이해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력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가족, 직업, 사회적 관계 등 개인사의 상황을 잘 이해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은 인간의 육체에서 발생한 고통과 질병을 처치하거나 떼어냄으로써 온전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것은 온갖 실험적 증거와 통계적 확률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처방이 어떤 환자에게는 들어맞을 수 있으나, 다른 환자에게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들어맞지 않은 처방을 받은 환자에게는 그것이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완전히(100%) 잘못된 처방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서구의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이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많은 통계자료와 그 분석적 계량모형, 그리고 그것을 신봉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세계적 금융위기 상황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요즘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온전한 해결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경제학자들끼리도 갈팡질팡합니다. 가이트너와 크루그먼은 똑 같은 통계수치를 보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의 우리가 그토록 신봉했고, 또한 매우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수학적 모델들은 사실상 완전히(100%) 틀린 모델이었던 셈입니다. 각자 자기 입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완전히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동안 병원에 여러 번 신세를 진 사람으로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한국야스퍼스학회에서 엮은 논문집인데,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적 사유와 치료의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야스퍼스가 말한 실존적 치료는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실존적 치료는 단순한 의학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학 전체의 문제이자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서 근대문명이 추구했던 합리적이고도 차가운 해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존적 이해와 체험을 중시했던 야스퍼스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존적 체험이란 환자가 처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서 치열하게 살아 왔던 상황이나 사업의 실패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사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육체적 질병이든, 정신질환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책입안자들이, 현장에서 시민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통계숫자만으로 입안하면 사회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상황이나 국가적 정책과제들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보면, 주장만 있을 뿐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한 상태입니다. 정책입안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현장의 실존적 상황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의사는 환자가 되어 봐야 합니다. 정책입안자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판자촌과 옥탑방에서 살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카드빚에 내몰려 봐야 합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봐야 합니다. 한두번 광고용이 아니라 매일 말입니다. 그러면 사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사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조건의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를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면할 수 있는 시간과 충분한 의료수가, 양질의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의료시설과 의료장비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이루어져야 환자와 의사의 실존적 만남을 통해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갈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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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