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22 치료란 무엇인가(2)_가다머의 경우 (4)
  2. 2009.04.18 커뮤니케이션의 합리화에 저항한 인물_체스터 바나드(3) (11)

오늘날 암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암환자보다 더 많은데도, 암환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치료는 의사의 전유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의사의 치료행위에 의해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실존적 이해는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스퍼스의 사유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환자의 병력기록도 중요하지만, 그가 살아온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의사의 치료행위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야스퍼스의 사유는 의사가 환자를 여전히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상을 본다는 것은 인간을, 무엇을 위한 존재로 수단화하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맹장염에 걸린 환자는 맹장수술의 대상이 됩니다. 맹장수술이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맹장염환자는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논리가 확장되면, 모든 인간은 질병이라는 못된 것을 가지고 있는 치료대상으로 전락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병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질병에서 오는 고통보다, 인간이 단순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관점을 바꿔서 인간을 대상이 아닌 목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질병과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설사 질병이 있더라도 그 질병을 가진 인간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 가능성을 우리는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의 해석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놀이(Spiel)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하는 데에 전적으로 몰두할 때에만, 놀이함은 그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놀이가 전적으로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은 놀이로부터 벗어나 있는 진지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놀이에서의 진지성이다.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놀이를 망치는 사람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를 대상처럼 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가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행하는 것이 다만 놀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단지 표현될 뿐이다.”
(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이길우 외 옮김,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2000, 190-191)

 

도대체 놀이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는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제3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놀이가 성립되지만, 놀이는 놀이로서 독립된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이는 참여자의 진지한 몰입을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놀이의 하나로서 고스톱을 예로 들어보죠. 고스톱에 참여하는 사람이 고스톱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놀이로서의 고스톱은 망치는 것이 됩니다. 사방치기, 바둑, 테니스 등 모든 놀이가 동일합니다. 놀이에서는 어떤 위계구조도 거부합니다. 놀이 참여자는 동등합니다. 그래야 놀이가 놀이로서 성립합니다. 나는 가다머의 이런 통찰을 위대한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놀이의 개념을 치료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라는 제3의 중립영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환자도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치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는 함께 치료에 참여함으로써 동등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의사는 자신의 전문성을 진지하게 치료의 중립지대에 내어놓고, 환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질병을 진지하게 치료의 장에 내어 놓음으로써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의사와 환자가 치료에 몰입할 때, 온전한 치료가 됩니다. 치료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환자와 의사는 치료의 영역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만납니다. 치료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의사는 환자가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온전함을 얻게 되고, 환자 역시 의사가 진지하게 내어 놓은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치유(healing)의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의사와 환자는 치료를 통해 온전함에 이릅니다.

 

이렇게 대등한 입장에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을 통해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온전한 치료가 가능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힘의 격차로 불균형하게 찌그러진 관계가 지속된다면 오히려 치료를 망치게 됩니다.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닌 경우에 놀이가 망가지듯이 말입니다.

 

치료에서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모든 인간은 야스퍼스가 말한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Ganzwerdenwollen)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함 또는 온전성(Ganzheit)를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온전함"으로 번역된 간츠하이트(Ganzheit)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독일어의 독특한 용법입니다. 온전함은 완전성이나 완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딘가에도 상처가 없는(unverletzt) 또는 상해되지 않은 전체라고나 할까요.

 

이 개념을 경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리더십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존적으로 평등합니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상태에 시달립니다. 모든 인간은 힘의 격차에 의해 고통 당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온전함은 훼손됩니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상사와 부하는 결코 대등하지 않습니다. 부하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상사는 그것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부하는 성과를 내는 자원 또는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향해 부하를 끌든 밀든 앞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아 고통을 제거하듯이 말입니다.

 

리더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30년 직장생활을 통해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리더십 훈련뿐만 아니라 코칭과 같은 유사 리더십훈련과정에도 참가해 보았습니다. 자격증이나 수료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의 리더십이 좋아지거나 바뀌었을까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물론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별로 큰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리더십에 관한 지식을 조금 더 쌓았을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리더십훈련과정에 참여해 본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얻는 지식은 실존적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리더십을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그 영향력을 좋게 생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면에서 끌어 오르는 힘에 의해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 자발성이라고 볼 수 없겠죠. 어떻게든 강제된 것이니까요. 강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상사와 부하가 '리더십'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내어 놓고 대화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사와 부하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의 장, 리더십의 장을 통해 부하는 물론 상사도 자신의 영혼을 일깨워,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생기를 찾게 됩니다. 대화가 우리를 살립니다. 대화를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치료'가 가능하듯이, '리더십'도 대화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이란 리더십의 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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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는 조직의 보편적 요소를 세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공동의 목적
둘째, 협력의지
셋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첫째 요소인 공동의 목적은 효율성을 공학적으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왜곡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학적 효율성이란 투입산출의 비율로서 궁극적으로는 이윤입니다. 이윤에 공헌하는 것은 효율적인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게끔 세상은 점점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숫자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요소인 협력의지도 또한 숫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자본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자본으로 바꾸었습니다. 공동의 목적을 향하여 인적 자본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변환되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와 수학자들이 모여서 합리적인 계량모델을 만들어 자본시장을 공략했지만 인간의 행위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탄 거대한 배, LTCM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사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명확성과 헌신

 

오늘은 셋째 요소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직 내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나드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떤 것을 강조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커뮤니케이션의 경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디다 대고 말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30년간의 직장생활에서 발견한 것은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사고과를 하는 조직도에 상사와 부하 사이가 명백한데, 뭐가 문제냐고 할지 모르지만, 비공식 통로가 워낙 많고, 연줄로 엮여 있어서 이것을 잘 꿰뚫지 않으면 조직에서 살아 남기 힘듭니다. 부하는 어따 대고 말해야 하는지를 눈치껏 잘 알아야 본전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이 그래서 일어납니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권위의 문제가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경로가 명확하지 않아서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에 보완되어야 할 것이 권위의 문제입니다. , 모든 구성원은 누군가에게 보고해야 하고, 누군가의 부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나드는 책의 상당부분을 권위의 문제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원천과 조직 내의 조정시스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셋째,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 한 직접적이어야 하며, 그 라인도 짧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간접적이고 길면 내용이 오염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오류와 오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나드는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원칙을 더 얘기하고 있으나,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은 명확성입니다.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구성원들간에 서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헌신을 끌어 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나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울 교훈은 명확성(clarity)과 헌신(commitment)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미국식 경영의 합리화 과정에서 또 다시 왜곡되었습니다. 왜곡되는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명확성을 확보하는 것은 숫자로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헌신은 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숫자로 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숫자로 쪼아라! 이것이 미국식 경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식 경영을 Screwing by Number(SBN)라고 부릅니다.

 

숫자로 말하라! 이것이 현대 경영의 화두입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 숫자와 숫자의 조합인 그래프는 필수입니다. 정확성과 헌신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숫자는 정말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운동선수가 공을 잡기 위해 자기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그곳에 숫자판(scoreboard)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어떤 척도로 숫자화되는 순간, 그 척도 이외의 모든 가치는 삭제됩니다. 숫자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만든 물건이 10,000원에 거래된다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어떤 철학이 내포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연이 묻어 있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10,000원어치의 가치만 있을 뿐, 나머지 모든 가치는 사라지거나 삭제됩니다. 만약 이효리가 입던 옷의 가치는 어떨까요? 경매에 부치면 얼마가 나올까요? 1,000? 아니면 십만 원? 어떤 가격이 나오더라도 그 가격 이외의 어떤 가치도 사라집니다. 일단 숫자가 결정되면, 그 숫자 이외의 어떤 가치도 삭제됩니다.

 

영업사원에게 10억 원의 매출목표가 할당되고 나면, 그 외의 모든 가치는 사라지거나 생략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요즘은 병원에서도 각 진료과의 수입을 정교하게 원가계산을 해서 수익공헌도를 계산합니다. 각 과장에게는 그 수익공헌도를 얼마까지 높이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환자의 회전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의사는 환자가 환자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입니다. 교수들은 논문 몇 편을 발표하고 유명저널에 게재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평가지표에서 고려하는 수치 이외의 다른 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각급 학교의 학력도 숫자로 표시됩니다. 최근 이 숫자가 발표되었습니다. 앞으로 지역과 학교의 우열이 가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숫자의 힘 앞에 학부형들은 또다시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부모의 빈부에 따라 아이들의 빈부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이 아니라 서서히 죽이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우둔한 권력자일수록 숫자를 통해 경쟁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내가 숫자에 빠져드는 이유

 

숫자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내 경험을 통해 잠시 얘기해보죠. 나는 작년 10월부터 이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막 6개월이 된 셈입니다. 블로그를 하려고 맘 먹은 것은 세 가지 목적에서였습니다.

 

첫째,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나 직원들과의 장기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마련하는 것

둘째, 내 사유세계와 그 결과물들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는 것

셋째,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비교적 차분하게 기록하는 것

 

처음에는 카페를 만들까, 싸이월드를 할까 하다가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서 고생을 했지만, 블로그의 세계를 차츰 이해하면서 보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숫자입니다. 이 블로그의 오른쪽 아래에 보면, 카운터 모듈이 있습니다. 방문자 숫자가 떡 찍힙니다. 어제는 몇 명, 오늘은 몇 명, 전체 몇 명이 자동으로 계산됩니다. 처음에는 10여명이었는데 요즘은 몇 백 명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신지애 선수에 대해 글을 썼더니 어떤 날은 몇 천명이 한꺼번에 몰려 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방문자 수에 따라서 광고수입도 얻을 수 있답니다. 그래서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서 혈안이 된 블로거들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호객행위로 방문자를 끌어 모으기도 합니다. 호객행위는 아니어도 자극적인 제목을 뽑으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하지만, 파워블로그라고 해도 광고를 달아봐야 수입은 대부분 껌 값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들 방문자 수에 목을 매는 걸까요? 그게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우열을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더 큰 숫자가 더 힘이 세고, 더 매력적이고, 크면 클수록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심지어 숫자가 클수록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 블로그는 당초의 목적을 잘 달성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숫자입니다. 매일, 오늘은 방문자가 몇 명인가 하고 들여다 봅니다. 숫자가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숫자가 내려가면 별로입니다. 방문자수를 늘리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숫자가 큰 소위 파워블로그도 들어가 봤습니다. 이 숫자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볼까,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들을 다루어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당초의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는데, 나는 왜 방문자수에 연연해 하는 걸까? 내가 내 자신에 물었습니다.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방문자수가 많아진다고 내게 당장 유리한 어떤 것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방문자수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방문자수가 많아져 봐야, 깨알같이 쓰인 내 글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사진이나 여행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숫자가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자꾸 방문자수에 마음이 쓰이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블로그에 들어가면 우선 숫자부터 봅니다. 이렇게 나도 숫자에 중독되어 가는가 봅니다.

 

왜 그럴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거기 숫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숫자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숫자의 힘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에 쪼임 당하는 현대인과 바나드

 

이렇게 현대인은 숫자에 쪼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쪼임을 통해서는 온전한 헌신을 끌어낼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쪼임은 오직 긴장상태를 유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긴장상태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운동의 기초는 몸의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긴장이 풀려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있어서도 마음의 긴장이 풀려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인데, 오히려 숫자로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조직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체스터 바나드는, 커뮤니케이션은 명확해야 하고 구성원의 헌신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상은 테일러리즘의 숫자광풍에 휩쓸려 피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나드의 사상을 오늘에 되살려야 할 시점입니다.

 

 

P.S.  바나드의 사상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과급과 같은 첨예한 문제뿐만 아니라 의사결정메커니즘에서도 예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기회에 언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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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