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영학의 기초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여 합리화하고자 했던 <테일러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테일러보다 계량화에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인물이 <맥나마라>였습니다. 그는 자동차회사의 경영진으로, 국방장관으로, 세계은행총재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이상을 데이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합리적 사고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과지표(performance indicator)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를 통해 관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숫자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항상 의미가 붙어있다

 

성과지표를 스코어로 매길 수 있도록 숫자화하는 데에는, 숫자가 주는 강력한 힘에 대한 믿음과 지표의 객관성을 높여준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숫자가 주는 마력에 빠집니다. 그리고 숫자는 객관성을 갖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있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숫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똑 같은 숫자라도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냉장고를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과 똑 같은 냉장고로 연간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이 있다고 칩시다. 숫자로 보면, 똑 같습니다. 둘 다 똑 같은 성과를 올렸으므로 회사입장에서는 똑 같이 취급해야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에는 결코 똑 같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숫자에는 항상 어떤 의미가 붙어 있습니다. 만약 홍길동이라는 세일즈맨은 강남의 압구정동에서 올린 매출이고, 김갑순이라는 세일즈우먼은 달동네에서 올린 매출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똑 같이 취급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단순화시킨 사례지만, 어떤 경우에도 숫자에는 무수히 많은 가치와 의미들이 붙어 있습니다.

 

시험 성적이 95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잘 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모든 학생들이 100점을 맞았는데, 95점을 맞은 것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평균점수가 70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의미일까요? 평균점수가 98점이었다면, 95점은 무슨 뜻일까요? 헷갈리죠?

 

전교 석차 3등은 또 무슨 뜻일까요? 잘 한 것일까요? 못한 것일까요? 10명중에서 3등과, 100중에서 3등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다른 학교학생까지 합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전국적인 석차로는 어떨까요? 아니면 다른 나라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어떻게 될까요? 부자촌 학교의 3등과 농어촌 학교의 3등은 어떨까요? 족집게 과외로 무장한 학생의 3등과 소녀가장의 3등을 비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헷갈리죠?

 

그래서 통계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통계학은 사물을 숫자로 전환하여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거꾸로 통계학은 숫자에 붙어있는 각종 의미를 떼어내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은 통계학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학문이 되었습니다. 고객만족도, 투표성향, 직원충성도, 환자의 완치율 등과 같은 것은 모두 통계학에 의존하는 지표들입니다.

 

그런데, 통계학은 어떤 대상이 숫자로 전환되지 않으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숫자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때 몇 가지 사항을 가정합니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 보죠. 운동장에 모인 사람 수를 세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가정이 필요합니다. 모두 300명이라고 한다면, 남자만 그렇다는 얘긴지? 성인만 그렇다는 얘긴지? 아니면 어린이도 포함된 것인지? 어린이를 포함한다면 몇 살까지 포함시킬 것인지? 임신중인 태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경제조회사 직원은 안경 쓴 사람만을 셀 것이고, 산부인과 의사는 가임 여성만을 셀지도 모릅니다. 계산하는 목적에 따라 숫자는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통계학자 데밍(W. Edwards Deming, 1900~1993)은 이 세상에 참값(true value)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험적 관찰에 의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측정절차나 관찰의도에 따라 새로운 숫자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숫자로 전환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미가 삭제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그 숫자를 나타나게 한 가치기준 이외의 모든 가치를 생략해 버립니다. 오로지 그 가치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좌우간 숫자로 전환해서 통계학의 기법들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통계학을 필수로 공부해야 하며, 통계수치를 통해 사회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통계학적 기법을 통해 처리된 모든 숫자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

 

그래서 경영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슈들을 숫자로 전환하여 통계적인 처리를 거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온 숫자라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근대계몽주의가 뿌린 사상적 전통입니다. 오늘날 합리화의 전제는 모든 사태와 현상과 사물을 계량화를 통해 숫자로 표현해야 하고, 그 숫자를 통계적 기법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BSC는 매우 합리적인 수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BSC수단의 합리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을 세밀히 관찰했던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합리화(rational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합리화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단의 합리화와 목적의 합리화입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이것을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구분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BSC는 수단의 합리화 장치입니다. 따라서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수단이 목적을 바꾸어서는 안 되며,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BSC라는 수단이 워낙 경영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다 보니(다른 말로 하면 컨설턴트에게는 돈벌이가 되다 보니), 목적을 잃어버린 채 BSC 자체의 정교화에 노력을 치중해 왔습니다. 캐플란 교수와 노튼 박사는 1996년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된 『BSC: Measures that drive performance』에서부터 2006년의 『Alignment』에 이르기까지 목적합리성보다는 수단합리성을 정치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BSC개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 것이죠. 1990년대 초반에 개념화된 BSC는 이제 기업의 목적과 이념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하면서 숫자로 목적과 수단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노력과 투자에 비해 그 효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BSC에서는 목적의 합리성을 명확하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더 물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정직하게 제기해야 할 때입니다.

 

BSC가 수단의 합리화 장치라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BSC에는 그것이 재무적 이익임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무적 이익을 위해 고객, 내부프로세스, 구성원의 학습과 성장을 고려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묻겠습니다.

 

기업에서 재무적 이익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 인간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물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연료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는 연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재무적 이익이 없으면 생존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재무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닙니다.(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기업을 세운 것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한 투자자들의 몫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누가 기업을 하겠는가? 반론의 소리가 내 귀에 쟁쟁거립니다. 그런 목적으로 기업을 세웠다 해도 일단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은 사회적 현상입니다. 바로 여기서 피터 드러커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드러커는 이익의 지평을 넓힌 사람입니다. 기업의 이익이란 투자자의 위험프리미엄, 진부화에 대한 재투자비용, 사회적 공헌 등과 같은 협동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기업에서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후일 상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재무적 이익, 연료, 물은 모두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BSC는 기업의 존재목적이 재무적 이익인 것으로 가정하여 고안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BSC의 개념을 그대로 밀어붙이면 기업의 재무적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처럼 구조화되었습니다. 재무적 이익을 위해 구성원을 쥐어짜는 방식의 경영은 결국 구성원의 능력과 행복을 감퇴시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재무적 이익에 몰입하는 것은 곧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리는 셈이 됩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소수의 빗나간 행복추구를 위해 다수의 불행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재무적 이익을 추구할수록 재무적 이익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월 스트리트가 온갖 계량화된 기법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결국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재무적 이익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성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BSC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재무적 이익을 얻으려는 수단의 합리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박사는 이것을 의도의 역설”(paradoxical intention)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의도는 그 의도를 강렬하게 드러낼수록 그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프랭클 박사가 나치시절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존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떨립니다. 면접시험을 잘 보려고 애쓸수록 정작 인터뷰할 때는 머리가 하얗게 바뀝니다. 주식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돈을 잃습니다.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회장을 역임하셨던 윤병철 회장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네발 가진 짐승과 같아서 두발 가진 사람이 좇아갈 수 없다.” 오랜 기간 금융인으로 존경 받는 삶을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되새겨봐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그 결과로 돈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나는 BSC를 도입한 기업과 관료조직에서 소위 마음의 2중 장부가 쓰이고 있는 상황을 자주 보았습니다. BSC의 성공여부는 최고경영층의 이해와 관심에 달려있다고 했기 때문에(하기야 어떤 일이 최고경영자의 이해와 관심이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 BSC도입을 담당하는 혁신담당자들은 윗선의 힘을 빌어 현업부서를 BSC형식에 맞추어 숫자를 보고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면 현업부서에서는 형식에 맞는, 그러나 큰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정도의 숫자를 꿰 맞추어 보고합니다.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도덕적 감정이 굳어버립니다. 세상은 다 이런 거야! 다른 방도가 없잖아! 해달라는 대로 해줘! 스스럼없이 자포자기 하고 제도에 순응하여 살아갑니다. 점점 영혼의 능력을 잃어갑니다.

 

숫자는 스스로 만들어 냈을 때 의미를 갖습니다. 외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의해 만들어진 숫자는 마음에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숫자 자체가 발산하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영혼과 실존을 통해 발산되도록 해야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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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바나드(Chester Barnard)의 균형잡힌 조직이론과 인간 중심적인 사상은 제2차 대전의 긴박하고도 엄혹한 상황에서 제대로 꽃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에 인권과 자율성, 욕망과 행복 등은 사치스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원이나 수단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것이 있는데,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perations research, OR)라는 개념입니다. 영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고 운송하는 합리적 방안에 관한 연구로부터 소박하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 각 분야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레이더(radar)나 대공화기를 가장 적정하게 배치하는 방법과 전함의 적절한 배치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대서양에서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발된 기법들이 전후에 기업경영에 응용되어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R)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학분야에서 응용되던 것이 이제는 사회과학의 거의 전분야에서 응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OR을 의사결정을 위한 계량적 모형을 연구하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류혁신에서부터 테이터 트래픽까지, 서비스 퀄리티에서부터 인사배치에 이르기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OR이 경영과학(management science)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은 인류에서 계량화라는 정신적 바이러스를 유행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은 계량화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량화 없는 문명은 불가능합니다. 누가 더 정교하게 합리화된 모형으로 세계를 설명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OR 또는 경영과학은 앵글로색슨(Anglo-Saxons)이 발전시켜 왔고, 그들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20세기 후반, 지구의 대부분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계량화에 뒤처진 동북아

 

이렇게 세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동북아에서는 오랜 동안 공자와 맹자, 주역에 의지해서 통합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담론은 계량화를 천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했고, 그래서 좋은 문장과 시()를 중시했습니다. 전쟁에서 동북아 역시 앵글로색슨에게 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치욕을 만회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그들이 추구했던 합리화의 계량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가장 먼저 추구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산업을 철저하리만큼 계량화시켰습니다. 공산품의 품질에서 그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산업의 모든 공산품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계량화라는 것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계량화의 질서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베푸는 어마어마한 편익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반복하지만, 계량화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통일된 질서가 사라지면 일상생활은 매우 불편해지고 비효율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전에 수도꼭지를 트는 방식이 서로 다른 집과 사무실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 수도꼭지를 눌러야 할지 뽑아야 할지 몰라서 번번히 실수를 했습니다. 집에서는 꼭지의 레버를 위로 올려야 물이 나오고, 사무실에서는 아래로 눌러야 나옵니다. 이상한 건물에 가면, 꼭지를 하도 기묘하게 만들어놔서 어떻게 해야 물이 나오는지를 몰라서 잠시 당황한 적이 꽤 많습니다. 도무지 질서가 잡혀있질 않습니다.

 

건물에 들어갈 때도 어떤 곳에서는 왼쪽을 당겨야 열리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을 밀어야 열립니다. 어떤 곳에서는 왼쪽 문을 개방해놓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 문을 개방합니다. 문을 열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헷갈립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신호등과 도로표지판이 정말 개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모든 운전자들이 정지선을 밟고 올라서도록 유혹하는 위치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나의 첫번째 책 『똑똑한 자들의 멍청한 짓 한국 관료조직의 개혁을 위한 진단과 처방』에서 교통신호등의 위치에 대해 상세히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관료들의 답변은 그렇게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예산이 든다고 발뺌을 해오면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신호등이 운전자들을 잠재적 법규위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울러 도로표지판 체계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갔다가는 운전자가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철저하게 합리화하고 철저하게 계량화됨으로써 질서가 잡혀있어야 할 영역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많은 불편과 비효율을 발생시킵니다.

 

혹시나 이 블로그에 쓰인 여러 글을 읽으면서 내가 계량화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풍요로운 삶은 계량화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와 살고 있는 집은 모두 계량화에 기초해 있습니다. 계량화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물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계량화 해야 할 것 vs. 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런데, 문제는 계량화해야 할 것과 계량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계량화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의 정신에까지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계량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도 물이나 공기를 건져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도덕의 문제는 계량화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짓은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행위입니다. 누군가 말했죠, 도덕을 법률로 규제하면 억압이 된다고.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인류의 영혼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처참한 말로를 맞았고 문명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발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IQ로 재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얼마나 허망한 잣대였는지도 이미 잘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행위가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다루는 교사들에게 성과급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비도덕적이고도 반인륜적인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문제를 다루는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계량화의 잣대로부터 자유롭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도록 유인하는 기제의 하나로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에 대한 등급화와 서열화 평가가 불가피합니다. 여기에서 계량화가 개입됩니다. 이런 계량화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교사들의 영혼과 정신을 돈에다 팔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할 것입니다. 전혀 엉뚱한 것을 계량화하고 있으며 전혀 엉뚱한 것에다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셈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문제와 관련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논의하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말이 나온 김에 교육관료들의 사고와 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계량화의 바이러스가 경영학을 점령하다

 

이제 다시 경영학으로 돌아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전세계는 계량화의 몸살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회과학은 계량모형으로 실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학적인 또는 통계학적인 증거를 들이대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영학의 모든 영역도 계량화에 매진했습니다.

 

회계학이나 재무학, 경영과학 등에서의 계량화는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 분야는 아직도 계량화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고, 학자들은 더욱 힘을 써서 계량화의 진보를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볼 때, 회계학은 경영학의 각 분과학 중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입니다. 회계자료가 회사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비대칭성은 단순한 금융과 크레딧리스크(여신위험)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2007년부터 서서히 시작된 금융위기는 사실 회계학의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재무제표가 기업의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회계학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회계학자들과 회계사들은 돈에 팔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앞가림이나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인사관리분야에서도 계량적 연구를 중시했습니다. 채용에서 퇴출까지 모든 인사업무의 합리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은 계량화가 전제였습니다. 조직구성원의 정신과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인사관리에서는 계량화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계량화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고 사물화(事物化)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인사관리는 과감하게 계량화를 시도했습니다. 실증할 수 있는 방법은 계량화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과관리(performance management)에서 계량화를 추진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숫자로 표시되는 성과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도 숫자로 평가하여 숫자로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숫자로 표현하도록 시도했습니다. 이런 계량화 작업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기를 맞이합니다. 성과관리를 위한 숫자들을 기업전략으로도 연결시켰습니다.모든 전략과 전략실행이 숫자의 연쇄로 엮어지도록 만들어 기업체에 팔았습니다. 그가 바로 회계학자였던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1940~) 교수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조직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회계학자였습니다. 그가 성과관리를 계량화함으로써 균형잡힌 성과지표카드(Balanced Scorecard, BSC)개념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폐해는 심각합니다. 이것 또한 나중에 별도로 상세히 언급할 예정입니다.

 

계량화 바이러스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드러커

 

제2차 대전 후에 나타난 이러한 계량화의 대세에 저항했던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였습니다.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영학자였습니다. 바나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드러커는 전후에 컨설턴트로서 미국의 대기업들을 관찰한 후 1954년에 불세출의 명저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를 출간합니다. 그는 여기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오늘날 읽어도 주옥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입니다.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는 그 후에 많은 후학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바나드가 구성원 개개인의 직무수행과정에서 느끼는 충족감의 표시로서 사용했던 효율성 개념이, 후학들에 의해 나중에는 아예 투입대비 산출이라는 공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었듯이, 드러커의 목표관리 개념에도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목표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MbO)로 알려진 것입니다.

 


드러커가 생각했던 것은, 테일러리즘이 추구했던 합리화 또는 계량화가 가져다 주는 생산성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 개개인에게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일하게 한다면 더 높은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목표관리의 주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명령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domination)을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self-control)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준 데 있다. …… 그러나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이 하나의 현실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올바르고 또 바람직스러운 것이라는 인식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새로운 도구를 필요로 하고, 아울러 전통적 사고방식과 관행에 있어 광범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6~197)


 

드러커는 계량화의 전통과 관행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목표설정에 있어 측정기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오늘날 가장 문제시 되는 지점입니다.

 

기업의 모든 주요한 분야에 대해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측정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진정 변함없는 관행으로 정착시켜야만 한다. 그런 측정기준은 엄격하게 숫자로 표시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정확할 필요도 없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7)


 

합리화, 계량화, 숫자에 찌들어 있던 미국인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측정기준은 숫자로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확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관리할 때에만 비로소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테일러리즘에 의해 계량화된 노동의 노예상태에 있던 근로자들을 자율적인 인간으로 해방시킨 사상가가 바로 드러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드러커의 사상은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숫자 없는 자율적 인간에 대한 전제는 숫자로 쪼아대야 하는 타율적 인간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숫자로 쪼아대는 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으로 알고 있고,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커의 노력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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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에 대한 치료행위는 의사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환자는 자신의 고통을 치료해줄 의사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의사의 일방적 처방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의사와 환자는 결코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질병에 대한 전문가지만, 환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정보와 지식의 차이는 힘의 격차로 작용합니다. 정책입안자와 수혜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실존적 사유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의사로서의 경력과 그 경력에서 오는 철학적 사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정신병리학 전문가로서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주목하게 했고, 철학적 문제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치료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환자의 실존적 체험을 이해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력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가족, 직업, 사회적 관계 등 개인사의 상황을 잘 이해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은 인간의 육체에서 발생한 고통과 질병을 처치하거나 떼어냄으로써 온전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것은 온갖 실험적 증거와 통계적 확률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처방이 어떤 환자에게는 들어맞을 수 있으나, 다른 환자에게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들어맞지 않은 처방을 받은 환자에게는 그것이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완전히(100%) 잘못된 처방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서구의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이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많은 통계자료와 그 분석적 계량모형, 그리고 그것을 신봉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세계적 금융위기 상황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요즘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온전한 해결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경제학자들끼리도 갈팡질팡합니다. 가이트너와 크루그먼은 똑 같은 통계수치를 보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의 우리가 그토록 신봉했고, 또한 매우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수학적 모델들은 사실상 완전히(100%) 틀린 모델이었던 셈입니다. 각자 자기 입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완전히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동안 병원에 여러 번 신세를 진 사람으로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한국야스퍼스학회에서 엮은 논문집인데,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적 사유와 치료의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야스퍼스가 말한 실존적 치료는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실존적 치료는 단순한 의학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학 전체의 문제이자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서 근대문명이 추구했던 합리적이고도 차가운 해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존적 이해와 체험을 중시했던 야스퍼스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존적 체험이란 환자가 처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서 치열하게 살아 왔던 상황이나 사업의 실패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사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육체적 질병이든, 정신질환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책입안자들이, 현장에서 시민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통계숫자만으로 입안하면 사회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상황이나 국가적 정책과제들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보면, 주장만 있을 뿐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한 상태입니다. 정책입안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현장의 실존적 상황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의사는 환자가 되어 봐야 합니다. 정책입안자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판자촌과 옥탑방에서 살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카드빚에 내몰려 봐야 합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봐야 합니다. 한두번 광고용이 아니라 매일 말입니다. 그러면 사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사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조건의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를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면할 수 있는 시간과 충분한 의료수가, 양질의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의료시설과 의료장비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이루어져야 환자와 의사의 실존적 만남을 통해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갈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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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는 조직이 성립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 공동의 목적
둘째, 협력의지
셋째, 커뮤니케이션

일반적으로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동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바나드는 공동의 목적을 구성원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목적 달성을 위한 경영개념이 효과성과 효율성으로 분리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특히 효율성 개념을 공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측정할 수 없는 많은 가치들이 제거되는 등 바나드의 사상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음을 살펴봤습니다.

이러한 왜곡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숫자가 주는 마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930년대부터 미국에 불기 시작한 국가기반시설의 확충정책도 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국가정책적으로 대규모 토목공사와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공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이고, 엔지니어가 가장 각광을 받고 또한 존경도 받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기업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공학적인 마인드가 중요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하여 정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195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발사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위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았던 케네디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국가운명을 걸 정도로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학기술에의 투자는 국가적 아젠다가 되었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과학기술 개발에 대거 참여했고,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이 당연시되었고, 숫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넘어 정직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테일러의 사상에 기름을 부은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여 정확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숫자가 서서히 이데올로기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회과학적 연구의 모든 주장이나 판단은 반드시 숫자나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행위도 계량화하여 숫자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계량경제학이나 계량경영학이 중요해졌습니다. 수학적 재능이 없이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학문영역은 철저하게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통계숫자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때부터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려면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 모델로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게리 베커(Gary A. Becker, 1930~) 교수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사람을 자본으로 본 것입니다. 경영자나 행정당국이 사람에 대한 교육투자와 같은 의사결정을 내릴 때 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투자수익률까지 아우르는 합리적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말하자면, 합리적으로 비용과 혜택을 계산해서 결정할 수 있는 수학모델을 만든 것입니다. 이 모델을 가족관계, 노동시장, 결혼시장, 이혼시장 등으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하여 논쟁에 참여했고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베커 교수가 199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음으로써 논쟁은 끝났습니다. 합리화, 계량화, 과학화, 숫자화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합리화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자본시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피셔 블랙(Fischer Black, 1938~1995), 마이런 숄즈(Myron Scholes, 1941~),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 1944~). 이 위대한 세 인물이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우선, 머튼은 투자자들이 자산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배분하는지를 연구해서 소위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Capital Asset Pricing Model, CAPM)이라는 수학모델을 만들었습니다.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즈는 그 유명한 옵션가격결정모형(Options Pricing Model, OPM)을 만들었습니다. 파생상품의 가격결정메커니즘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파생상품을 포함한 주식시장의 모든 가격결정메커니즘을 수학모델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델은 이미 70년대에 만들어져서 실무에서도 활용되었고, 실증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론들이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기본적인 프레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70년대 CAPMOPM을 포함한 투자이론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전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자본시장에서 인간의 행동이 수학모델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이론들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다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재무관리를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은 없었지만 투자이론의 정교함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젊은 지도교수는 투자론 교과서를 써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일제시대 때 배운 지식으로 가르치던 교수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라는 참신한 용어도 없었지만, 투자론은 세상이 수학모델로 설명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많은 학생들이 흥분했고, 너도나도 투자론에 빠져들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지도교수는 출판사로부터 엄청난 인세도 받았습니다. 그는 인세를 다시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론과 실제를 조화시켜보려 했습니다. … 그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투자이론을 포기하고 중도에 대학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은행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단지 나의 개인적 역사일 뿐이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투자이론에 여전히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론들은 지금 금융공학이라는 용어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니까 1997년 자본시장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수학모델의 기초를 세운 이 위대한 성과에 대해 스웨덴의 노벨위원회가 노벨 경제학상으로 보답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셔 블랙은 노벨상이 수여되기 2년 전에 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머튼과 숄즈에게만 상이 수여되었습니다.

이제 금융공학은 주식시장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대박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Long-Term Capital Management(LTCM)라는 헤지펀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펀드는 투자은행 살로몬 브라더스의 전설적인 채권 트레이더 메리웨더(John Meriwether, 1947~)1993년 세운 회사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숄즈와 머튼, 월 스트리트 최고의 트레이더들, 그리고 하버드와 MIT 교수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끌어들여 펀드를 운영했습니다. 펀드는 연 4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자랑했습니다. 냉철한 머리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압하면서 월 스트리트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높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1998년도에는 자기자본(47억 달러) 2,500%나 되는 자금을 끌어들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으로 투자거래를 계속했습니다. 이 돈을 주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바람에 그 해 부외자산은 무려 12,500억 달러나 됐습니다.

빚은 잘 나갈 때는 대박이지만문제가 생기면 독약으로 돌변합니다이들은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그 이듬해 러시아의 금융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해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파산했습니다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LTCM은 불법적인 조세회피 거래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나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LTCM의 성장과 파산과정은 이미 책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현실이었습니다. 천재들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두 권의 흥미진진한 책을 소개합니다. 『라이어스 포커』와 『천재들의 실패』입니다.


파산 후에도 두 명의 노벨 수상자는 우여곡절 끝에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로버트 머튼은 2007년 금융자문회사인 Trinsum Group에 합류했습니다. 이 회사는 이번 금융위기에 다시 큰 손실을 입고 2009 1월에 파산보호신청을 냈습니다. 마이런 숄즈도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대만계 중국인이 세운 Platinum Grove Asset Management라는 헤지펀드를 맡았는데, 이번 금융위기로 또다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현재는 펀드가 환매중단 상태에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 만든 합리적 계량적 과학적 모델이 세상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지성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연구가 진전되면 인간이 만든 합리적 모델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세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합리화 계량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합리화되지 않는 세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체스터 바나드가 제시한 조직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계량화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려서 조직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직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선각자 체스터 바나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개인과 조직에 도움이 되는 감각)은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이다. 그것이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지성(intelligence)과 영감(inspiration)이 필요하다. 지성(intelligence)은 여러 사람들이 복잡한 세계에서 그들의 기술적인 역량이 서로 얽혀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 그것은 정규교육보다는 오히려 협동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inspiration)은 조직에 통일감을 주고 공동의 이상(ideals)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하다. 구성원들이 이 이상을 지적으로 수용하기보다도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여러 사건을 제대로 관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의 이상(ideals)에 대한 신념이 구성원들의 협동을 이끌어내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1930년대에 이미 조직을 오늘날과 같은 경쟁체계가 아닌 협동체계로 파악했던 체스터 바나드의 혜안이 놀랍지 않은가!

재미 없겠지만, 바나드 얘기는 계속됩니다. 아주 중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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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미국식 경영의 기반이 무엇이었는지는 그들이 지난 세기 100년간 발전시킨 경영학과 경영실무를 보면 명확히 드러납니다. 미국식 경영학의 전제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자원(resources)이다. 인간을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미국식 경영학은 자원경영학(resource management)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 HR)라는 단어가 조심스럽게 사용되다가 요즘은 누구나 이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모든 자원은 합리화(rationalization)되어야 한다. 당연히 인적자원(human resource)도 합리화의 대상입니다. 인적자원을 합리화시키는 다양한 방법과 기술들이 개발되었습니다. 경영학의 인사조직이론뿐만 아니라 특히 산업심리학 또는 조직심리학, 시스템 이론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합리화의 기초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셋째, 경영의 목적은 이윤극대화(profit maximization)에 있다.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이므로 모든 자원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야 합니다. 우리가 배웠던 인간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사라졌습니다. 신뢰와 사랑이 이윤과 탐욕으로 대치되었습니다. 탐욕은 좋은 것이고 이윤은 선()한 것입니다.

 

이 세가지 기반을 잘 활용한 사람들이 칭송을 받습니다. 잭 웰치(Jack Welch, 1935~)와 같은 경영자들이 위대한 경영자로 추앙 받고 그를 모방하려고 합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정력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자비한 구조조정을 전문으로 해서 전기톱’(chainsaw)이라고 불렸던 앨버트 던랩(Albert Dunlap, 1937~) 같은 이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윤을 추구하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잘 살게 되었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경영학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이 인간을 자원으로 활용하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인문학자들까지 나서서 장사에 도움이 되도록 해 줄 테니 끼워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인문학을 엑기스로 추려 5분에서 10분짜리로 쪼개서 그럴 듯하게 포장해 팔기도 합니다. 기업가들이 이걸 사서 봅니다. 유식해진다는 느낌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다소나마 해소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업관, 인생관, 세계관, 나아가 현실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비타민 몇 알로 건강해질 수 없는 것처럼 인문학 강좌 몇 개 들어서 마음의 근육이 단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기업가와 경영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문학을 적어도 10,000시간 이상 공부해야 합니다. 10,000시간은 너무 심하다구요? 그럼 맘대로 하시죠. 양념으로 비타민을 먹으면서 직원들을 짐승처럼 부리면 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경영하시면 됩니다. 

공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가급적 원전텍스트를 보면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경영은 이때부터 풀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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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앞에서 회사를 합리화하는 첫 번째 이유였던 <비용절감은 오히려 장단기적으로 비용을 증대시킨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합리화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고객을 만족시켜서 장기적으로 판매를 유지 확대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경영의 맥도날드화가 과연 고객을 만족시키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맥도날드화하는 방식이 고객관계관리(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입니다. 흔히 CR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객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충족시켜 줌으로써 효율적으로 매출을 증대시키려는 일련의 노력을 말합니다. 채식주의자인 고객에게 스테이크를 대접하려고 한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이 휴가를 떠났는지도 모른 채 생선을 선물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비효율적인 고객관계활동을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아이디어는 훌륭한 것입니다.

 

CRM기술은 20세기 말에 급속히 발달해서 지금은 소프트웨어 패키지만해도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달러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패키지 공급회사들은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을 들어보면, 회사 경영진이 CRM시스템을 깔면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을 갖게끔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업들이 고객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시스템을 깔고, 데이터를 유지 관리하는 전문인력을 채용합니다.

 

최근에는 단순히 고객관계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내부프로세스를 개선하기도 합니다. 전략, 마케팅, 광고선전, 재무, 인사 등과 같은 백오피스 기능까지도 CRM에 흡수하여 처리하는 광범위한 패키지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특성별 시장점유율, 고객유형별 이익기여도, 지역별 고객성향 등을 분석하여 적절한 전략수단을 구사할 수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CRM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객에 관한 모든 정보, 즉 고객 본인의 신상정보뿐만 아니라 그 친인척과의 관계를 일일이 표준화된 자료로 바꾸어 데이터베이스로 저장하는 엄청난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나아가 고객의 개인적인 욕구와 욕망을 파악하여 데이터베이스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컴퓨터로 분석하여 고객접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있는 사물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욕구와 욕망은 수시로 변하고, 사회적 관계도 쉴새 없이 변화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동적인 변화를 데이터화하여 적시에 입력하지 않으면 그 데이터는 쓰레기가 됩니다. 그래서 데이터의 청소(cleaning) CRM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청소해주는 전문인력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제대로 청소하기 위해서는 세일즈맨이 고객의 정확한 정보를 일일이 직접 입력해야 합니다.

 

CRM이 실패하는 원인을 청소를 제때에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청소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일즈맨은 자신의 소중한 고객의 정보를 CRM시스템에 노출시키기를 꺼려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면 고객을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정확한 정보의 수집단계부터 쉽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합니다. CRM시스템 공급업체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 삭제하고 완벽한 데이터가 수집된다는 전제하에 프레젠테이션 했던 것입니다. 전제가 틀리면, 모든 것이 틀려집니다.

 

CRM에는 인간의 실존적 체험과 욕망을 수치화하여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객관적인 수치로 계량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정신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할머니들의 실존적 체험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몸소 실존적으로 체험한 사람과 그 사건을 단순히 전해 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이해의 간극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객관적 수치로 환원하여 잘 관리함으로써 고객관계가 좋아졌다고 느낀 세일즈맨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CRM이 성공적이었다는 회사는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견문이 짧아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CRM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실패의 원인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CRM은 인간의 욕망을 몇 개의 변수로 환원하여 관리하면 충분히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허망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글의 독자 중에는 금융기관이나 거래 회사로부터 이러저러한 선물을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VIP고객이라면 명절마다 큰 선물을 받았을 것이고 평범한 고객이라면 평범한 선물을 받았을 것입니다. 대개 갈비세트에서부터 신년다이어리와 달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물을 보냅니다. 배달이 잘못 되는 경우도 있고, 선물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CRM데이터의 분류에 근거해서 그렇게 처리됩니다.

 

방금 말했듯이 CRM데이터는 고객접점을 책임지고 있는 세일즈맨이 일일이 직접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선물을 받아 보니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던가요? 대부분은 회사에서 부질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썩 필요하다고 느끼던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든 고객만족의 맥도날드화가 고객만족은커녕 회사가 고객을 냉소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CRM은 세일즈맨의 마음이 고객의 마음과 연결되어서 고객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고객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판매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고객관계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교차판매(cross-selling)와 추가판매(up-selling)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세일즈맨들을 선발하고 교육시킬 때, 이런 감정능력(emotional capability)를 잘 감안해야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고객관계의 철학을 무시한 채, CRM시스템을 깔아놓고 데이터베이스에서 뽑아주는 자료를 가지고 고객들에게 판매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판매를 잘 하는 판매왕들의 진솔한 얘기를 들어보면, 회사가 공급해주는 CRM자료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그게 다 죽은 데이터와 쓸모 없는 정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엄청난 돈을 들여 깔아 놓은 CRM시스템을 갈아 엎으란 말인가? CRM팀을 해체하란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최소한으로 줄이되, 잘 활용하는 길을 찾아보면 됩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엄청난 직간접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대폭 축소해야 합니다. 현장의 세일즈맨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기능, 즉 세일즈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능만을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전산프로그램에 맡기려는 발상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반성할 수만 있다면, 비싸긴 했지만 그 동안 수업료를 지불한 것으로 치면 됩니다. 훌륭한 목수는 망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목수는 망치로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수의 영혼과 마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필요로 하는 적절한 망치를 공급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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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세계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합리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합리화(rationalization)란 원하는 것을 달성하게 하는 모든 수단과 대안을 계산하여 최대한 활용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합리화의 정의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원하는 것(desired ends)

계산 가능한 수단(calculable means)

최대화(maximization)

 

여기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생활의 편리함에서부터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사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돈입니다. 돈을 벌어야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돈이 합리화의 원동력이 됩니다. 계산 가능한 수단에는 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도 포함됩니다. 최대화는 그 수단을 활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합리화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 음식문화의 표준화입니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다른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는 인간이 먹는 것을 표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아무도 음식이 표준화되고 계산 가능하며 통제 가능한 상품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것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레이 크록(Ray Kroc, 1902~1984)이었습니다. 그는 맥도날드를 프랜차이즈화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맥도날드야말로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합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전반의 포드자동차의 T모델에 버금가는 위대한 합리화였습니다. 맥도날드는 미국식 합리화의 상징입니다. 맥도날드식의 합리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끊임없이 파고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분석한 미국 사회학자 조지 리처(George Ritzer)는 이것을 사회의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 of Society)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맥도날드화의 이점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들었습니다. (조지 리처, 김종덕 옮김, 맥드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시유시 1999 참조)

 

효율성: 배고픔을 즉각적으로 채워줄 수 있습니다.

계산 가능성: 제공되는 제품의 크기와 양, 그리고 서비스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성: 언제 어디서나 제품과 서비스가 동일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통제: 매뉴얼에 의해 인간을 통제합니다.

 

앞의 세 개는 장점으로 이해되는 데, 마지막의 통제는 어떻게 장점일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비합리적인 동물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은 정말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런 인간을 무인기계가 통제하기 때문에 일관성이 생겨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인기계에 의한 통제의 장점입니다.

그래서 맥도날드화 되었고, 지금도 맥도날드화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에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아파트생활이 전형적인 삶의 맥도날드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맥도날드식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효율적이고 계산과 예측이 가능하고, 통제되고 있는 삶을 말입니다. 쇼핑이 맥도날드화 되고 있습니다. 대형마트에 가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을 골라 계산하고 빠져 나오면 됩니다. 맥도날드화의 이점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습니다.

 

큰 문제는 교육이 맥도날드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험문제를 잘 푸는 학생들을 만드는 것이 일선학교의 목표가 됨으로써 학생들을 햄버거 찍어내듯이 학교를 졸업시킵니다. 더 큰 문제는 온 사회의 시스템이 맥도날드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해도 역시 맥도날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기획사에 의해 맥도날드화된 인물들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6,70년대 활동했던 가수들은 적어도 뚜렷한 자기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성형으로 제조하여 춤으로 몸을 만들어서 무대에선 립싱크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이런 연예인들에게 열광하는 것 또한 맥도날드화되어 있습니다. 팬클럽 만들어서 마케팅 전략을 잘 쓰면 인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디가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디가 인위적인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정말 큰 문제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이 온통 맥도날드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조직은 철저하게 규정과 규칙, 지침과 매뉴얼로 운영됩니다. 이런 것들이 구성원들을 통제합니다. 정보시스템이 깔려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조직구성원들이 그 시스템을 잘 따라 하면 중간은 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보시스템을 깔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하면 될 뿐입니다. 계량화된 성과관리시스템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효율성이 창의성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렇게 합리화하는 원동력은 돈입니다. 패스트푸드업계의 경쟁에 대해 레이 크록이 한 말을 볼까요.


"이것은 쥐가 쥐를 먹고 개가 개를 먹는 형국이다. 그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그들을 죽일 것이다."(바버라 오클리, 이종삼 옮김, 나쁜 유전자, 살림 2008, 408쪽)

 

레이 크록에 있어서 돈은 모든 것입니다. 맥도날드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돈의 힘입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합리화하면 할수록 오히려 비합리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의 폐해는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을수록, 나아가 그것에 중독될수록 육체와 정신이 더욱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생활이 편리하지만 비인간적일 정도로 개인주의화되는 폐해는 점점 심해집니다.

 

천천히 조리된 음식을, 명상적 태도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을 때,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텃밭에서 일용할 양식을 재배해서 먹는 삶이 아파트 살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실천할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맥도날드화의 폐해를 줄일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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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세계를 합리화(rationalization) 해왔습니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이성(reason)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면서 급속도로 합리화되어 왔습니다.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한 사람은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고리대금업이나 상업을 통한 이유추구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러나, 베버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는 부가 축적되고 있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사상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배태한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을 검증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그는 이 저작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이 경제적 부를 얻은 합리적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중세에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부에 대한 관념을 죄악시했습니다. 특히 고리를 취하는 것은 철저히 비난받을 일이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수도원에서는 엄격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수도원에만 머물던 금욕적인 삶이 세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금욕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성경의 엄격한 가르침에서 현실에 맞도록 다소 순화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수도원의 고독 속으로 도피했던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개혁주의자들의 직업윤리에 의해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속적인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금욕의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거나 느슨하게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의 금욕 사상이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직업윤리로 세속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직업윤리의 세속화 과정이 바로 막스 베버가 관찰했던 합리화(rationalization)였습니다.

 

베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 금욕주의는 닫아 버린 수도원의 문을 뒤로 하고 삶의 시장으로 걸어 나와 현세적 일상생활에 자신의 방법을 침투시키기 시작했고, 세속 안에서(그러나 세속에 의해서나 세속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합리적 생활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막스 베버, 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111)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금욕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말은 금욕이 탐욕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탐욕의 맛을 아는 것은 중독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중독되면 끊기 어렵듯이 탐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탐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볼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 바탕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거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성이 신앙의 힘을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합리화는 이성의 기능입니다.

 

막스 베버의 최대의 관심사는 이성에 의한 사회의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다른 지역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은 곳에서 일어 났을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는데, 자본제와 그 정신은 이미 14세기부터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 지방에서 일어나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버는 합리화가 개신교 윤리(protestant ethic)에서 나왔다고 보았습니다. 수도원에 갇혀있던 금욕정신이 프로테스탄트들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이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정신을 일에 대한 성실성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내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일을 통해 신의 뜻을 이루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낭비는 모든 죄 중에서도 최고의 중죄가 됩니다. 인생은 신의 부르심(calling)에 응답하기에도 너무나 짧고 소중합니다. 사교와 잡담, 사치와 소비 등을 통한 시간낭비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는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만인에게 적용됩니다. 노동의욕의 결핍은 구원 받지 못함의 징후였습니다.

 

부자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신의 섭리는 만인에게 아무 차별 없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일해야 하는 직업이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윤리는 개신교의 사회윤리에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지도자들도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선 독일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돈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법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상업적 거래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독일 국민 최대의 불행은 말할 것도 없이 이익을 위한 거래이다. …… 악마가 그것을 발명했는데, 교황은 그것을 승인함으로써 전세계에서 무수한 악을 저질렀다.”(리차드 토니, 김종철 옮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1983, 113쪽)

 

하지만, 스위스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루터는 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칼빈은 자본주의적 물결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고지식했고 이상주의적이었지만, 합리적인(rational) 사고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회의 부패와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칼빈에게도 신학적인 문제, 특히 로마카톨릭에 저항한다는 입장에서는 루터와 비슷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유연했습니다. 아마도 로마카톨릭의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특히 영향력이 큰 인물들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칼빈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자본주의 물결과 그 정신을 교회 내로 끌어들여 공식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루터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이자는 법정최고액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살짝 바꾸었습니다. 이자의 최고액이 정해졌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대부가 무상으로 행해져야 하며, 채무자는 채권자와 같은 이익을 얻어야 하고, 지나친 담보를 짜내서는 안 된다고 물러섰습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빈민의 곤궁을 이용하여 짜낸 이자와 번창하는 상인의 자본으로 번 이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적 상식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자의 질(quality)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해서 이자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양보했습니다. 기독교의 사회윤리가 엄청나게 이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내 생각에는, 자본과 이자를 바라보는 칼빈의 사상은 서구 정신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이었습니다. 성경이 제시했던 인류의 정신적 안정망(mental safety net)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자를 받지 않는다에서 “이자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진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에서 "너에게 이익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로 변질되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변화를 합리화(rationalization)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견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반쯤 맞을 수도 있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교회가 자신이 억눌러 왔던 자본주의 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본제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자본주의 정신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정신이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했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버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위대한 철학자였던 베버조차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발흥시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이 부에 대한 기독교의 엄격한 가르침을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정의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자본주의 정신은 14세기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 등을 중심으로 충분히 발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베니스의 상인들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복식부기의 원리가 이미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자본주의와 그 정신은 이미 14세기에 싹 텄고, 16세기에는 그 정신이 유럽의 전역에 퍼져있을 때였습니다. 기독교는 그 정신을 자신의 내부로 종교개혁이라는 형식을 빌어 살며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자본과 이자를 불려 부를 쌓은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면서도 이윤추구를 죄악시했던 이율배반적인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스위스 개혁가들이 기독교를 합리적으로(rationally) 구해낸 셈이 됩니다. 이로써 경제적 욕망과 탐욕적 에너지가 기독교내에 싹 틀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하여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켰지만, 교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대해서는 성공적으로 저항(protest)했지만, 자본주의 탐욕정신의 도전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신흥부자들의 가렴주구를 보다 못한 목사회(제네바의 칼빈 지도 아래 있던 성직자 단체)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려 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의 궁핍을 이용해 부유해지려고 애쓰는 파렴치한 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에 재갈을 물리자.”(리차드 토니, 김종철 옮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1983, 137쪽)

 

그러나, 목사회의 어느 누구도 이 강령이 실행되리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적 합리화(rationalization of reason)는 부()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개신교 사회윤리는 금욕에서 탐욕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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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