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24 하이데거와 경영 (2)
  2. 2008.10.28 인간은 실존한다 (4)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독일의 관념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포스트모던적인 생활세계 속의 인간존재를 드러나게 한 철학자입니다. 하이데거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사상은, 자기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표방한 사르트르보다 더 실존주의적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론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체계화된 이론이 얼마나 생활세계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끊임없이 밝혀주려고 애썼습니다. 이론과 개념의 합리성 확보에 매몰되어 있는 학자들이 스스로 깨우치도록 전통적인 학문방법을 비판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이라는 책에 이오니아의 마법”(Ionian Enchantmen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지방에 살았던 탈레스는 모든 물질이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본질은 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이오니아학파는 변화하지 않는 만물의 근본을 탐구하려 했습니다. 그 후에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라고 보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그것을 수(number)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불변하는 본질 또는 동일성을 찾아내려는 사유의 방식은 후대의 모든 학문에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이것을 에드워드 윌슨은 이오니아의 마법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서양사상과 학문전통은 이 마법에 걸려있습니다.

 

서양학문은 변화무쌍한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상과 존재를 넘어서는, 변화하지 않는 보편성, 동일성, 객관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보지 못하고, 분석해 들어가서 실증해내야 하는 학문방법, 즉 실증주의적 환원주의(reductionism)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경영학도 이런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려있습니다. 최근에 공전의 히트를 친 경영관련 문헌들은 다 이 마법에 걸려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성과를 내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했다고 공언했습니다. 위대한 성과를 내는 블랙박스를 해독했노라고 장담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추출해낸 결과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적인 원리들을 실천한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며, 그 책에서 언급된 기업들도 몰락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벤치마킹 대상이 될만한 기업들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평균 수준의 기업으로 추락합니다. 이런 전례는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80년대에 열광했던 톰 피터스의 『초우량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라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소개한 기업들 중에는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계발서 중에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도 역시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린 책입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7가지 습관을 잘 익히면 성공적인 사람이 된다는 불변의 공식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편적 법칙을 추출하여 가르치는 방식이야말로 칸트나 헤겔이 추구했던 이성중심적인 학문방법입니다. 헤겔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듯이, 서양학문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중시했습니다. 분석적 이성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는 이오니아의 마법을 점점 더 강화시켜 줄 뿐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이데거는 진리는 분석적, 추상적, 객관적, 이성적 작업을 통해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이고도 구체적인 생활세계 속에서, 즉 매순간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진리를 체험합니다. 추상화된 교과서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의미부여가 곧 진리인 셈입니다. 진리는 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일상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매순간 내 영혼을 순수하게 만드는 나 자신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야말로 진리의 사건입니다.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 일상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투명하게 이해하고 세계와 연결하게 됩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서양학문적 전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당연히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려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석 결과를 보아야 안심했습니다. 실증적 결론을 도출해서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 들뢰즈, 라캉과 같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분석하고 쪼개서 그것을 추상화함으로써 변하지 않는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근본적이고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생활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점차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을 갖도록 인도했습니다.

 

경영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마음은 분석의 대상일 뿐 아니라 연결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해야 조직이 진정한 협동체(공동체)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린, 연결 없는 조직은 무한 경쟁의 긴장과 파벌싸움의 연속일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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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다고 칩시다. 왼손에 사과가 있다면, 오른손의 칼이 무엇을 뜻할지는 뻔합니다. 누구나 내가 과일을 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왼팔로 한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면 오른손의 칼은 무엇이 될까요? 살인무기가 됩니다. 이렇듯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관계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칼은 장인(匠人)의 영감에 의해 종이나 과일을 자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직접 말했듯이, 칼에 있어서는 본질(라틴어로 essentia), 즉 과일 깎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가 실존(라틴어로 existentia)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고유한 특성, 즉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실존에 앞섭니다.

 

사실 서양철학사에서 본질과 실존의 문제는 고대그리스철학에서부터 내려온 존재론과 인식론의 긴 여정의 산물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항상 본질(essentia)과 그 본질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존재(existentia)의 문제로 나뉘어서 사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 또는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칼이 장인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2,500년간을 철학자들이 사유해봤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알 수 없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existence)를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존재를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실존(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존재에 부합하는 이 실존(實存)이라는 용어를 좋아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물들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존재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만 실존한다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인간은 영혼을 가진 실존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명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존한다는 말은 사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PC에 글쓰기와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가 PC와의 풍요로운 관계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이러한 관계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성(實存性)이란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과의 관계설정은 실존하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사는 부하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경영자가 구성원을 한낱 조직목표달성의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인간의 실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직생활의 고단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을 한낱 욕망의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마음과 마음은 단절되어 갈등이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모든 인간을 실존적 존재로 평등하게 인정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을 실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수천 명의 미군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부시의 눈에는 미군병사들과 이라크 시민들이 존재를 위한 존재’, 즉 실존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말하는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나’(Ich)와 ‘그것’(Es)의 관계로 바뀝니다. 인간사회의 불행은 대부분 상대방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 즉 ‘그것’(Es)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존에는 타인의 실존이 필수적입니다. 나의 실존성을 보장하는 것은 타인과의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부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단절되어 있는 착취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 철학이 한 때 유행하는 철학적 사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는 영원한 사유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만 인간의 실존성이 문제되진 않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다 실존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상사는 그의 부하들의 실존성을 존중해 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하들도 상사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당장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업가들은 사업파트너들을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간에도 그랬을지 모르고,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강의를 듣는 기업체의 간부들을 오로지 내 수입을 늘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영혼에 진정으로 보약이 되는 내용을 포기하고 당장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과 마음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효율성(efficiency)이 가장 높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단점이나 취약점이 드러나더라도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과감한 시도를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은 신뢰의 표상이며, 신뢰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반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옆에 있을 때, 넘어지더라도 과감히 걸음마를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타인을 실존적 존재로 인식하여 그와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에 있었을까? 우선 나의 아내와는? 부모형제와는? 아이들과는? 내가 사업상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그들이 나를 실존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내가 상사였을 때 부하들에게 그들의 실존성(자유, 선책, 책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나와 나의 상사는 어땠을까? 뒤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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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