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C에 관한 글을 쓰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내가 잘 아는 패키지공급업자들과 컨설턴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못쓰고 있었습니다. 소위 BSC전문가라는 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도 인간적으로 친한 사이입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대략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계량화 하지 않고 어떻게 기업경영을 한단 말인가?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2.  올바른 KPI를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KPI로 관리하겠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지 않은가?

3.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략을 세워서 강력하게 추진해도 될까말까 한판에 무슨 영혼이니 실존이니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가?

 

미국 경영학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이라면, 캐플란의 BSC개념이 드러커의 MbO를 테일러리즘으로 둔갑시킨 것이라는 점을 금새 알아챘을 것입니다.



 

캐플란과 노튼의 주요 저작들

나는 계량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이지는 일은, 계량화와 KPI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나아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타율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구성원들이 KPI의 노예로 전락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구소련에서 그 폐해가 입증된 집단농장식 관리방법 BSC개념을 통해 도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 구소련에서처럼 무자비하게 내려 찍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스마트하게 진행된다는 표면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것이 뒤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숫자를 지배하도록 해야지, 숫자가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나면, 누구나 스스로 어떤 사물과 현상이 어떤 지표로 어떻게 관리되는 것이 좋은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compelling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을 불어넣는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없는 경영진들은 숫자로 쪼는 방식이 가장 쉽고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쪼는 방식의 관리(Screwing by Number)를 반복하는 것이죠. 나는 실무에서 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라는 그물을 씌워서 그 틀에 가둬버리는 현상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리하라는 말인가?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는 어떤 규정이나 KPI로 가족구성원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순간 고민하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규정도 없고 성과지표로 관리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각자 자기역할을 알아서 합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직장에 가면 왜 그렇게 많은 규정과 성과지표의 틀로 옭죔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업에서 각종 규정과 성과지표를 설정하기 전에, 그게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명백해진다면, 다시 말해 매력적인 비전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숫자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학생은 목표하는 성적을 위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원하는 매출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전략을 실천해 갈 것입니다. 학자는 구체적인 연구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예술가는 언제까지 어떤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숫자는 이때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쓰이는 숫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위로부터 강제로 배분된 숫자와는 완전히 다른 숫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세요. 매력적인 비전을 상실한 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당근에 대한 탐욕에 시달립니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당근과 채찍의 타율적인 통제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BSC가 그 도구로서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개념을 만든 사람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에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공산주의 집단농장체제와 다를 것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David P. Norton) 박사는, 인간이 영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한 BSC개념은, 마치 비행기조종사가 코크핏(cockpit)에서 비행고도와 항로를 조절할 수 있듯이, 경영진 몇몇 사람이 조직구성원들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고 믿게끔 하고 있습니다. 컨설턴트들은 실제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구성원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 또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곧 자본인 셈이죠. 인간은 돈이라는 숫자로 전환되어 관리됩니다. 인간이 대상이고 수단이고 자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통계적 기법과 공학적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계량화와 합리화의 대가로 일생을 살아왔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90세를 앞두고 생애 말년에 가서야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합리성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Rationality will not save us.)

The Fog of War: Eleven Lessons From the Life of Robert S. McNamara, 2003 참조


정교하게 합리화된 도구로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려는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인간의 정신은 합리성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BSC는 올바른 인간관에 기초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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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테일러가 뿌린 과학적 측정에 의한 관리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과급과 함께 최적의 작업환경을 마련해 준다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최적의 작업환경이란 인간의 근육과 기계장치가 서로 조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될 수 없다는 격언이 미국의 산업계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과도해져서 1912년 의회에서는 노동자의 작업활동을 스톱워치로 재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1949년에 가서야 이 금지조항이 풀렸습니다.

 

이런 과학적 측정의 열풍은 테일러 이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식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와 심리에 대해 측정하고 싶은 유혹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품질관리운동을 거쳐 벤치마킹, 균형성과지표, 식스시그마 운동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공장노동에 적용되던 이념이 오늘날에는 지식근로자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영학자들이 테일러의 생산성 복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테일러리즘을 넘어서고 싶었던 사람은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였던 엘톤 메이요(George Elton Mayo, 1880~1949)였습니다. 7년 반이나 넘는 장기간의 실험 끝에 인간은 타인에 의한 감정적 관심에 따라 생산성이 변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193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런 결론을 얻게 한 것이 저 유명한 호손 연구(Hawthorne Experiment)입니다. 전화설비 생산공장이었는데, 조명의 밝기와 생산성, 휴식시간과 생산성, 작업일수와 생산성은 물론이고, 성과급, 수면시간, 심지어 공장 내 습도까지도 실험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어떤 변수를 어떤 방식으로 조작해도 생산성이 올라갔습니다. 공장 노동자에게 실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관리자와 연구진에게 그만큼 주목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상사와 동료들 간에 인간관계를 좋게 만듦으로써 생산성이 올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도 상사나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때 일이 재미있었고 열심히 일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한국은행에서 조직개혁작업을 할 때는 엄청난 업무량으로 육체적으로는 벅찼지만, 상사와 동료, 그리고 부하직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로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엘톤 메이요 교수의 연구결과가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호손실험은 테일러리즘에 대한 반격이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 감정은 작업장의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실험결과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것이 곧 생산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이요는, 인간은 결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회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온 세상이 테일러의 복음을 따라 다녔지만, 메이요는 그게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긴 하지만, 이 거대한 실험프로젝트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습니다. 실험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생산성이 좋아진 게 아니라 돈 벌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 이면에 깔려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팀의 인사를 담당했던 관리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증가된 주된 이유는 추가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실험에 참여했던 동료 연구자들도, 메이요가 연구결과를 다르게 해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교수진이 추진했던 방대한 연구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메이요는 자신만의 관점과 신념을 연구결과에 꿰어 맞추었고 결과들을 교묘히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기업을 연구해 왔던 사람들이 제기한 상반되는 견해를 무시했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이 단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생산성이 좋아졌다는 엉터리 결과를 얻기 위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그럴듯하고, 단순하고 인간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진실처럼 느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연구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기업 내에 비공식조직인 각종 동아리 모임과 호프데이와 같은 행사를 장려하는 것은 메이요의 덕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업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공식적인 행사들이 과연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여주는지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단 한번도 그런 행사를 통해 일에 대한 동기가 고양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직원들간의 화합을 위해 연수원에서 각자의 성격특성(MBTI, DiSC와 같은 검사지로 성격유형을 분석한 결과)을 비교하고 장단점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과 리더십 스타일과 유형을 분석(수많은 분석틀들이 시중에 유포되어 있음)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방식의 훈련코스를 여러번 참가해봤습니다. 연수를 받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이런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만, 짐작컨대, 다른 사람들도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베푸는 행사라는 게 대부분 회사가 직원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는 알리바이, 즉 생쇼(show-off)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신뢰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이나 행동패턴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사(퍼포먼스)가 다 엘톤 메이요의 아이디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껍데기를 보면 그럴듯 한데,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아무튼, 인간이 일하는 근본적 동기는 무엇인가? 테일러가 주창한 것처럼 돈을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윤리인가? 메이요의 신념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인정받으려는 욕구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1930년대 미국경영학은 이 의문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을 합리화하려는 두 가지 시도가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테일러리즘의 열풍은 가시지 않았고, 회사는 여전히 직원들의 노동현장을 몰래 숨어서 스톱워치로 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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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인적자원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과학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경영학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입니다. 아버지는 퀘이커 교도인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청교도 이민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에게는 엄격한 개신교 노동윤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담배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괜히 흥분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청교도적인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하버드 법대에 들어갔으나 시력이 나빠져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물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공장노동자들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았는데, 더 많은 일을 하면 더 벌 수 있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일하면 공장주가 성과급을 더 지급하는 게 아니라 성과급의 시간당 급료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농땡이(soldiering)를 부렸습니다.

 

테일러의 노동윤리로서는 이런 모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꾀부리는 노동문화는 테일러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철주야 노력해서 개인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1주일에 6일간은 꼬박 일하고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정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밤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개인당 최고의 생산량과 표준적인 생산량을 계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기계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이용됐던 기본원리들을 탐구했습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단위 노동시간당 생산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위시간당 작업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작업을 구성요소로 세분화했습니다. 세분화된 요소별 작업을 결합하면 전체 작업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신의 자동차생산에 응용하여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능력이 단위시간당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모든 작업과정을 규격화된 노동형태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렇게 표준화된 노동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을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일러에게 있어 과학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행위를 계량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분간 정상속도로 작업한 경우와 전속력으로 작업한 경우를 구분해서 일인당 하루에 최대한의 생산량을 계산합니다. 하루 10시간 노동할 경우 최대생산량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휴식시간을 하루 일과의 40%로 계산하여 표준적인 생산량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림짐작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공장에 적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산량이 전보다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실제로 받은 성과급은 전에 받았던 것보다 적었습니다.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는데도 말입니다. 표준적인 생산량을 초과한 것에 비례하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초 시계로 노동시간을 재는 테일러가 원흉이라고 점차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노동에 있어서 태만과 게으름을 몰아내고 생산성을 최소한 30%이상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해고하도록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중심으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물질적인 기계장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과 근육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장치를 때려부수는 식의 저항도 불가능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소리소문 없이 퍼졌습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에 따라 노동관행이 바뀌고 있었고,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1911년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경영학의 역사와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고, 테일러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경영학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초 시계를 가지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통제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과학적 관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스로 파업은 진정되었지만, 1912년 미국의회가 나서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테일러는 의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는 결코 효율적인 대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는 시스템만도 아닙니다. 이는 초 시계로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평가하는 장치도 아닙니다. 이것은 노동시간이나 동작에 대한 연구도 아닙니다. … 이것은 완벽한 정신혁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테일러의 노동윤리이자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경영분야의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과학적 관리방식은 위대한 통찰력이었고, 서구 사상에 미친 영향들 중 가장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공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적 관리에 대한 강박관념은 그의 말년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디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완벽한 잔디를 만들기 위해 800번 이상 실험을 했습니다. 1cm2에 심겨진 잔디 잎을 늘 계산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한두 해 동안 테일러는 잔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잔디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잔디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공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테일러의 강박관념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행위의 합리화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테일러의 후예로서 테일러리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멍청하게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일러가 만약 대학을 마치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미국경영학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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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