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C에 관한 글을 쓰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내가 잘 아는 패키지공급업자들과 컨설턴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못쓰고 있었습니다. 소위 BSC전문가라는 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도 인간적으로 친한 사이입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대략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계량화 하지 않고 어떻게 기업경영을 한단 말인가?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2.  올바른 KPI를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KPI로 관리하겠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지 않은가?

3.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략을 세워서 강력하게 추진해도 될까말까 한판에 무슨 영혼이니 실존이니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가?

 

미국 경영학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이라면, 캐플란의 BSC개념이 드러커의 MbO를 테일러리즘으로 둔갑시킨 것이라는 점을 금새 알아챘을 것입니다.



 

캐플란과 노튼의 주요 저작들

나는 계량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이지는 일은, 계량화와 KPI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나아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타율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구성원들이 KPI의 노예로 전락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구소련에서 그 폐해가 입증된 집단농장식 관리방법 BSC개념을 통해 도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 구소련에서처럼 무자비하게 내려 찍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스마트하게 진행된다는 표면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것이 뒤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숫자를 지배하도록 해야지, 숫자가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나면, 누구나 스스로 어떤 사물과 현상이 어떤 지표로 어떻게 관리되는 것이 좋은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compelling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 매력적인 비전을 불어넣는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없는 경영진들은 숫자로 쪼는 방식이 가장 쉽고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쪼는 방식의 관리(Screwing by Number)를 반복하는 것이죠. 나는 실무에서 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 KPI)라는 그물을 씌워서 그 틀에 가둬버리는 현상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리하라는 말인가?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는 어떤 규정이나 KPI로 가족구성원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순간 고민하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규정도 없고 성과지표로 관리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각자 자기역할을 알아서 합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직장에 가면 왜 그렇게 많은 규정과 성과지표의 틀로 옭죔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업에서 각종 규정과 성과지표를 설정하기 전에, 그게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명백해진다면, 다시 말해 매력적인 비전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숫자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학생은 목표하는 성적을 위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원하는 매출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전략을 실천해 갈 것입니다. 학자는 구체적인 연구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예술가는 언제까지 어떤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숫자는 이때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쓰이는 숫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위로부터 강제로 배분된 숫자와는 완전히 다른 숫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세요. 매력적인 비전을 상실한 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당근에 대한 탐욕에 시달립니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당근과 채찍의 타율적인 통제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BSC가 그 도구로서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개념을 만든 사람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에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공산주의 집단농장체제와 다를 것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교수와 데이비드 노튼(David P. Norton) 박사는, 인간이 영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한 BSC개념은, 마치 비행기조종사가 코크핏(cockpit)에서 비행고도와 항로를 조절할 수 있듯이, 경영진 몇몇 사람이 조직구성원들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고 믿게끔 하고 있습니다. 컨설턴트들은 실제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구성원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 또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곧 자본인 셈이죠. 인간은 돈이라는 숫자로 전환되어 관리됩니다. 인간이 대상이고 수단이고 자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통계적 기법과 공학적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계량화와 합리화의 대가로 일생을 살아왔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90세를 앞두고 생애 말년에 가서야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합리성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Rationality will not save us.)

The Fog of War: Eleven Lessons From the Life of Robert S. McNamara, 2003 참조


정교하게 합리화된 도구로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려는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인간의 정신은 합리성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BSC는 올바른 인간관에 기초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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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어린 시절,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의 이름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저녁 때 퇴근한 아버지는 가끔 맥나마라가 어쩌고 저쩌고 하셨습니다.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아직도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춘천에 있는 캠 페이지(Camp Page)라고 불리던 미 8군 유도탄기지 사령부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셨습니다. 미국 국방부 장관과 자동차 정비공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자주 맥나마라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맥나마라가 그 부대의 자동차 정비반장쯤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안드레아 가보, 『자본주의 철학자들』, 황금가지 2006

나중에 (미국식) 경영학을 공부하다가 맥나마라가 미국경영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려서 듣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맥나마라는 천재적인 인물입니다. 하버드에서 MBA를 받고 곧바로 회계법인에서 사회경력을 시작했지만, 1년 후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조교수들 중에서 가장 젊었고 가장 연봉이 높았으니까요. 2차 대전 중에 육군 항공대 통계관리국에서 분석적인 통계기법을 사용하여 전투기 폭격의 효과를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작전하던 것을 이런 분석적 기법에 의해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포드에서의 계량화

 

전쟁이 끝나자, 그는 포드자동차에 들어갔습니다. 군수업체였던 포드자동차가 전후 경영상의 혼란을 겪자 그는 시스템 분석, 계량분석 및 통계이론으로 회사를 개혁해냅니다. 맥나마라는 회계감사를 실시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사에 수백 명의 회계 및 재무분석가를 채용했습니다. 이런 분석을 통해 회사에 비용과 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익전망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돈줄을 재무담당자들이 틀어쥐도록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숫자로 계산하고 합리화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기업의 재무담당자들이 모든 숫자를 통제하는 관행은 이때부터 생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이런 관리방식은 경쟁자였던 제네럴 모터스(General Motors)보다 더 우수한 기업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맥나마라는 이런 분석기법이야말로 미국기업을 위한 새로운 규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재무담당자들을 좁쌀 같은 사람들(bean counter, 콩알을 세는 것처럼 융통성이 전혀 없는 쫌생이라고 비꼬는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산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취향이나 정서를 들어 재무담당자와는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면, 재무담당자들은 확실한 숫자와 도표를 보여주었습니다. 토론에서 누가 이길지는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숫자가 항상 이깁니다.

 

한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194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생산공장을 책임지고 있던 공장장이 본사에 건의를 했습니다. 공장시설이 낙후되었고, 지게차가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협소하여 공장현대화 작업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맥나마라는 공장 전체에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좁쌀까지 세면서 숫자를 만들어내느라 3년이 걸렸습니다. 참다 못한 공장장은 헨리 포드에게 직접 호소문을 보냈습니다. “품질이 엉망이고 페인트칠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생산한 차를 건조시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간절한 호소를 통해서 겨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맥나마라는 품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품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품질을 계량화하여 숫자로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품질을 계량화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올바른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품질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사가 품질기준을 내려 보내면, 공장에서는 그 기준에 숫자만 맞추는 방식으로 본사의 눈을 피해갔습니다. 그러면 본사는 더 강화된 기준을 내려 보내고, 공장에서는 그 기준을 피하는 요령을 찾아내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재무담당자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수치였습니다.

 

영혼 없는 숫자정신(numerical mind)을 심어놨더니

 

포드자동차는 점점 이익중심의 회사로 변해갔습니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침에 따라 자동차 구조를 분석하여 부품의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으로 수익을 증대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기법이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이었습니다. 이 기법은 오늘날에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분석기법에 의해 개발된 자동차가 핀토(Pinto)입니다. 1970년에 출시된 이 모델은 가격이 저렴해서 서민들에게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충돌할 경우, 차가 폭발해 버리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핀토(Pinto)의 폭발사고로 최소 59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 포드자동차는 비의도적 살인(reckless homicide)혐의라는 오명을 얻는 최초의 자동차회사가 되었습니다.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핀토(Pinto)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폭발하는 문제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연료탱크 내부에다 고무 라이닝(rubber lining)을 끼워 넣으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간단한 해결책을 쓰지 않았을까요? 비용편익분석에 의하면, 고무 라이닝을 끼우는데 1 3700만 달러의 비용이 소요되지만, 폭발로 화상이나 사망사고에 따른 총보상액을 확률로 계산하면 4950만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라이닝을 없애는 것이 이익공헌도가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맥나마라가 포드자동차에 남긴 유산입니다.

 

오늘날 미국 자동차 업계가 파산에 내몰릴 정도로 처참한 신세가 된 것은,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영혼 없는 수치들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계량분석에 입각한 경영관리의 합리화는 맥나마라의 개인브랜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 동안의 노고를 인정받아 1960 11월 포드가문의 일원이 아닌 사람으로서 첫 사장에 임명됩니다.

 

국방부에서의 계량화 작업

 

그러나 몇 주 후에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는 국방부장관에 임명됩니다. 맥나마라는 기왕에 내각에 들어가려면 재무부장관이 더 낫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케네디는 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국방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면서,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강화하고 싶어했습니다. 맥나마라가 제격이었습니다. 그는 장관이 되자마자 그 동안 포드에서 했던 계량분석적 합리화 모델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Robert McNamara(1967)

1960년 당시, 국방부는 미국 내 25대 기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조직이 되어 있었습니다. 맥나마라는 그런 국방부를 자신의 확고한 방침에 따라 개혁해 나갔습니다. 전후 냉전시대에 공산진영과 어떤 방식으로 대결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었습니다. 스푸트니크 쇼크, 한국전쟁, 피그만 침공 실패, 쿠바 미사일 사태, 베를린 장벽 설치와 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중요 정책결정의 정신적 틀(mental program)이 형성되었습니다. 맥나마라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8년간을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공산진영과는 힘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힘이란 숫자였습니다.

 

맥나마라가 믿었던 계량화가 그 폐해를 드러낸 것은 사실 포드자동차 핀토(Pinto)만이 아니었습니다. 월남전쟁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케네디는 직접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남부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특수부대와 군사고문단을 16,000여명까지 파견했습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주변국들이 도미노처럼 공산화 된다는 소위 도미노이론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케네디는 1964년 재선 이후에 월남에서 철수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963년 말까지 파견인원의 일부를 철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963 11월 케네디가 암살된 후,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의 계획을 취소시켰습니다. 이 배후에는 맥나마라가 있었습니다.

 

맥나마라는 모든 숫자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정보국(CIA)에서 올라온 보고서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CIA의 보고서에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더라도 캄보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산화될 염려는 거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CIA는 도미노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도 부정적이었습니다.

 

월남전의 계량화

 

맥나마라는 CIA내부에 특별전담반을 설치했습니다. 그 전담반의 임무는 베트남에서 진행된 모든 폭격기의 출정 결과를 수치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월별 폭탄투하의 종류, 위치와 수, 그리고 그 효과를 분석해서 보고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수치분석 결과를 신뢰했습니다. 맥나마라는 정작 계량적 분석기법에 대해 그것을 개발한 과학자들보다도 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베트남 북부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4 8월 미국이 월남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베트남 북부 통킹만(Gulf of Tonkin) 공해상에 머물던 미군 구축함이 어뢰정에 공격을 받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보복공격을 빌미로 즉각 의회의 승인을 얻어 선전포고도 없이 베트남 북부를 대규모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월남전은 그렇게 확대되어 갔습니다. 계량적 분석기법으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그 해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국방부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넘게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국방부는 폭격횟수, 적군 보급로 차단 건수, 전사자 수 등 수치관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계량화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계량화의 천재 맥나마라인들 월맹군의 열성과 투혼을 무슨 수로 수치화할 수 있었겠는가.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맥나마라가 특별전담반에 지시해서 계산한 분석보고서에는 폭탄투하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40여년이 지난 2005, 기밀에서 해제된 문서들을 조사한 언론은 기막힌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통킹만 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격을 받았다는 구축함의 함장은 어뢰정을 본적도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도 패했지만, 도덕적으로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계량적 모형과 그 수치를 믿은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계량화에 대한 폐해와 후회

 

맥나마라는 나중에, 베트남이 공산화 될 경우 공산주의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위험을 너무 크게 생각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량모형의 분석결과들을 보니까, 베트남 정도는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힘의 우위로 밀어 부치면 된다는 신념 때문에 다른 정보들을 제대로 검토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미국경영학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시스템 분석이나 계량분석 모형, 그리고 경영분석 기법들은 인간의 가치판단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봅니다. 그러므로 숫자의 의미는 보는 사람의 신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오지 않으면 숫자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모형의 전제와 가정을 바꾸기만 하면, 숫자는 바뀝니다. 전제와 가정을 정하는 것은 모형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정신입니다.

 



맥나마라는 아쉽게도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까요?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으며,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마저도 깨닫지 못했다. …… 인간의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국제 문제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생애를 문제해결에 대한 믿음과 실천에 바친 사람으로서는 사실 이런 점을 인정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불완전하고 정돈되지 않은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Robert S. McNamara, Argument Without End: In Search Of Answers To The Vietnam Tragedy, PublicAffairs 1999. 안드레아 가보, 심현식 옮김, 자본주의 철학자들, 황금가지 2006, 301~302쪽에서 재인용


 

그의 말이 변명인지 회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수학적 모형으로 정돈해 보고자 했던, 그리고 그 모형을 전세계에 전파하고자 했던 맥나마라는 자신의 생애 끝 무렵에 가서야 세상이 수치로 정돈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 걸까요? 그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오만한, 그리고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폐해는 어디에다 클레임해야 하나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정직하게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한 드러커의 외침, 테일러의 후예인 맥나마라에 의해, 메아리도 없이 거의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계량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미국식 경영학과 경영실무에서 더욱 확고해져 가고 있습니다. 모델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고, 그럴수록 경영자들은 더 좋아합니다. 물샐 틈 없이 직원들을 쥐어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델이 정교할수록 더 고가에 팔리고 있습니다.

 

p.s. 내가 어려서부터 귀따갑게 들었던 맥나마라의 생애는 <The Fog of War>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으로도 제작되어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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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인적자원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과학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경영학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입니다. 아버지는 퀘이커 교도인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청교도 이민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에게는 엄격한 개신교 노동윤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담배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괜히 흥분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청교도적인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하버드 법대에 들어갔으나 시력이 나빠져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물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공장노동자들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았는데, 더 많은 일을 하면 더 벌 수 있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일하면 공장주가 성과급을 더 지급하는 게 아니라 성과급의 시간당 급료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농땡이(soldiering)를 부렸습니다.

 

테일러의 노동윤리로서는 이런 모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꾀부리는 노동문화는 테일러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철주야 노력해서 개인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1주일에 6일간은 꼬박 일하고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정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밤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개인당 최고의 생산량과 표준적인 생산량을 계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기계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이용됐던 기본원리들을 탐구했습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단위 노동시간당 생산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위시간당 작업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작업을 구성요소로 세분화했습니다. 세분화된 요소별 작업을 결합하면 전체 작업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신의 자동차생산에 응용하여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능력이 단위시간당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모든 작업과정을 규격화된 노동형태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렇게 표준화된 노동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을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일러에게 있어 과학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행위를 계량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분간 정상속도로 작업한 경우와 전속력으로 작업한 경우를 구분해서 일인당 하루에 최대한의 생산량을 계산합니다. 하루 10시간 노동할 경우 최대생산량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휴식시간을 하루 일과의 40%로 계산하여 표준적인 생산량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림짐작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공장에 적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산량이 전보다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실제로 받은 성과급은 전에 받았던 것보다 적었습니다.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는데도 말입니다. 표준적인 생산량을 초과한 것에 비례하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초 시계로 노동시간을 재는 테일러가 원흉이라고 점차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노동에 있어서 태만과 게으름을 몰아내고 생산성을 최소한 30%이상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해고하도록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중심으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물질적인 기계장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과 근육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장치를 때려부수는 식의 저항도 불가능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소리소문 없이 퍼졌습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에 따라 노동관행이 바뀌고 있었고,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1911년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경영학의 역사와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고, 테일러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경영학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초 시계를 가지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통제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과학적 관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스로 파업은 진정되었지만, 1912년 미국의회가 나서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테일러는 의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는 결코 효율적인 대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는 시스템만도 아닙니다. 이는 초 시계로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평가하는 장치도 아닙니다. 이것은 노동시간이나 동작에 대한 연구도 아닙니다. … 이것은 완벽한 정신혁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테일러의 노동윤리이자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경영분야의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과학적 관리방식은 위대한 통찰력이었고, 서구 사상에 미친 영향들 중 가장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공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적 관리에 대한 강박관념은 그의 말년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디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완벽한 잔디를 만들기 위해 800번 이상 실험을 했습니다. 1cm2에 심겨진 잔디 잎을 늘 계산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한두 해 동안 테일러는 잔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잔디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잔디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공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테일러의 강박관념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행위의 합리화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테일러의 후예로서 테일러리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멍청하게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일러가 만약 대학을 마치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미국경영학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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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